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지학의 세상다양] 함께 사는 방법을 잊은 시대로, 퇴행하는 교육정책

소그룹의 참여형 교육이 가능했던 학교

구로의 한 중학교는 학생의 40%가 이주배경을 가지고 있다. 덕분에 이 학교는 이주민과 선주민이 함께 잘 배우며 즐기며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데 관심이 많다. 편견과 차별에 반대하고 평등한 문화를 만들어 가는 문화다양성 역량을 가진 세계시민으로 학생들을 성장시키고자 노력하는 다문화교육 중점학교이기도 하다.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구성원이 가시화되지 않는 학교에선 인종차별, 성차별, 성소수자차별, 장애차별, 나이차별, 외모차별, 학력/학벌/소득/경제력에 의한 차별 등과 같은 이야기를 90분씩 8회기 진행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이 학교에서는 1년 동안 1학년 전체 인원의 70%와 함께 다양성훈련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소그룹으로 모든 수업을 게임, 활동, 대화를 중심으로 하는 참여형으로 진행한 결과 다양성훈련효과측정에서 유의미한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다른 학년들과 달리 장기적으로 어떤 변화를 보여줄 수 있을지 기대되는 부분이다.

경계 존중 활동을 하는 모습 ⓒ필자 제공

짧고도 길었던 이 학교와의 만남을 마무리하는 시기가 되었고, 마지막 수업을 남겨두고 있는 시점에 이 학교가 매우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게 되었다. 교육부는 전국에서 교사 정원을 3,000명 줄이기로 결정했고 서울시에서만 교사 435명을 감축하라는 지시만 '숫자'로 전달되었다고 한다. 이주배경 학생이 많고 주변 동네에 학군이 좋은 마을들이 있다 보니, 이 학교는 교사당 학생 수가 적은편이다. 그래서 이 학교가 3명이나 감축해야하는 상황에 놓였다. 다문화교육 중점학교이기 때문에 진행하는 사업들도 있고 중도입국 학생들을 포함해서 이주배경을 가진 학생들을 위한 지원이 많이 필요하다. 교사당 학생 수로만 논의될 수 없는 맥락들이 있지만, 숫자만 존재하는 정책결정에는 이 모든 것은 쉽게 지워졌다.

교육 없고 숫자만 있는 교육정책

학령인구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교사 정원을 줄인다고 한다. 그런데 'OECD 교육지표 2021'에 따르면 국내 초등학교, 중학교 학급당 학생 수는 초등학교 23명대, 중학교 26명대로 여전히 OECD 평균보다 많다. 학급당 20명이 넘는 학급의 수는 16만 6509개로 전체의 76.7%, 26명 이상인 과밀학급은 8만 6792개로 전체의 40%에 해당한다. 학급당 학생 수는 여전히 상대적으로 많음에도, 학생 수가 줄고 있기 때문에 교원을 감축한다는 것은 정말 '어쩔 수 없는 판단'일까?

학생 수가 감소하고 있는 것만 볼 것이 아니라 교사 한 명당 함께 해야 하는 학생 수인 학급당 학생 수를 고려해야 한다. 코로나 이후의 세상(혹은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세상), 그리고 기후위기에 대처하고 적응해야 하는 시대에 어디에 가치를 둔 어떤 교육을 할 것인가 고민하여 그에 맞는 교실을 만들어야 한다. 그저 지금처럼 입시중심의 암기위주의 교육을 지속한다고 생각하니 학생 수가 줄면 그만큼 교사 수도 줄여도 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코로나 시기에 분반 수업이 진행됐다. 한 반을 둘로 나눠서 12~13명씩 등교하게 한 것이다. 감염병 전파를 예방하기 위해 '거리두기'가 가능해야 했기 때문이다. 소수 인원수의 고액 사립학교는 코로나 시기에도 계속 등교를 했다. 오랜 시간동안 등교를 하지 않았던 학교들의 학생들과 비교했을 때 교육 격차가 발생했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코로나19가 해결되더라도 또 다른 전염병이 올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감염병의 시대, 엔데믹의 시대에 살고 있다. 최소한 전염병 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교실만 생각하더라도 이 숫자만 남은 정책은 잘못됐다.

성장을 불가능하게 하는 대규모 집단 교육

나는 대학 학부와 대학원에 출강을 한 적이 있었다. 대학원은 15명이 한 반이었지만, 학부생 강의는 한 번에 100명을 만났다. 심지어 하루에 세 반을 했다. 대학원에서는 참여형 수업인 다양성훈련을 진행할 수 있었고, 모든 학생들의 이름과 상황을 알았으며, 그들이 성장하는 과정을 목격할 수 있었다. 100명이 듣는 대형강의에서는 단 한 명과도 그런 관계를 맺을 수는 없었다. 대형강의는 숫자논리에 따라 가장 효율적이고 돈이 되는 교육시스템이지만, 교육의 효과성은 떨어진다. 인원이 많아지면 소통이 어려워지고, 소통보다는 통제가 중요해지며, 참여형 교육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일방향의 수업이 이뤄지기 쉽다. 이는 교육의 효과가 크게 떨어지게 만든다. 소위 "영재학교"라고 불리는 학교들에서는 소규모 교육을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대규모 교육은 스스로 주도하는 적극적 사고의 가능성을 원천 차단할 수 있어 위험하다.

교사 수는 늘려야 한다. 한 교사 당 담당하는 학생 수는 줄어야 한다. 한 학생이 다가가서 이야기 나누고 관계맺을 수 있는 교사의 수는 많아야 한다. 상상해 보자. 한 학급당 학생 수가 15-20명 정도에 담임선생님이 두 명인 교실, 그리고 학교에 상담선생님, 보건선생님, 사회복지사 선생님과 같은 선생님들도 충분히 많아서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선생님께 자유롭게 찾아가서 언제든지 이야기 나눌 수 있는 학교를 상상해 보자.

활동 후 모든 구성원의 얼굴이 보이는 큰 원으로 둘러앉아 대화하는 모습 ⓒ필자 제공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교육

이주민이 많은 학교에서는 꼭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이주민에게 잘해주려다 보니 선주민 학생들에게 소홀해 진다는 우려다. 마찬가지로 장애-비장애 통합교육을 하는 학교에서도 장애인에 대한 관심이 비장애인 학생들이 더 많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한한다는 걱정이 많다. "이주민 VS 선주민"이 아니다. 학생 수가 너무 많다. 모든 학생이 필요한 관심과 지원을 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장애인 VS 비장애"이 아니다. 우리는 경쟁이 너무 심한 사회에 살고 있다. 모두가 함께 평등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통합교육이 필요하다. 통합교육이 가장 좋은 교육이다. 아무리 이주민과 장애인은 존중해야 한다는 교육을 백날 들어봐야 소용없다. 함께 평등한 동료 시민으로 즐기며 웃고 떠들고 함께 협력하며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아야 한다. 그게 교육이다.

이젠 글과 영상 등의 미디어를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고 스스로 사고하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말하고 쓸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남이 알려주는 것을 암기해서 그대로 토해내는 것으로 평가받는 시대는 이미 종언을 고하고 있다. 질문하고 대화하는 교육이 되려면 교사 한 명당 소수의 학생을 만나야 한다. 그러나 지금 정부는 이 흐름을 최대한 막아보려는 발악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2024년부터 적용될 2022교육개정안에는 자기 자신을 탐구하고 타인과 평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하고 사회를 구조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인권교육, 노동교육, 성평등교육은 사라졌다. 대통령은 교육의 목표가 반도체 역군을 만드는데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교원을 감축하고, 학급 밀도를 높이려고 하고 있다. 이 방향성은 결코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교육과는 거리가 멀다. 교육을 숫자로만 바라보고 철학 없이 퇴행하며 그들이 그토록 원하는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창의적 인재'를 만드는 교육과도 매우 멀어지고 있다. 무능한 자들의 오만과 독선으로 결정된 어느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은 교육방향이다. 승자독식,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잊은 고립된 개인들의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악화될지도 모르겠다. 국가가 제 역할을 하기를 포기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함께 살기 위한 교육'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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