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우리 시대 기억과 공간] 공간, 죽음과 생환이 교차되는 현장

지난해 10월 30일 아침, 전날 저녁 이태원 할로윈 축제로 모인 인파로 150여 명이 유명을 달리했다는 뉴스를 접하고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2020년 대에 인파를 통제 못해 압사했다니 좀처럼 믿기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사실이고 사실이 아닌지 여러 뉴스를 살펴봤으나, 압사란 사실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사회는 한동안 절망적인 분위기에 사로잡혔습니다. 바로 희생자 분향소가 차려지고 대통령을 비롯하여 정부 주요인사가 분향을 했지만, 무언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직감 때문이 아니라,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일들 때문이었습니다.

국화꽃만 가득 놓인 분향소는 누구를 위한 곳인가요? 희생자의 이름도 사진도 없는 곳에서 누구를 애도하고 누구를 기억하고 회상하며 함께 울어야 하는 것일까요? 유족들은 여전히 가족·자녀가 어디에 안치됐는지 어느 병원으로 향했는지 헤매며 찾고 있는데, 합동분향소만 재빨리 차려진 모습은 참사 뒤처리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는 걸 보여줬습니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31일 오전 서울시청앞에 마련된 이태원사고 사망자 합동 분향소를 찾아 헌화를 마치고 이동하고 있다. 2022.10.31 ⓒ민중의소리

“초등학생은 소풍을 가고......우리 어른들은 단풍놀이를 가고 모두 다 갈 자유가 있습니다…(중략)…뒤를 생각하고 말을 하셔야 합니다”
 “사과하고 진상 규명을 해주세요. 공간을 마련해 울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주세요.”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이지한 씨 어머니 조미은 씨 인터뷰, 2022.11.22.KBS 뉴스9)

참사가 있고 3주 후, 한 희생자 어머니의 인터뷰가 등 뒤로 날아와 비수처럼 꽂혔습니다. 너무나도 적확한 말이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그외의 무엇을 더 보태고 뺄 수가 있겠습니까? 

지난한 책임 공방 끝에 현장에서 컨트롤타워 역할을 한 용산소방서장, 용산경찰서장이 구속됐습니다. 그럼에도 국민의 안전과 재난에 관한 정책 수립·총괄·조정(정부조직법 제34조) 등, 사회 안전 사무를 총괄하는 행정안전부 장관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서울 한복판 인파 운집을 예상했으면서도 왜 수백명에 달하는 희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는 사고가 발생했는지, 참사를 막지 못한 정확한 사유는 무엇인지 원인규명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어렵사리 국회에서 이태원참사 국정조사특위가 열렸지만, 정부와 여당은 참사 원인을 밝힐 의지, 책임자 처벌을 할 의지도 없는 모습만을 보여줍니다. 이 때문에 유족과 많은 국민은 이번 참사를 더 비통해 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한 존재의 끝이기도 하지만, 남은 존재가 받아들여야 하는 부재의 큰 아픔·슬픔·고통·비애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도대체 언제쯤이면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혐오와 조롱, 비난을 멈추고, 제대로 된 위로와 애도, 충분한 추모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요.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지만,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 이것이야말로 예로부터 내려오는 한국의 전통적 공동체 정신이지 않습니까. 정치적 이념, 지지정당 등 여러 이유들을 내려놓고 살펴보면, 우리 옆의 평범한 한 사람 혹은 가족이 죽어 슬퍼하는 이웃만 남습니다.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우리 이웃들의 안부를 묻고 서로에게 마음을 씁시다. 슬픈 이웃을 위로하고, 슬픔을 나누는 공감의 언어가 절실한 때 입니다.

그 과정에서 희생자들을 떠나보낼 준비도 해야겠지요.  그 이후엔 떠난 이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며 그릴 수 있는, 한편으론 이런 해괴한 참사가 재발하지 않게 경고하는 기억공간 조성 논의를 해야 합니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 추모와 기억 사이, 삶과 죽음 사이, 공간과 마음 사이를 잇는 결과물이 나오게 머리를 맞대로 논의해야 합니다. 국가와 유족 사이, 장소와 희생자 사이, 더 나아가 일상과 참사 사이를 잇는 공간이 만들어져야 할 것 입니다. 

위 왼쪽 ‘성수대교 붕괴참사 희생자 위령비’, 오른쪽 ‘삼풍백화점 붕괴참사 희생자 위령탑’, 아래 대구지하철 화재참사의 기억공간 모습 ⓒ김명식

이태원 참사를 지켜 본 많은 국민들의 머리속엔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씨랜드 화재, 대구 지하철 화재, 우면산 산사태, 세월호 사고 등 수많은 참사들이 스쳐갔을 것입니다. 이 같은 참사 희생자들을 기억하기 위해 세워진 조형물과 공간들을 되짚어 봅니다. 

차도로 고립돼 찾기도 접근하기도 어려운 성수대교 붕괴참사 희생자 위령비, 매헌 시민의숲에 조성된 여러 개의 위령비 중 제일 가장자리에 위치한 삼풍백화점 붕괴 희생자 위령비, 상상하기 힘든 끔찍한 화재현장의 한 단편만을 보여주는 사물들과 추모벽의 대구지하철 화재참사 기억공간. 이것들엔 참사의 원인, 책임자의 과오는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수치화 된 희생자들의 흔적만 남아,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진 채 현재에 어떤 교훈도 던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우면산 산사태를 기억하는 ‘일상의 추념’ 같은 공간은 진흙 속 진주처럼 좀 다릅니다. 아마도 이 공간이 조성되기까지 서울시, 유족, 전문가 등이 여러 차례 협의를 거쳐 완성했기 때문인 듯합니다. 건축이라는 예술의 수단을 통해 나온 추상의 형태는, 산사태와 희생자를 기억하는 것을 넘어 참사의 실재에 접근하도록 하며 그 너머 무언가 사유를 유발하도록 이끕니다.

사실 추모비나 위령비, 기념비나 기억공간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희생자를 추모하며 그 영혼을 위로하고 기억하는 것을 넘어, 국가와 지자체 또는 관련 공직자들에게 보내는 알림과 경고로 기능하는 것까지 복합적인 목적을 지닙니다. 그래야 보는 이들이 자신과 그들의 아이, 부모, 이웃이 똑같은 참상을 겪지 않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것들을 만들 때 경계해야 합니다. 권력자들이 해당 사안에 대한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관철하기 위해, 관련자들과 국민들을 달래듯 기념비를 세우고 기억 공간을 조성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알라이다 아스만 저, [기억의 공간] 인용) 이런 행위는 동 시대에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실재 너머의 함의를 담거나 다음 세대를 위한 경계로 작용할 수 없습니다. 

어떠한 기억공간이든 재현을 위해 사용되는 수단은 실재가 결여된 형태를 띨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 내재한 질서는 실재와 다르게 재구성되어 확립된 것입니다. 비극적 결말의 참사는 동일성을 띤 형태로 재현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것은 생존자에 의해서나, 남은 잔해에 의해 증언될 수는 없습니다. 재현은 오직 생환하지 못한 이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결코 온전히 기록될 수도, 기억될 수도 없는 재현 불가능성을 띠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태원 참사의 실재의 재현은 할로윈 축제 당시 인파의 압력에 숨이 막혀 생환하지 못한 이들에 의한 것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사망했기 때문에 온전한 증언도 고발도, 동일성의 재현도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재난을 온전히 증언·재현할 수 없는데 부단히 기록하고 기억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왜 몸과 마음의 에너지와 감정을 쏟아 붇고 공간과 돈을 들여 조성하려고 하는 걸까요? 그래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고 그것은 무엇인가요? 무엇을 드러내어 보여주고 기억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런 물음에 답해야만 이태원 참사를 위한 기억공간 조성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물음의 답이 우리 시대 도시 속 재난, 사회적 참사를 증언·재현해 기억하는 정당성을 확보해 주고, 그 방식은 어떠해야 하는지도 구체적으로 보여주게 되겠습니다.

국내외 비극적 참상의 재현적 기억공간은 부정성을 기초로 복합적인 의미를 구현하기 위해 예술을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생환자의 증언과 기록에 의한 실재의 단편적 기억만 남지 않도록 노력해왔습니다. 예컨데 독일 나치들이 저지른 홀로코스트의 참상은 예술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유럽 전역에 산재한 기념비적인 공간들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정치적인 책무의 영역이 예술의 영역에 빚을 진 샘입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예술만이 가진 힘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부정성, 추함, 패륜, 극악무도함 등을 드러내는 예술의 탈심미화와 새롭게 재구성·창조해 낸 질서의 형태는 부정적 현실에 저항할 수 있는 적절한 수단입니다. 한편으론 참상의 실재에 다가갈 수 있는 방식이 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여기에 대한 논란과 논쟁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아름다움을 다루는 예술이, 아름답지 않음을 어떻게 아름다운 형태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피터 아이젠만이 ‘유럽의 학살된 유대인을 위한 기념비’를 설계할 때 했던 말이 이를 잘 드러냅니다. "미화가 어떠한 방식이로든 아름다움의 형태를 통해서 평범함을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면, 인간성을 파괴한 그들의 범죄를 미화하는 것이 가능한가. 동일한 맥락에서, 어떻게 이 범죄의 극악무도함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는가" (Peter Eisenman, Holocaust Memorial Berlin 인용)

예술의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역할과 목적을 비껴, 현대예술은 추상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미화의 영역과 그 경계를 넘어 예술이 가진 힘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지요. 특히 “현대예술의 추상적 형태언어”, 곧 “추상적 시각예술은 표현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불가능할 것 같은 문명의 파괴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자 모색하는 데 있어 이를 능가할 만한 매개체가 없습니다" (Karyn Ball, Disciplining the Holocaust 중에서). 하버마스의 이 말은 여전히 유효하고 실용적이기까지 합니다.

참상의 실재와 간극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재현적 공간은 예술적 개입을 통해 동일하게 재현할 수 없는 곳에서 비유사성을 통해 실재에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합니다. 심지어 재현적이지 않은 접근방식을 통해 실재에 더욱 다가갈 수도 있게 합니다. 예술이 가진 힘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특히 추상예술이 드러내는 형상은 현실을 대상 또는 배경으로 삼지만, 이들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며 때로는 전혀 다른 것을 창조해냅니다.

존재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구성된 이 형상은 어떠한 주체에 의해 소위 권력을 쥔 정치세력의 강제, 강압 또는 폭압에 의하지 않고 실재와 재현 사이의 간극에서 특수성과 독창성을 만들어냅니다. 이러한 예술작품은 엄연한 현실을 인정하고 인식하게 하는 결과를 낳게 하는 것이지요. 나아가 참상과 실상을 넘어 사유의 세계를 창조하고 확장하도록 추동하는 독창적이고 독보적인 주체가 되기도 합니다.

결국 우리가 종국에 만나게 될 기억공간은 사회적 재난과 참사의 실재를 예술의 형상을 통해 가늠하고, 당시의 참상에 다가가고, 돌아오지 못한 이를 기억하여 추모하고, 이를 일상화하여 권력을 쥔 정치세력에 경고하는 것을 넘어, 더 나은 삶의 세계에 관한 사유의 영역으로 안내하는 곳일 겁니다. 시각적 상징이 우리 사회에 반향을 일으키는 것이지요.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왜 기억공간에 집착하고 기억공간을 조성하려는지 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인 것입니다.

위 왼쪽부터 ‘일상의 추념’, ‘하늘광장’, ‘100년 인물문’, 아래 왼쪽부터 ‘분서 기념 도서관’ , ‘기억의 빈 공간’과 ‘낙엽’, ‘유럽의 학살된 유대인을 위한 기념비’ ⓒ김명식, Stefan Kemmerling, Manuel Liniger, Alexander Blum

이상적인 이론에 기초해 우리시대 가장 알맞은 기억공간은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해봅니다. 추모 기일 연중 한 번의 의식으로 끝나는 의식적 제례의 공간은 적합하지 않습니다다. 그것은 하나의 위패나 표석, 비석이 놓인 유족 중심 공간을 넘어서서, 일상에서 마주하고 가까이서 기억할 수 있는 일상의 공간이어야 할 것입니다.

예술의 힘을 빌려 일상의 공간에서 제공되는 좋은 기억공간들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국에선 ‘일상의 추념’, ‘하늘공간’(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안국역’(독립운동 테마역), 독일에선 베벨광장의 ‘분서 기억 도서관’, ‘기억의 빈 공간’(베를린 유대인박물관), ‘유럽의 학살된 유대인을 위한 기념비’ 정도가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특유의 질서가 내재된 형태를 띠고 있으며 일상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시민들이 점유 및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며, 관광객의 공간이자 여행자의 공간들입니다.

이렇게 일상적 공간의 성격과 재현적 공간감을 동시에 가진 곳들은 '문명의 묘지'는 아닙니다. 그보다는 '문명의 교훈이 담긴 공간'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공간들은 허울뿐인 명분의 기억공간일 것이고, 한국 사람들이 그리 싫어하는 혐오시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꺼리는 기피시설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1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국회 용산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국정조사특별위원회 제9차 전체회의에서 국민의힘 위원들이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등이 이태원 참사에 책임이 있다는 보고서 내용에 반발하며 퇴장하고 있다. 2023.1.17. ⓒ뉴스1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활동을 통해 참상의 실체와 책임자들의 명백히 드러나길 원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희생자를 위한 애도와 추모가 이뤄질 수 있길, 유가족에 대한 위로의 마음이 전달되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국조 특위 여당 소속 위원들은 결과보고서 처리에 반발하며 퇴장해버렸고, 야 3당 위원들만 남아 이를 의결했습니다. 그리곤 유가족과 생존자가 참여하는 독립적인 조사기구 설치, 피해자 및 유가족에 대한 후속대책 마련 등 여러 과제만 남긴 채 마무리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아닌듯 싶지만, 언젠가 유족의 원대로 충분히 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야 하는 시점이 올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부디 관계 당국자, 유족, 전문가 사이 충분한 교감이 이루어져, 희생자의 넋을 기리고, 끔찍했던 참사를 영구히 현재화하며, 과오를 저지른 당국과 책임자들을 고발하는 것을 너머 일상에 찾아올 수 있는 사회적 재난에 대해 경고하며, 문명의 안녕, 공동체적 정신, 자비에 관한 세계사적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기억공간이 조성되기를 바랍니다.

편집자주

2020년 3월부터 연재된 '우리 시대 기억과 공간' 칼럼이 2023년 1월을 마지막으로 종료됩니다. 3년 여 동안 시민들이 일상에서 만나는 건축물과 공간들에 어떤 사회적 의미가 담겨 있는지, 때론 현장감 있게 때론 학문적으로 아름다운 문장을 통해 소개해주신 김명식 건축가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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