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대선에서 윤석열 후보 공약을 분석한 시민사회는 의료민영화를 우려했다. 민중의소리도 이 같은 우려를 보도했다. 대놓고 ‘이 공약은 의료민영화다’라고 홍보하고 있진 않았지만, 의료민영화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공공성 확대라 볼 수 있는 공약은 찾기 힘들었다. 오히려 “공공병원 위탁 운영 확대”처럼 공공성 약화를 우려케 하는 공약이 분산돼 있었다. 또 윤 후보는 틈만 나면 “규제 혁파”를 외쳤다. 그리고 윤석열 정부 출범 후 6개월, 우려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의료민영화의 먹구름, 이대로 괜찮을까?
영리병원 논란이 한창이던 2009년,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이 내놓은 영리병원 도입에 관한 연구보고서 내용이다. 진흥원은 건강관리서비스 등 산업연계형 영리병원이 도입될 경우 해마다 이 같은 의료비 폭등이 나타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 개인병원 20%가 영리병원으로 전환할 경우 대규모 의료인력 이동이 발생하면서 300병상 이하 지역 중소병원 약 66~92개가 폐쇄될 것으로 봤다.
당시 보건의료단체연합은 “사립의료기관이 90%가 넘는 한국의 보건의료제도에 재앙적 영향을 끼칠 것”이라며 영리병원 도입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영리병원이 도입되면 의료질이 높아질 것이라는 일각의 주장도, 영리병원과 비영리병원 사망률을 비교한 여러 연구결과가 나오면서 설득력을 잃었다. 대부분의 연구에서 영리병원에서의 사망률이 비영리병원보다 높게 나타나면서, 의료질은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영리병원이 나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렇게 영리병원 도입 시도는 무산되는 듯했다.
그런데, 영영 무산된 줄 알았던 영리병원이 한국에 다시 발을 디디려는 움직임이 심상치 않게 나타나고 있다. 제주도 영리병원 논란에 이어 이번에는 강원도에 영리병원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원희룡 제주지사 시절 제주도에서 정무부지사로 지낸 여당 의원이 관련 법안을 발의하면서다. 10월 5일 박미숙 보건의료노조 부위원장은 국회 앞 기자회견에서 “죽었던 영리병원이 좀비처럼 강원도에서 되살아나고 있다”라고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무상의료운동본부 소속 회원들이 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강원도 영리병원 설립 법안 철회를 촉구하고 있다. 이들은 박정하 국민의힘 의원이 발의한 법안이 국회를 통과해 영리병원이 들어서기 시작하면 전국으로 확대될 것이며 결국 의료 공공성을 해칠 것이라고 주장했다. 2022.10.5. ⓒ뉴스1
우리나라에 영리병원 세울 수 있나?
영리병원은 말 그대로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병원이다. 외부 투자자가 병원 운영으로 생긴 수익금을 회수하려 하기에, 영리병원은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운영을 할 가능성이 높다.
현행 우리나라 의료법만 보면 영리병원 개설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당연히 우리나라에는 영리병원을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렇지 않다. 이미 외국인 투자자를 통해 국내 일부 지역에 영리병원을 세울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돼 있다. 실제 이를 근거로 제주도 등 일부 지역에서 영리병원을 세우기 위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찬진 변호사(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실행위원)는 7월 4일 ‘제주 녹지국제병원 문제 해결 방안 모색 토론회’에서 제주 영리병원 설립 근거가 된 법의 변천 과정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처음 영리병원 도입에 관한 법은 2002년 말 ‘경제특구법’이 개정되면서 생겼다. 다만, 처음에는 “외국인은 보건복지부 장관의 허가를 받아 경제자유구역에 ‘외국인 전용 의료기관’을 개설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외국인 전용’이라는 분명한 제한을 두는 법이었다. 내국인 진료만큼은 불허한 셈이다. 그런데 이 제한이 2005년 법 개정으로 슬그머니 풀린다. ‘외국인 전용’을 “외국인이 개설하는 의료기관”이란 뜻의 ‘외국의료기관’으로 단어만 슬쩍 수정한 개정 법률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면서다. 이로써 경제자유구역에 내국인 진료도 가능한 영리병원을 개설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는 원희룡 제주지사가 공론조사를 무시하고 개설을 허가하면서 논란이 된 녹지국제병원 사태의 발단이 됐다. 당시 제주지사였던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영리병원 개설을 허가해줬다가 탄핵여론 들끓자 허가를 취소했으나, 소송으로 번지면서 제주도를 혼란에 빠뜨렸다. 이런 상황에서 원희룡 지사는 지사직을 관두고 대권을 향했다.
2018년 12월 5일 원희룡 제주도지사가 제주도청 브리핑룸에서 국내 첫 영리병원인 녹지국제병원에 대한 조건부 개설 허가 방침을 밝히고 있다. 2018.12.05. ⓒ뉴스1
쌍둥이 법안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영리병원에 관한 찬반 입장을 분명히 밝히지 않아 논란이 됐다. 다른 후보들은 명확히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는데, 유독 원희룡 전 제주지사가 정책본부장으로 있는 윤 후보 캠프만은 모호한 입장을 취했다. 그래서 사실상 찬성하는 것 아니냐는 시각이 팽배했다. 당시 제주MBC는 윤 후보가 “법원의 판결 취지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며, 사실상 영리병원에 찬성한다는 입장이라고 보도했다.
그리고 정부 출범 4개월여 만에 윤석열 정부의 진심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는 법안이 여당 국회의원의 이름으로 발의됐다. 지난 9월 13일 발의된 ‘강원특별자치도 설치 등에 관한 특별법 일부개정법률안’이 그것이다. 해당 법안에는 도지사의 허가를 받으면 의사나 의료법인이 아닌 외국인도 강원도에서 외국의료기관을 설립·운영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또 이렇게 설립된 외국의료기관은 의료급여법에 따른 의료급여기관으로 보지 아니한다는 점도 명시됐다.
쉽게 말하면, 도지사의 허가를 받은 외국인은 강원도에 영리병원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논란의 법안을 발의한 여당 국회의원의 이름은 박정하(강원 원주시갑),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과 오랜 ‘깐부’ 사이다. 원희룡 장관이 제주도지사 재임 시절 정무부지사로 지낸 인물이기도 하다. 또 공교롭게도 박 의원의 소속 상임위원회는 국토부를 감시하는 국토교통위원회다.
박정하 의원은 지난 5월 14일 페이스북에 "오랜 깐부,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 임명을 축하합니다"라며 원 장관과 악수하는 사진을 올렸다. 그는 이날 페이스북에 "우리는 제주도에서 도지사와 부지사로 찰떡호흡을 맞췄다"라며 "국토부 원희룡-원주 박정하 핫라인으로 원주의 원대한 꿈을 완성하겠다"라고 썼다. ⓒ박정하 의원 페이스북
이에, 일각에서는 제주도 영리병원 도입 논란에 이은 강원도 영리병원 논란은 단순히 박 의원 개인의 일탈로 보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재헌 무상의료운동본부 사무국장은 보궐인데다 초선인 박 의원이 두 번째로 낸 법안이라는 점을 짚으며 “외국의료기관 설립에 관한 내용뿐만 아니라 민간기업 유치 및 산업단지 조성 근거 마련, 국제학교 설립·운영 근거 마련 등 강원도를 신자유주의적으로 시장화하는 게 다 포함돼 있다. 개인이 하는 게 절대 아니라고 본다”라고 말했다.
우려되는 지점은 제주도 영리병원의 포문을 열었던 입법안과 판박이라는 점이다.
원희룡 제주도지사 시절 국내 1호 영리병원으로 제주도를 혼란에 빠뜨린 녹지국제병원도 같은 배경에서 도입이 시도됐다. 현행 제주특별법 제307조와 박 의원의 법안 제11조의3의 원문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의료법 제33조 제2항에도 불구하고 외국인(‘외국인투자 촉진법’ 제2조 제1항 제1호에 따른 외국인을 말한다)이 설립한 법인은 도지사의 허가를 받아 제주자치도에 의료기관(이하 ‘외국의료기관’이라 한다)을 개설할 수 있다. 이 경우 외국의료기관의 종류를 ‘의료법’ 제3조 제2항 제3호에 따른 병원·치과병원·요양병원·종합병원으로 한다.” - 제주특별법 제307조
“의료법 제33조 제2항에도 불구하고 외국인(‘외국인투자 촉진법’ 제2조 제1항 제1호에 따른 외국인을 말한다)이 설립한 법인은 도지사의 허가를 받아 강원자치도에 의료기관(이하 ‘외국의료기관’이라 한다)을 개설할 수 있다. 이 경우 외국의료기관의 종류는 ‘의료법’ 제3조 제2항 제3호에 따른 병원·치과병원·요양병원·종합병원으로 한다.” - 박정하 의원 법안 제11조의3
두 법안을 비교하면 사실상 ‘제주자치도’가 ‘강원자치도’로 바뀐 것 외에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다.
박정하 등 11명의 국민의힘 의원은 2022년 9월 13일 영리병원 논란의 ‘강원특별자치도 설치 등에 관한 특별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민중의소리
정말 오해일까?
박정하 의원은 “오해”라고 말한다.
지난 10월 16일 원주문화의거리에서 원주YMCA와 원주인권네트워크가 주최하는 ‘차별은 멀리 평등은 가까이’ 행사에서 박 의원은 “강원특별자치도법에 제가 영리병원을 포함시켰다는 오해가 있는 듯하다”라며 “제도를 만들 때는 폭넓게 오랜 기간 생각하고 만들어야 혹여나 중간에라도 뭔가 상황이 오게 되면 적응할 수 있기에 그런 조항이 포함됐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염려하는 그런 종류의 병원은 전혀 올 수 없을 것”이라며 “보수정권에 속해 있는 제가 그 법안을 발의했다고 해서, 너무 차별하지 마시고, 열린 마음으로 같이 생각하고 저에게 말해 달라”라고 했다.
박 의원의 말을 요약하자면, 여러 상황을 고려하여 폭넓게 만들다 보니 시민사회가 우려하는 조항을 넣었고 그렇다고 해서 우려하는 영리병원이 강원도에 개설될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원희룡 장관도 제주지사 시절 비슷한 말을 했다. 원 지사는 2015년 12월 18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국내법인의 영리병원은 국내법상 금지돼 있으니 국내 병원이 외국인투자병원을 이용해서 국내에서 영리병원을 한다거나 하는 부분만 심사과정에서 걸러내면 된다”며 영리병원 설립을 승인해도 문제 될 게 없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리고 압도적인 제주도민들의 반대 여론을 무시하고 2018년 ‘내국인 진료 제한’ 조건을 걸고 설립을 허가했다.
그의 결정은 의료민영화의 불씨를 당겼다. 병원 측이 제주도가 녹지병원 개설 허가 조건으로 내건 ‘내국인 진료 제한’은 위법하다며 소송을 걸었고, 1심 법원이 병원 측 손을 들어준 것이다. 또 대법원은 뒤늦게 제주도가 영리병원 개설 허가를 취소한 것에 대해 부당하다며 병원 측 손을 들어줬다. 소송으로 제주도민의 막대한 혈세가 낭비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리병원의 포문을 열어주고 있는 것이다.
이서영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기획팀장은 “지금도 소송이 진행 중인 녹지국제병원의 사례를 본받아야 한다”라며 “박정하 의원 개정안은 어떤 영리자본이 의지만 가진다면 법과 제도의 허점을 파고들어 어떻게든 내국인 진료가 가능한 영리병원을 만들고자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싸워볼 여지를 마련해 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제주도는 첫 영리병원인 녹지국제병원 개원 허가를 2018년 12월 5일 오후 발표했다. 이날 오전 제주 서귀포시 헬스케어타운 내 녹지국제병원의 모습. 2018.12.05. ⓒ뉴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