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만 같은 무력감이 제일 힘들어요. 제대로 된 책임자 처벌을 해도 이미 지옥인데, 책임자 처벌조차 제대로 되고 있지 않잖아요."
10월 29일 이태원 참사로 사랑하는 언니, 고 이은재(34) 씨를 잃은 이민재(32) 씨는 밀려드는 무력감이 가장 힘들다고 말했다. 참사가 발생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민재 씨는 국가로부터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듣지 못했다. 왜 서울 한복판에서 158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희생됐어야 했는지, 왜 국가는 막을 수 있는 참사를 막지 못했는지, 왜 책임자들은 책임을 지지 않는지. 참사의 진상을 밝히겠다며 이뤄지는 경찰의 수사도, 국회의 국정조사도 이에 대한 답을 단 하나라도 제대로 내놓지 못할 것 같아 민재 씨는 "두렵다"고 했다.
지난 3일, 경기도 고양시 화정역 인근에서 만난 민재 씨는 1시간가량 진행된 인터뷰에서 '책임자 처벌'과 '이상민 장관 파면'을 반복해서 말했다. 마치 스스로 하는 다짐처럼, 언니에게 하는 약속처럼 되뇌었다. 언니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쏟아지는 눈물을 참지 못했던 민재 씨는 책임자 처벌을 얘기할 때만큼은 흘리던 눈물을 힘겹게 멈추고, 정면을 바라보며, 단호한 어조로 얘기했다.
"사랑하는 언니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인터뷰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바라는 건 단 하나예요. 우리 언니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던 이들, 책임자들이 처벌받을 수 있게 하는 겁니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부터 파면돼야 합니다. 그게 시작이에요. 실무진한테 책임을 떠넘기는 게 아니고, 보여주기식 수사가 아니고, 이상민 장관부터 파면돼야 합니다." 언니의 생사조차 알 수 없었던 그 시간, 국가는 제대로 설명조차 하지 않았다 "뉴스 보면서 사망자 수 늘어나는 것만 볼 수밖에, 참사 이튿날 오전 6시 넘어서야 언니 사망 소식 들어"
'말도 안 돼, 이건 꿈일 거야.'
10월 30일 0시 30분, 이태원에서 압사 사고로 사람이 죽었다는 뉴스 특보를 본 뒤 민재 씨는 언니와 함께 살고 있던 막냇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격증 시험 준비로 자정 넘어서야 집에 들어온 막냇동생은 언니가 이태원을 간다며 오후에 외출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시간까지 언니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민재 씨는 곧바로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절박한 마음으로 걸었던 수십 통의 전화는 끝내 언니에게 연결되지 않았다. 그리고 새벽 1시 민재 씨는 직접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다.
"경찰은 개인 정보로 인해 가족들에게 아무것도 알려줄 수가 없다고 했어요. 언니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언니 핸드폰이 이태원 어디에 있는지, 핸드폰 위치 정보가 이동되고 있는지조차 알려줄 수 없대요. 언니는 고양에 살고 있어서 일산경찰서로 (실종 신고가) 이관됐어요. 담당 경찰관에게도 여러 번 전화해서 살았는지 죽었는지만 알려달라고 했는데 '모니터링 중이니 가만히 있으라'고만 했습니다. 그 사람은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민재 씨가 언니의 죽음을 알게 된 건 참사 이튿날 새벽 6시가 넘어서였다. 용산경찰서에서 온 신원 확인 전화를 받게 되면서다. 언니의 생사조차 알 수 없던 그 끔찍한 6시간, 국가는 민재 씨 가족에게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았다. 민재 씨 가족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모니터링 중'이라는 무성의한 답변으로 일관하는 경찰에 계속 확인 전화를 하고, 애타는 마음으로 뉴스 화면만 바라보는 일이었다.
"(나중에 확인하니) 언니는 0시 23분에 사망 판정을 받았어요. 저희 가족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로 새벽 내내 뉴스에 사망자 수가 늘어나는 것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뉴스를 보면서 피가 말라가는데, 어디를 가야 하는지 몰랐고, 신원 확인이 돼서 연락이 오기만 기다렸어요. 그 연락을 받고 전북 전주에 살고 있던 부모님이 운전해서 올라온다길래 '지금 운전하면 큰일 난다, 저랑 동생이 먼저 가서 보고 있을 테니 KTX 타고 올라오라'고 했어요.
제가 살면서 가장 충격적인 게 언니 주검을 본 거예요. 너무 예쁜 사람이... 너무 착한 사람이 왜 이렇게 빨리 갔는지, 언니 몸이 너무 차갑고, 온몸에는 멍이 들어있었고, 등에는 피가 나 있었어요... 하루종일 정부 지침만 기다리다 앰뷸런스에 언니를 싣고, 엄마와 아빠, 동생과 제가 언니 몸에 손을 얹고 장례를 치르러 전주로 갔습니다. (전주까지 간) 그 2시간 30분이 믿어지지 않아요."
민재 씨 언니가 참사 당일 밤 마지막으로 보낸 카카오톡 메시지는 친구와 서로의 위치를 묻는 일상적인 내용이었다. 시간은 밤 10시 6분쯤. 민재 씨 언니가 심정지 상태로 국립중앙의료원에 도착한 시간은 밤 11시 49분쯤으로 추정된다. 그 1시간 43분이라는 시간은 국가가 언니를 구할 수 있던 시간이었다.
시민들이 아수라장이 된 이태원의 위험성을 신고했던 저녁 6시 이후부터 국가가 적극 대응했다면, 거리두기 해제 후 처음으로 맞는 핼러윈 데이에 수많은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했던 경찰과 지자체, 정부가 제대로 사전 대응을 세웠다면 참사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수많은 희생을 막을 수 있었던 그 순간을 다 놓쳐놓고도 지금껏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고 있다. 이런 현실은 유가족들에게 또 다른 고통으로 다가왔다.
"이건 살아도 사는 게 아니고,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요. 사는 게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언니가 보고 있을까 봐 힘내보려고 하는데 쉽지 않아요. 그래서 전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어요.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일이 왜 일어났는지, 올해에는 왜 경찰(경비 기동대)이 배치되지 않았는지, 왜 실무자에게만 책임 떠넘기기 중인지, 제 이야기로 달라지지 않을지언정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가족과 소통 최우선한다더니, 물거품 된 정부의 약속 애타는 유가족들이 직접 전화해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정부
참사 직후 정부는 "유가족과 소통을 최우선으로 하겠다"고 약속했다. 국무총리실 산하에 '원스톱 통합지원센터'를 설치해 유가족 등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이같은 정부의 약속은 대대적으로 보도됐지만 정작 유가족들은 체감할 수 없었다.
민재 씨는 언니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경찰에도, 지자체에도, 정부에도 먼저 연락했다.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정부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돌아온 답변은 '아직 계획 중이다',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이었다. 언니 죽음에 실낱같은 단서라도 확인하려면,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유가족을 만나려면 민재 씨가 직접 뛰어다녀야 했다. 그렇게 잔인한 싸움이 시작됐다.
"장례비나 생활지원금, 트라우마 치료에 대해서만 연락이 왔었고, 그 외에는 전혀 없었습니다. 제가 원스톱 통합지원센터에 연락해서 재난의료지원팀(DMAT) 활동 일지를 어떻게 조회할 수 있는지 물어보니, 오히려 'DMAT이 뭐냐'고 물어보더라고요. 본인들은 시스템도 없고 체계가 갖춰져 있지 않아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다른 유가족들의 연락처를 구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장례가 끝나자마자 담당 경찰관과 서울시 공무원, 각 기관에 전화해서 유가족 연락처를 어떻게 구할 수 있는지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유가족 연대(와 같은 단체)'가 있어야만 연락처를 알려줄 수 있다고 했어요. '연락처가 없는데 어떻게 연대를 만들 수 있느냐, 지인이 죽어야 연대를 만드냐'고 물어보니, 그건 자기들이 알려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민재 씨는 지인들에게 수소문하고 나서야 다른 유가족들과 연락이 닿을 수 있었다. 다른 유가족들도 언론 보도를 통해 하나둘 모여 소통할 수 있게 됐다. 민재 씨는 "각개전투로 찾아다녔다"고 말했다.
"저는 일개 시민입니다. 아무 힘이 없어요. 그런 제가 목소리를 내려면,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유가족들이 모여야 조금이나마 알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과연 이 참사에 대해 제대로 된 윗선까지 조사할 수 있을지 두렵습니다. 그렇지만 희생자들을 위해서 유가족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책임자 처벌이라, 그걸 위한 목소리를 낼 겁니다."
정부 대신 나선 곳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이었다. 5일을 기준으로 민변을 통해 모인 유가족들은 희생자 87명의 유가족들로 늘어났다. 유가족들이 처음으로 한데 모인 그날, 정부가 아닌 유가족들이 서로의 연락처를 수소문해서 알아내야 하는 현실에 대한 성토가 한목소리로 나왔다고 민재 씨는 전했다.
민재 씨를 비롯한 유가족들은 지난달 22일 직접 언론 앞에 나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를 향해 6가지의 요구사항을 직접 발표했다. 6가지 요구는 ▲진정한 사과 ▲성역 없는, 엄격한, 철저한 책임규명 ▲피해자들의 참여를 보장하는 진상 및 책임규명 ▲참사 피해자의 소통 보장, 인도적 조치 등 적극적인 지원 ▲희생자들에 대한 온전한 기억과 추모를 위한 적극적 조치 ▲2차 가해를 방지하기 위한 입장 표명과 구체적 대책의 마련 등이다.
유가족들의 직접적인 요구에 정부는 응답했을까. 민재 씨는 "전혀 없었다"고 단호히 말했다. 이번에도 민재 씨는 정부로부터 어떤 연락도 받지 못했다. 언론 보도가 나오고 나서야 정부의 지원 소식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도 기자회견 후 일주일이 훌쩍 지난 시점이었다.
"제가 어제(2일)도 원스톱 통합지원센터에 전화해서, '행안부가 유가족 협의체를 지원한다는 기사가 나왔던데 도대체 왜 유가족들은 아무런 연락을 못 받느냐'고 물어봤습니다. 센터는 행안부 지원 기구가 11월 30일에 출범했다면서 전화번호를 알려줬어요. 안내받은 번호로 전화했더니, 행안부는 '앞으로의 계획만 있지, 현재 아무런 지원 방안이 없다'고 했습니다. '출범한 지 3일째인데 도대체 뭐 했느냐'고 하니, 아무 말도 없었어요. 유가족들에게 연락하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오래 걸릴 일인가요? 저희는 (정부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가족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된 정부·여당의 태도 "이제 대통령 진중한 사과는 기대조차 안 해, 이상민 파면하라"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여당 인사들의 무성의한 태도는 유가족들에게 또 다른 깊은 상처를 남겼다. 민재 씨는 이 모습들을 잊을 수 없었다. "경찰이나 소방 인력이 미리 배치되었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는 아니었다"는 이상민 행안부 장관의 발언과 이상민 장관 책임론이 강하게 제기됐음에도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한 윤 대통령. 심지어 유가족들이 기자회견을 통해 성역 없는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바란다는 입장을 밝혔던 그날에도, 대통령실은 수사에 한정한 진상규명과 배·보상만을 강조했다.
지난달 21일 국민의힘과의 비공개 간담회에서는 유가족들의 절규에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거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딴청을 피우는 의원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후 나온 언론 보도는 '국민의힘이 유가족들을 만나 슬픔을 어루만져 줬다'는 내용이었다. 국민의힘 정진석 비대위원장은 유가족들 요구에 "그분들의 의견이 158명 희생자 유가족 전체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라고 폄훼했다.
국회에서 논의된 국정조사 일정은 유가족의 입장은 반영되지 않은 채 60일로 논의됐다가 최종적으로는 45일로 줄어들었다. 이마저도 내년도 예산안 처리 이후에야 본격적인 국정조사 일정을 시작할 수 있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유가족들의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면담 요청에 '민주당으로부터 일방적 통보를 받았다'며 불참했다. 유가족들은 5일 입장을 내고, 여당특위에도 면담 요청을 했지만 여당이 응하지 않은 것이라고 반박했다.
경찰 수사도 마찬가지다. 특별수사본부를 꾸렸지만, 말로만 성역 없는 수사를 약속할 뿐 여전히 '윗선'에 대한 수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수사 개시 한 달여만인 지난 2일에야 경찰 지휘부 중 처음으로 김광호 서울경찰청장이 입건됐다. 이상민 장관의 집무실은 압수수색 대상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민재 씨는 참사 후 지금까지 보여준 정부·여당의 태도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 모든 건 이태원 참사를 대하는 정부의 민낯이기 때문이다.
"제가 바라는 건 제대로 된 책임자 처벌, 단 하나입니다. 책임자분들, 보고받지 않았다고 하면 그 책임이 없어집니까? 책임자가 보고 체계를 갖추지 않은 것 자체가 제대로 일하지 않은 허수아비일 뿐이라는 의미인데, 그런 자들이 그 자리에 있는 게 정상입니까? 언제까지 대통령의 진중한 사과를 기다려야 합니까. 특수본 수사도 마냥 믿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이상민 장관부터 파면하고, 제대로 된 수사를 해야 합니다."
항상 가족 걱정하고, 자신보다 주변을 살뜰히 챙겼던 고인 매일 언니에게 "보고 싶다, 사랑한다"고 얘기하는 동생 시민들에게도 "잊지 말아달라" 호소
연말이 다가오면서 거리에는 행복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민재 씨는 "길거리에서 아무 슬픔 없이 하하 호호 웃는 사람들의 모습이, 저에겐 앞으로 돌아올 수 없는 먼 남의 일 같았다"고 말했다.
그날 이후 민재 씨 가족은 언니가 살았던 고양시 자취방에서 지내고 있다. 전주에서 살던 민재 씨 부모님은 '가족끼리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고양으로 올라오셨다. 평소 심장이 좋지 않았던 아버지는 맏딸을 떠나보낸 뒤 병세가 더 악화됐다. 참사 후 민재 씨 아버지는 "모든 만남이 손님이었구나, 자식마저 손님이었구나"라는 말을 혼잣말처럼 했다. 민재 씨는 아버지의 말을 전하며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가족들은 매일 고인인 은재 씨의 밥상도 함께 차린다. 민재 씨는 "언니, 맛있게 먹어"라고 인사한다. 남은 가족들이 힘들어할까, 민재 씨는 언니 얘기도 잘 꺼내지 않는다. 그러다 혼자 있게 될 때면 언니에게 "보고 싶다"고 말하며 마음놓고 운다. 민재 씨는 어디선가 언니가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걱정하지 말라"고, "언니 몫까지 가족들을 지키겠다"고, "사랑한다"고 계속 얘기하는 중이다.
고인인 은재 씨는 중학교 선생님이었다. 동생인 민재 씨에게도 그랬듯, 은재 씨는 학생들에게 의지할 수 있는 선생님이었다. 언니가 남긴 핸드폰에는 제자들과 나눈 메시지가 빼곡히 남아있었다. 고민을 털어놓는 학생들에게 늘 장문의 문자로 답장했고, 제자들이 준 편지는 빠짐없이 기록으로 남겨둔 선생님이었다. 참사 전날에도 은재 씨는 학생들에게 떡볶이를 사줄 정도로 친근한 선생님이었다. "선생님한테 모든 얘기를 다 했는데 이제 누구한테 말해야 하나요", "선생님 너무 보고 싶어요" 이제 은재 씨로부터 장문의 답장은 받을 수 없지만, 학생들은 여전히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을 메시지로 보내고 있었다.
민재 씨는 언니를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힘든 일이 있거나 걱정이 있는 사람에게 다른 일 제쳐두고 제일 먼저 달려갔던 사람이었다. 민재 씨와 나눈 마지막 통화도 민재 씨에 대한 걱정이 가득했다.
"언니는 저희 가족에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에요. 제가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이민재, 전화 받아. 안 받으면 지금 달려간다'면서 그렇게 항상 살뜰히 챙겼던 언니예요. 언니는 항상 저한테 '찾아온다'는 말을 많이 했었는데, 그때마다 저는 바쁘니까 나중에 오라고 미뤘어요. 마지막으로 통화할 때도 제 걱정을 많이 해줬는데, 그때 더 소중한 데에 시간을 쓸 걸, 일이 아니라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우리 가족에게 시간을 쓸 걸, 그게 너무 후회돼요. '언니가 우리 언니라서 너무 다행'이라고 했는데, 이제는 볼 수가 없어요. 언니를 만지고 싶고, 보고 싶고, 언니의 마지막 얘기라도 듣고 싶어요."
민재 씨는 유가족들이 원하는 책임자 처벌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힘이 필요하다며 "제발 잊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건의 사건·사고가 일어나지만 남의 일이라서 묻히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가족을 잃은) 슬픔은 유가족들이 평생을 감내해야 할 고통이에요. 그 슬픔은 유가족들이 감내할 테니, 책임자 처벌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도록 관심 부탁드립니다. 책임자 처벌만이 희생자들을 위해 유가족들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