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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배 협동의 경제학] 40대와 50대, 진보로 멋지게 늙어간다는 것

내 나이가 한 살 줄었다. 지금까지 나는 52세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생일이 돌아오는 내년 2월까지 나는 51세가 돼버렸다. 해가 바뀌어도 나이가 늘어나는 게 아니라 줄어드는 기적이라니. 산적한 현안을 두고 이런 일(내년부터 만 나이 적용)이나 추진하는 현 정권이 한심하긴 하지만, 어찌됐건 내 나이는 이렇게 공식적으로 줄어들었다.

나는 20대 때 운동을 처음 접하면서 진보적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껏 진보에 대한 확신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런데 당시 함께 운동을 했던 동료들 중 상당수는 지금 보수화됐다. 물론 그들이 대놓고 국민의힘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20대 청춘 때 품었던 사회 변혁의 꿈을 내려놓은 것이 현실이다. 매우 슬픈 일이다.

반면 기쁜 소식(!)도 있다. 청년 시절에는 별로 진보적이지 않았던 친구들 중 상당수가 40대를 넘어서면서 되레 더 진보적으로 변한 것이다. 그 중 한 친구는 메신저를 통해 매우 자주 나에게 각종 뉴스를 전달하며 윤석열 정권에 대한 분노로 밤을 지새운다. 가끔 그 친구를 보면서 ‘이쯤 되면 나보다 더 진보적인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30년 우정에 이념적 동질성이 더해져 나는 요즘 그 친구와 매우 가깝게 지낸다.

가난해질수록 보수적이 된다

어떤 사람이 진보가 되고 어떤 사람이 보수가 될까? 이 질문에 대해 제도경제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 Veblen)은 꽤 명쾌한 해석을 내린 적이 있다. 가난할수록 보수적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난한 민중일수록 먹고 사는 일에 에너지를 너무 많이 쏟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존하는 일에 에너지의 대부분을 쏟아 붓다 보면 “세상을 바꿔야한다”는 복잡하고 어려운 생각을 하기 어렵다.

그리고 가난할수록 살아남으려면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함정도 있다. 가난한 민중들은 먹고 살기 위해 태어나서 복종하는 법부터 배운다. 스스로 뭔가를 결정하는 능력인 자주성도 희석된다. 시키는 대로 해야 살아남으니까.

사실 인간이 변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매우 지난한 것이다. 뇌가 실로 많은 노력과 상상을 해야 가능하다. 용기도 필요하고 지혜도 필요하다. 그런데 먹고살기 바쁜 사람들은 이런 어려운 일에 뇌를 쓸 여유가 없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요즘 20대의 보수화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이건 정말 우리 기성세대가 많이 반성을 해야 한다. 왜 젊은이들이 꿈을 가지고 변화를 꿈꾸며 더 나은 세상을 추구하지 않을까?

그들의 뇌가 그런 일을 고민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먹고살기 바빠 죽을 것 같은 환경에 처하면 뇌는 복종을 선택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복종은 살아남기 위한 가장 간단한 방법이다.

인간은 습관의 동물이다

다른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보자. ‘체감표지 가설’ 혹은 ‘신체표지 가설’이라는 이론이 있다. 세계적인 뇌 과학자인 안토니오 다마지오(Antonio Damasio) 아이오와 대학교 교수의 주장이다.

이 이론의 요지는 인간은 뇌에 표식을 남겨놓고 그것을 즐겨찾기 하듯 꺼내 쓴다는 것이다. 인터넷을 할 때 즐겨찾기 설정해 놓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사람이 어떤 판단을 할 때 뇌는 당연히 에너지를 사용한다. 김치찌개를 먹을까, 된장찌개를 먹을까? 이 고민이 쉬운 게 아니다. 뇌는 나름대로 김치찌개를 먹었을 때 만족과 된장찌개를 먹었을 때 만족을 열심히 비교한다. 과거의 경험, 지금의 입맛, 다이어트 여부, 별의별 것들을 다 판단해야 한다. 이게 뇌 입장에서 얼마나 힘든 일이겠나?

그런데 사람의 뇌는 다른 육체 기능과 마찬가지로 쓸 수 있는 에너지가 한정돼 있다. 공부만 계속 하면 뇌가 지치는 것이 그런 이유다. 그래서 판단을 해야 할 상황이 왔을 때 뇌가 매번 능력을 총동원해 일일이 판단을 하면 너무 많은 에너지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이럴 때 유용한 것이 뇌의 즐겨찾기 기능이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냄비에서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난다. 무지하게 뜨거울 것이 확실하므로 이런 건 절대 손으로 건드리면 안 된다. 그런데 만약 난생 처음으로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냄비를 봤다고 하자.

이때 뇌는 능력을 총동원해 ‘저걸 만져도 되는 것인가?’를 판단한다. ‘수증기가 난다는 것은 물이 끓었다는 이야기이고, 끓었으면 당연히 뜨겁겠다. 만지면 데이겠네?’ 이 판단을 내린 끝에 그 냄비를 안 만지는 것이다.

그런데 냄비에서 수증기가 나올 때마다 이 판단을 매번 다시 다 한다고 생각해보라. 얼마나 피곤하겠나? 그래서 뇌는 ‘수증기 = 뜨겁다’라는 공식을 머리에 만들고, 즐겨찾기 기능을 이용해 뇌에 표시를 새겨놓는다. 앞으로 수증기를 보면 ‘복잡하게 생각 말고 무조건 피해라!’는 공식을 사용하도록 한 것이다.

12일 서울 중구 숭례문 앞 세종대로에서 열린 이태원 참사, 국가 책임이다. 책임자를 처벌하라' 시민추모촛불에서 참가자들이 비가 오는 가운데 촛불을 밝히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2.11.12 ⓒ민중의소리

용기에 드라이아이스를 넣고 페이크로 연기를 피우면 사람들이 속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래는 뇌가 ‘저게 드라이아이스일까? 끓어오른 수증기일까?’라고 생각을 해야 하는데 즐겨찾기 기능 탓에 이런 복잡한 과정을 생략한 채 ‘연기다! 당장 피해!’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을 ‘습관의 동물’이라고 부른다. 한 번 즐겨찾기로 각인된 것들은 이변이 없는 한 계속 우리의 행동을 지배한다. 문제는 가난한 민중들일수록 이 즐겨찾기 기능을 더 자주 사용한다는 데 있다. 먹고 사는 일에 집중을 하다 보니 에너지 소모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런 경우 뇌는 에너지를 최대한 절약하려 하게 된다. 변화를 거부하며 과거에 살았던 대로 복종하고 사는 이유다.

나이가 들수록 보수화가 되는 이유도 비슷하다. 나이가 들면 즐겨찾기 기능이 너무 많이 저장돼 있다. 그래서 뇌가 새로운 창조적 생각을 하기 어렵다. 대충 해오던 대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그래서 요즘 40대 50대 장년의 시민들이 민주적이고 진보적 삶을 사는 것을 정말 대단하다고 여긴다. 이들 중 몇몇은 나에게 “내가 마흔 넘어서 진보에 눈을 떴는데, 젊었을 때 세상에 관심 없이 살아서 참 미안하다”는 말을 한다. 정말 천만의 말씀이다. 20대 청춘 때 진보적으로 사는 것보다 나이 마흔 넘어서 진보가 되는 것이 장담하는데 훨~씬 어렵다.

생계 때문에 가장 고민이 많고 허덕일 때가 40대다. 뇌가 가장 피곤할 때인데다가 지금까지 즐겨찾기 해놓은 것도 무지 많다. 그런데 이 시기에 ‘세상이 변해야 한다’는 진심을 가졌다면 이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그 놀라운 일들을 해 낸 것이다. 그래서 늦은 나이에 진보의 신념을 가진 분들에게 진심으로 말씀드리는데, 여러분들은 정녕 스스로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셔도 된다.

40대와 50대가 진보라니. 10여 년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일이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다. 비록 나이가 한 살 줄었지만(응?) 엄연히 50대의 일원인 나는 이 진보적인 장년 세대가 진심으로 자랑스럽다. 우리는 이렇게 멋지게 늙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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