오피니언

[마음의 저울] 성찰의 부재

…과거에 몇 번이나 대참사가 있었는데도 그때의 경험을 제대로 정리해 놓지 않아서
참사가 일어날 때마다 유족들은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되풀이해서 겪어야 했다.

- 노다 마사아키, <떠나보내는 길 위에서> 중에서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지 한 달여가 지났다. 유족들이 찢긴 마음을 위로받기보다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으로 인해 또 다른 상처를 받고 있는 상황을 목도하며 가슴이 먹먹해지고 뱃속 아래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른다. 그나마 유족들이 목소리를 내고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추모 모임을 만들고 있어 다행이지만, 이태원 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일상적이다. 과연 무엇이 사람을 사람답게 하며, 혹은 사람답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

유족들의 시간이 2022년 10월 29일에 못 박힌 채 멈춰져 있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영정도 위패도 없이 애도기간을 선포하는 것만으로도 끝났다고 여긴다면, 한참이나 잘못된 처사이며 이에 대한 후과는 정권 담당자를 넘어 우리 사회의 구성원 모두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불행은 각자 자기 삶을 살아가느라 바빠 이웃의 아픔과 고통을 체감하지 못하는 데 있다. 그 어떤 보상이 이들의 비통함을 달랠 수 있을 것인가. 슬픔은 슬퍼함으로써 체험될 수 있기에 성급하게 덮으려는 시간을 멈추어 유족들의 마음에 공감하고 위로하며 고인들을 기억해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유족들뿐만 아니라 우리 또한 사람 사이의 유대와 신뢰를 경험하며 지금 여기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유가족이 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초동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대회의실에서 열린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 입장발표 기자회견에서 참사 희생자의 사진을 들고 감정을 추스르고 있다. 2022.11.22 ⓒ민중의소리

현대사회를 위험사회(risk society)라고 한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기후변화로 인한 생태계의 변화, 코로나19 등 각종 동물-인간 감염병의 발생에 따라 언제 어디서든지 대응이 불가능한 대규모 죽음이 상시화하는 사회를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정책 담당자들도 ‘안전’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손꼽고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몇몇 기득권자들의 이익에 복무하는 의사결정 구조로 정책의 우선순위가 바뀌면서 대규모 참사가 잊히고 망각된다면 또 다른 참사가 되풀이될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특히 대통령의 책무야말로 무거운 것이다. 자신의 사회적 책임성을 강조하며 대통령직을 맡은 이상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촘촘히 연결되고 확장되는 시스템 사회에서 정책 담당자나 정권의 수장 한마디로 인한 작은 실수는 사회 시스템의 에러나 오작동 등으로 대규모의 참사를 불러오는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참사로 인한 트라우마적 죽음은 주변 사람 8명 이상에서 치명적이고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죽음을 충분히 애도할 수 없는, ‘빼앗긴 죽음’이라면 더욱 그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규모 참사에서 빚어진 죽음은 일반적인 죽음과 달리 사건의 진상규명이 중요하다. 원인에 대한 납득할 만한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유족들은 현실감을 상실한 채 살아있는 시신처럼 살아가게 된다. 원인이 규명되어 상실감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이승도 저승도 아닌 경계의 마음에서 풀려나와 고인의 죽음을 마주보며 자신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슬퍼하는 것만이 애도가 아니며
분노하는 것도 애도이며
애도자의 권리를 찾은 것 또한 애도의 한 과정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상실과 죽음에 무심하고 무지하다. 참사로 고인이 된 분들을 부끄러워 할 이유가 없으며 고통 받는 유가족을 탓할 일은 더욱 더 아니다. “Hodie mihi Cras tibi(오늘은 내가 내일은 당신이)”라는 라틴어 격언처럼 죽음은 오늘은 내게, 내일은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죽음이 가족과의 이별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전체와의 관계 단절을 의미한다면, 죽음의례를 통해 애도하는 문화가 점점 사라지고 은폐된 대상이 되는 사회라면, 참사로 인한 죽음은 더더욱 금기시되고 감춰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연 이것이 건강한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측면에서 이태원 참사는 하나의 질문으로 다가온다. 희생자가 누구였는지, 이 일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 책임 있는 행동은 무엇인지. 슬퍼하는 것만이 애도가 아니며 분노하는 것도 애도이며 애도자의 권리를 찾은 것 또한 애도의 한 과정이다.

생명을 상징하는 촛불 ⓒpixabay

2001년 9.11 테러 후 세계무역센터 건물이 있던 자리에는 하늘 높은 솟은 빌딩이 사라진 자리에 물이 아래로 흘러내리는 두 개의 연못이 생겨났다. 마이클 아라드(Michael Arad)가 설계한 추모공원의 이름은 ‘부재의 성찰(Reflecting Absence)’이다. ‘의도가 있는 침묵, 목적을 가진 공백’을 목적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연못의 외곽에는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고인을 추모하고 유족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바친 꽃으로 가득 차 있다. 잃어버린 것을 잊지 않기 위해, 죽음에 대한 성찰과 연대의 마음으로 부재를 선택했고 그 부재가 슬픔을 나누고 삶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아닐까.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상 규명도 현재진행중이고, 이태원 참사의 진상 규명 또한 현재진행중이다. 시간이 흐른다고 당연히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며,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 마땅히 있어야 할 존재가 부재한 상황에 대한 뼈아픈 성찰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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