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쯤이면 온도가 제법 내려가야 하는데, 제주도에는 유채꽃이, 어디선가는 개나리가 피었다는 소식이 들릴 정도로 따뜻한 늦가을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올려다본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만 달고 서 있고 낙엽들은 각자의 사연만큼 형형색색으로 몸을 포개고 있습니다. ‘달빛 화가’라는 말을 들었던 영국 화가 존 앳킨슨 그림쇼(John Atkinson Grimshaw)의 작품에 담긴 풍경을 보며 2022년 가을과 작별해야 겠습니다.
와피데일 Wharfedale 1872 oil on canvas 61cm x 91cm ⓒ개인소장
영국 요크셔 계곡 중 한 곳, 와피데일에 얼마 전 비가 훑고 지나갔습니다. 비 안개가 아직 서성이는데 햇빛이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길을 따라 걷는 사람은 검은 점으로, 바퀴 자국을 남기고 고개를 내려가는 마차는 선으로 남았습니다. 노랗게 물든 길은 머리를 돌려 아래로 사라지고 있고 하늘과 땅이 맞닿아버린 풍경은 또 다른 몽환의 세계를 만들었습니다. 가을의 끝은 이렇게 꿈같기도 합니다.
그림쇼에 대한 자료는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은데, 이는 그가 영국 북부 지역에서 활동했고 작품 대부분이 개인 소장품이었기 때문에 대중에 노출되는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려서 그림쇼는 그림을 잘 그렸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그가 그린 그림 모두를 찢어 버렸다고 합니다. 아마 어머니는 아들의 미래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후 그림쇼는 정규 미술 학교를 다니지는 않았지만 화랑을 전전하며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보고 스스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결혼 후 전업화가로 나선 그의 작품은 그가 살던 리즈에서 소품을 취급하는 가게와 책방, 두 곳에서 판매되었습니다.
The Lovers 연인들 oil on canvas ⓒ개인소장
키 큰 나무들은 잎들을 모두 떨군 채 병풍처럼 서 있고 달빛은 길 위에 황금색으로 부서지고 있습니다. 왼쪽 담장 밑 그림자 속에 검은 실루엣으로 서 있는 한 쌍의 연인이 보입니다. 길은 연인들을 지나 두 갈래로 나뉩니다. 그렇다면 이곳이 연인들이 헤어지는 곳이 되겠군요. 또 만나겠지만 잠시의 이별도 아쉬운 듯 서로를 안고 있습니다. 너무 고요해서 지금 두 사람에게는 상대의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가장 큰 소리가 아닐까요?
그림쇼의 초기 작품은 라파엘 전파의 영향을 받아 정확한 색과 빛 그리고 생생한 세부 묘사 등이 특징이었습니다. 27세가 되던 해, 정규 미술 공부를 하지 않은 그림쇼의 첫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고, 그는 경제적으로도 부유해졌습니다. 30대 중반부터 그림쇼의 작품에는 보다 느슨한 붓 터치가 등장했고 달빛이 비치는 밤의 거리와 항구 모습이 작품의 주요 주제로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Evening Glow 저녁 노을 c.1884 oil on canvas 28.6cm x 43.2cm ⓒ예일대 영국 예술센터 미국
가을 해는 졌지만 노란 잔광이 하늘을 가득 덮었습니다. 길을 걷던 여인은 지는 해가 아쉬운 듯 고개를 돌려 남은 빛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나무들은 남은 잎 몇 개를 붙들고 하늘을 향해 수많은 손을 뻗고 있습니다. 앙상하지만 매듭마다 피와 땀이 맺힌 고마운 손이지요. 그리고 다시 살아 나는 손입니다. 떨어진 낙엽들로 길은 붉은 양탄자를 깔아 놓은 것 같습니다. 바스락 바스락, 가을이 사위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시를 좋아해서 자신의 아이들 이름 모두를 시에서 따온 그림쇼는 시에서 작품의 느낌을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인지 그림쇼의 작품 속에는 안개와 달빛과 시를 함께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그림쇼의 작품이 우리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후반 그의 작품 전시회가 기획되면서부터였습니다.
‘놀랍고도 풍부한 상상력을 가진 화가’라는 말을 듣는 그림쇼는 57세에 암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와 함께 작품을 그렸던 아들 2명도 훗날 화가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