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3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가 출간한 책 ‘다 죽여라, 다 쓸어버려라’ 첫 장의 제목은 ‘온 국토가 무덤’이다. 이 책은 경기도부터 제주에 이르기까지 당시 확인된 남한 민간인 학살 피해 지역을 지도로 만들어 소개하고 있다. 지도는 학살이 전국에서 벌어졌음을 보여줬고, 실제로 거의 모든 시와 군에서 크고 작은 학살이 자행됐다.
죽음이나 실패를 의미하는 관용구로 흔히 쓰는 ‘골로 간다’와 ‘물 먹었다’는 말이 있다. 이는 내륙에 살던 이들은 산 속 ‘골로 가야’ 했고, 바닷가에 살던 이들은 수장돼 ‘물을 먹어야’ 했던 참혹한 과거의 흔적을 담고 있다. 학살당한 이들의 대부분은 농민이었다. 그렇게 억울한 죽음들로 인해 ‘골로 간다’와 ‘물 먹었다’는 말이 만들어졌다. 비극의 역사가 산에서, 물에서, 전국 방방곡곡에서 벌어졌으니 ‘온 국토가 무덤’이란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온 국토가 무덤’이 될 정도로, 광범위한 학살이 벌어졌지만, 학살의 진실을 제대로 아는 이들은 드물다. 왜 알려지지 않은 것일까? 그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족들은 이 사실을 외부, 심지어는 자식들에게도 알리지 못한 채 숨죽여 살아야 했다. 또다시 ‘빨갱이’로 몰릴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1960년 4·19혁명 직후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유해를 발굴하려는 유족들의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1961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족회 회장과 간부들을 군사 법정에 세우고, 용공 분자로 몰아 사형 등 중형을 선고했다.
그래서 유족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침묵이 이어지며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의 시신은 계속 차가운 땅속에 있게 됐고, 진실도 함께 묻혀 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올해로 70년이 됐고, 학살의 비극을 증언해줄 유족들도 점차 사라지고 있다. 이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기 전에 기록해야 한다며 19년째 학살의 진실을 추적해 온 이가 있다. 바로 구자환 감독이다. 지난 1월 17일 그를 만났다. 민간인 학살의 진실 파헤친 영화 ‘레드 툼’, ‘해원’, ‘태안’ 진실 알려줘 이제야 한 풀렸다는 유족들
지난해 10월 민간인 학살을 다룬 그의 세 번째 영화인 ‘태안’이 개봉했다. 영화는 한국전쟁 70주년이던 지난 2020년을 앞두고 마무리됐지만, 2년이 지나서야 뒤늦게 개봉했다. 전국을 돌며 순회 상영회를 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지만, 많은 이들이 영화를 보진 못했다.
“보통 독립영화는 개봉 전 최소 1년 정도 홍보 기간이 필요해요. 상업 영화는 홍보 예산이 따로 있지만, 독립영화는 그럴 수 없어 영화제 출품 등 준비를 거쳐 개봉해야 하니까요. 영화 ‘태안’은 한국전쟁 70년에 맞춰 조금 일찍 2020년에 개봉하려고 준비했어요. 지역 순회상영회를 두 차례 정도 하다가 코로나19 때문에 포기했어요. 그러다 지난해를 넘기면 안 된다는 생각에 개봉했는데, 그동안 개봉 못 했던 영화들이 쏟아지고, 월드컵도 겹쳐 상영관을 많이 잡지 못했어요. 메가박스를 포함해 전국 11개 극장에 걸렸지만, 낮에 하루에 한 번 또는 이틀에 한 번 정도 상영하는 것이어서 관객을 모으기 힘들었어요. 결국, 일주일 여 만에 극장에서 내리고 전국을 돌며 순회 상영회를 통해 관객들을 만났습니다.”
그의 모든 작품은 이런 힘겨운 과정을 거쳐 관객을 만나야만 했다. 그런 노력은 영화계에서 어느 정도 인정받아 영화 ‘레드 툼’으로 2013년 서울독립영화제 우수작품상과 2016년 들꽃영화상 다큐멘터리 신인감독상을 받았다. 하지만, ‘레드 툼’ 2,737명, ‘해원’ 1,589명, 태안 ‘1,336명’ 등 흥행 성적은 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래도 수십 년을 침묵했던 유족들에겐 자신들의 억울함을 담아낸 소중한 영화였다. ‘해원’ 시사회 과정에서 만난 어느 할머니의 사연은 유족들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알게 한다. 지난 2017년 경남교육청에서 열린 영화 ‘해원’ 시사회에 한 할머니께서 아드님과 함께 왔다. 구 감독은 시사회를 마치고, 할머니와 인사를 나눠 기억했다.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나 충남 홍성에서도 시사회를 열었는데, 그 할머니의 따님이 오셔서 구 감독에게 할머니가 남긴 말을 전했다. “어머니가 영화 보시고, 속이 시원하다고 하셨어요. 평생 한을 가슴에 품고 계셨는데, 그 말을 전하시고 돌아가셨어요. ‘영화를 만들어줘서 정말 고맙습니다’라고요”
‘태안’ 시사회에서 웅성거린 유족들 70년 넘어서 알게 된 죽음의 사연과 아픔 침묵 강요받으며 왜곡된 역사 대한민국 수립 과정으로 미화된 학살의 비극
구 감독의 영화는 억울한 그들의 이야기를, 그들이 말하지 못한 채 가슴속에 품어온 이야기를 대신 해주는 영화다. 그가 만든 영화 제목처럼 말 그대로 오랜 한과 원을 풀어내는 ‘해원’(解寃)이다. 태안지역 민간인 학살 유족들과 함께 영화 ‘태안’ 시사회를 했을 땐 이런 일도 있었다.
“시사회를 하는데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면서 이야기를 나누시더라고요. 다들 서로 알고 지내던 가족들이고, 친척들이고, 지인들인데 학살 피해자들이 어떻게 돌아가셨고, 그 자식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전혀 모르셨던 거예요. 서로 아프니깐 물어보지 못했고, 숨죽이며 살아오다 보니 말하지 못했던 겁니다. 유족들 가운덴 지금까지 우리 아버지가 죽을죄를 지어서 그런 것이라고 죄책감을 지닌 채 살아온 분들도 있었어요. 부역자로, 공산주의자로 몰려서 돌아가셨다는 생각 때문에 진실을 알아볼 생각조차 못 하고 침묵하며 살아온 거예요.”
침묵을 강요받으며 역사는 왜곡됐다.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 가운데엔 항일독립운동가들도 많았다. 일제에 협력했던 반민족행위자 가운데 많은 이들이 해방 직후 ‘반공 투사’로 변신했다. 일제에 협력했던 그들은 일제가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던 방식을 그대로 활용해 항일 독립투사들까지 학살했다. 한국전쟁 과정에선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이를 인민군 또는 빨치산을 소탕한 승리 기록으로 조작하기도 했다. 아직도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한국을 지배하고 있는 그들은, 이런 학살의 과정을 치열한 좌우 대결에서 이기고 대한민국을 수립한 과정으로 미화했다.
“당시 실적이 필요한 경찰이나 군인들이 후방지역에서 공비를 토벌했다고 주장했지만, 죽임당한 상당수는 전쟁을 피해 산으로 도망가 숨어있던 마을 주민들, 피난민들이었어요. 이들을 죽이고 ‘빨갱이 소탕’, ‘공비 토벌’이라고 한 거예요. 학살은 목숨을 빼앗는 차원을 넘어 재산을 갈취하는 수단이기도 했어요. 심지어 남편을 죽이고, 배우자를 자기 부인으로 삼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1987년 대학 휴학 후 의경 지원 시위 현장에서 만난 민주화운동의 물결
그는 어떻게 이 길을 걷게 된 걸까? 불과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그를 아는 누구도 그가 민간인 학살을 기록하는 감독이 될 것이라고 예상한 이는 없었다. 심지어 그조차 예상하지 못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일하며 다닐 수 있는 야간대학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국문과나 법학과를 지원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그가 지원한 학교엔 관련한 과가 없었다. 단순히 ‘돈이나 많이 벌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경영학과에 지원한 것이다. 일하며 힘겹게 대학에 다녔던 그는 “친구 놈의 꼬임에 넘어가” 의무경찰에 지원하게 됐고, 군대에서 1987년 전국을 휩쓴 민주화운동의 물결을 만났다.
“경북 고령에 있는 후방부대였어요. 전경과 의경이 같이 있던 부대였는데, 직접 시위 진압에 나서는 부대는 아니었어요. 그래도 시위 때 가끔 지원을 나가곤 했거든요. 당시 서울에선 전경들이 양심선언을 하기도 했지만, 저는 민주화 투쟁이 왜 일어나는지도 모를 때였어요. 그러다 대구역 앞 중앙파출소에 지원을 나갔다가 깜짝 놀랐어요. 나가서 보니 거리에 있는 이들이 일반 시민들이었거든요. 분노한 시민들에게 당시 포위돼 있다가 풀려난 적이 있어요. 그때부터 시민들이 왜 거리에 나온 건지 궁금했고, 1989년 제대한 뒤 본격적으로 책을 구해 읽으면서 공부했어요. 학교 다니던 시절 저와 함께 한 선배는 없어요. 그냥 자생적인 운동권이었던 거죠.”
그렇게 조금씩 세상을 알아가다 대학 시절 구속되기도 한 그는 졸업 이후 우연히 카메라를 들게 됐다. 구속 경험과 함께 당시 IMF 구제금융으로 경기가 위축돼 취직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보험 영업 등 여러 일을 하며 지내다 2000년대 초반 그가 살던 경남 창원 민주노총 지역사무실에 갔다고 한다. 총파업 기자회견을 하는데, 취재하러 방송사 카메라 하나 오지 않아 불만이라는 볼멘소리를 들었다.
웨딩 촬영으로 시작된 그의 영상 인생 2003년 카메라를 들고 달려간 배달호 열사 투쟁 현장
“‘안 오면 내가 찍으면 된다’고 너무 쉽게 이야기했어요. 찍는 거 배워서 하려고 했는데 솔직히 카메라, 컴퓨터 등 준비가 제대로 안 되니깐 힘들더라고요. 책 보면서 배우다가 포기했어요. 더구나 결혼한 몸이어서 더 배우긴 어렵다고 생각해 취직자리를 알아보려고, 생활정보지를 뒤지는데 ‘웨딩 촬영’을 모집하더라고요. 지원했는데 나이가 많다며 처음엔 안 뽑아 주려고 했어요. 34살이었거든요. 사정사정해서 일은 시작했지만, 10살이 넘게 어린 사람들에게 어깨너머로 영상편집을 배웠어요. 텃세가 심했거든요. 그렇게 10개월 정도 배우니깐 조금 알겠더라고요.”
영상 작업이 손에 조금 익어갈 무렵 그에게 경제적 위기가 닥쳤다. 빚이 쌓이고, 압류를 당할 위기였다. 대리운전에 웨이터까지 하면서 버텼다. 코피를 쏟으며 일했지만, 감당하기 힘들었다. 결국, 이혼이라도 해 가족들까지 피해가 번지는 걸 막아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이었다. 그때 구 감독의 매형이 퇴직금 2천 만을 빌려주면서 급한 위기를 넘겼다. 매형은 ‘영상을 본격적으로 찍을 거면 카메라를 마련하라’며 800만 원을 추가로 지원해줬다. 그렇게 마련한 카메라로 웨딩촬영을 이어갔고, 민중의소리 경남 지역 기자로 활동하는 등 활동도 이어갔다.
그러다 어린이 예술학교 촬영 등 돈이 될만한 일거리가 들어왔지만, 그는 가지 못했다. 2003년 1월 9일 새벽 경남 창원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 씨(당시 50세)가 사내 ‘노동자광장’에서 분신·사망한 상태로 발견됐기 때문이다. 노조탄압, 손배가압류에 시달리던 그는 유서를 통해 해고와 재산가압류, 급여가압류, 노동조합 말살 등을 자행하는 사측과 사법부를 규탄했고, 사회가 해고 노동자와 노동조합, 가족들을 보살펴 주기를 희망했다. 배달호 열사의 죽음을 본 그는 현장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카메라를 들고 고민 끝에 현장으로 달려갔어요. 주요 언론이나, 방송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할 걸 알기 때문에 간 거예요. 이때부터 영상기자로 활동했어요. 처음만 해도 독립영화가 뭔지, 다큐멘터리가 뭔지도 몰랐어요. 현장을 찍어가면서 조금씩 알아간 거예요. 그런 삶의 여정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때론 이게 운명이 아닐까 생각을 많이 해요.”
2004년 운명처럼 만난 마산 진전면 여양리 학살 현장 “유족들의 한 맺힌 이야기에 부끄러웠죠 대학을 나왔고, 역사도 배웠는데 학살의 진실은 처음 들었거든요”
여러 투쟁 현장을 영상에 담아오던 그는 운명처럼 민간인 학살 현장을 만났다. 지난 2004년 경남 마산 진전면 여양리에서 진행된 유골 발굴 현장을 취재하게 된 것이다. 2002년 9월 태풍 루사로 인해 흙이 무너지며 50여 년 동안 땅속에 묻혀있던 국민보도연맹 학살사건 피해자 유해가 드러났다. 2년 뒤 발굴을 통해 수습된 유골은 125구에 이르렀다.
이승만 정권은 일제강점기 전향한 사회주의자들을 관리하기 위해 만든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이란 단체를 모방해 1949년 4월 ‘국민보도연맹’을 만들었다. 1948년 12월 시행된 국가보안법에 따라 ‘좌익 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전향시켜 이들을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만든 조직이었다. 국민보도연맹엔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는 물론 지역별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쌀을 주겠다고 속여 영문도 모른 채 가입했던 이들도 많았다.
이들을 지역별로 모아 사상교육을 하다가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에 부역하거나 동조할 수 있다면서 학살했다. 마산 진전면 여양리에서도 1950년 7월 하순 학살이 벌어졌고 수백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 유골 가운데 일부가 2002년 태풍으로 인해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이후 구 감독은 기자로 활동하면서 틈틈이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 현장을 카메라에 담았다.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구례, 청원, 경산, 대전 등 4곳을 시작으로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집단 학살지를 국가 차원에서 발굴하기로 하는 등 더디지만 유해 발굴 작업이 이어졌다. 경남에서도 이후 학살과 관련한 조사와 유해 발굴이 시작됐고, 구 감독은 조사위원으로 참여해 경남 각지를 돌며 유족들의 증언을 들었고, 이를 영상으로 담았다.
“유족들의 한 맺힌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부끄러웠어요. 대학을 나왔고, 역사도 배웠는데 학살의 진실은 처음 들었거든요. 증언을 듣다 보면 부끄러움과 함께 화가 치밀어 올랐어요. 그리고, 이 사건을 국민이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영상으로 담아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증언을 찍었던 유족을 몇 개월 지나 다시 가면 그사이 세상을 떠난 분도 많았어요. 그래서 빨리 영화로 만들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죠. 어떻게든 많은 사람에게 알려서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부탁하는 유족도 있었어요.”
2004년부터 찍은 민간인 학살 현장 10년 만에 만들어진 영화 ‘레드 툼’ “자신이 왜 죽는 줄도 모르고 끌려가서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의 심정이 어떠했겠어요”
2014년 민간인 학살을 다룬 그의 첫 영화인 ‘레드 툼(Red Tomb)’이 공개됐다. 영화엔 2004년 유골을 발굴했던 마산 여양리를 포함해 국민보도연맹 사건을 중심으로 경남 지역의 여러 민간인 학살 사건이 담겼다. 영화 ‘레드 툼’엔 학살의 비극과 함께 유족들이 숨죽이며 살아온 세월이 묻어났다. 구 감독은 “자신이 왜 죽는 줄도 모르고 끌려가서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의 심정이 어떠했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학살은 수백만 명에 이르는 가족들의 눈물과 한숨이 됐다. 그들은 모두 누군가의 아들과 딸이었고,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어머니였다.
“영화에 나오는 박상연 할머니는 23살 때 배 속에 아기를 가진 채 남편을 잃었어요. 남편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몰라서 평생 남편을 기다리면서 살아왔는데, 이사도 가지 않고 대문도 잠근 적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당시 남편이 입었던 옷도 그대로 보관하고 있었어요.”
구 감독은 이후 주제와 소재를 조금씩 달리하면서 한국전쟁을 전후해 벌어진 민간인 학살을 입체적으로 영상에 담았다. 영화 ‘레드 툼’에선 경남 국민보도연맹 사건을 중심으로 다뤘고, 이어진 2017년 작 ‘해원’에선 한국전쟁 당시 정부에 의해 전국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과 이 학살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근원을 추적했다. 2020년 작 영화 ‘태안’에선 다시 지역 사건으로 돌아왔지만, 같은 마을 사람들이 좌우로 나뉘어 서로 죽고 죽였던 비극과 그 비극의 뒤에 숨어있는 권력의 문제를 해부했다. 그는 “특별히 고민해 소재를 찾는다기보다는 내가 모르는 걸 알려고 찾아가는 과정이 영화가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전쟁을 전후한 학살사건은 크게 전쟁이 벌어지기 전 좌우 대립과정에서 벌어진 학살, 한국전쟁 이후 벌어진 국민보도연맹 학살, 이후 인민군 점령기에 인민군 또는 좌익세력에 의해 벌어진 학살, 인민군 점령지가 수복된 이후 인민군 또는 빨치산에 부역했다며 우익세력과 경찰에 의해 벌어진 학살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좌와 우 모두 학살을 자행했으니 불행한 과거로 그냥 덮어두자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심지어 좌익 혐의자나 부역 혐의자들에 대한 학살은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이들까지 있다.
“한국전쟁 시기 양측에서 학살을 일으킨 건 분명 사실이에요. 그런데 인민군 혹은 좌익세력에 의한 학살은 최대 12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고 주장합니다.(학자들은 터무니없이 부풀려진 통계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한국전쟁 당시 우리 군경 혹은 우익에 의한 학살은 최대 120만 명에 이릅니다. 단순히 숫자로만 비교해도 10배가 많아요. 사실상 국가가 나서서 국민을 죽인 사건이 대부분이라는 말입니다. 만약 저 수치가 반대였다면 과연 가만히 있었겠어요. 국가의 범죄, 지금 기득권 세력들과 연관된 학살이 드러나는 게 두려우니 덮자고 하는 겁니다.”
“씨족 또는 주민 간의 갈등으로 벌어진 학살도 있고 국민보도연맹 사건에서 가족을 잃은 일부 유족이 보복학살에 나선 사건도 있었어요”
누군가는 덮자고 하지만, 정말 많은 이들이 터무니없이 목숨을 잃었다. 빨치산에게 밥을 줬다는 이유로, 머리를 깎아줬다는 이유로, 집에 들어와 자고 갔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었다. 누가 부역자인지, 빨갱이인지 지목하면 살려준다며 주민을 협박해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죽이는 이른바 ‘손가락 총’이 전국에서 쏘아졌다. 그런 야만의 시기 태안에서도 많은 이들이 죽었다. 한국전쟁 당시 국민보도연맹 시기에 학살된 115명과 인민군 점령기에 학살된 115명과 수복 이후 부역 혐의로 학살된 900명 등, 모두 1,200여 명에 달하는 민간인이 태안에서 목숨을 잃었다.
“사건으론 이렇게 나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씨족 또는 주민 간의 갈등으로 벌어진 학살도 있고, 국민보도연맹 사건에서 가족을 잃은 일부 유족이 보복 학살에 나선 사건도 있었어요.”
그는 영화 ‘태안’에서 이렇게 얽히고, 설킨 학살의 비극을 입체적으로 담아내려 했다. 가슴 깊은 이야기를 담아내기 위해 영화 ‘태안’ 촬영엔 세월호 유가족인 ‘유민 아빠’ 김영오 씨가 특별출연해 유족 인터뷰와 현지 취재에 동행했다. 구 감독은 김영오 씨를 지난 2018년 영화 ‘해원’ 광주지역 공동체 상영회에서 처음 만났다. 영화 상영이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서다.
이날 상영회 전에 영화 ‘해원’을 동료가 준 영상을 통해 미리 접했던 그는 영화를 보고 몰랐던 역사를 알게 됐다고 고백했다. 김영오 씨는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지난 2014년 46일간 광화문광장에서 단식할 때 한국전쟁유족회 관계자의 명함을 받았다. 고생한다며 자신에게 명함을 건넸지만, 이분들의 사연을 알지 못하다가 4년여가 지나 영화 ‘해원’을 보고 알게 된 것이다.
뒤늦게 알게 된 민간인 학살의 진실 아픔과 아픔으로 마음이 이어져 영화 ‘태안’ 촬영에 함께한 ‘유민 아빠’ 김영오 씨
그는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고, 서러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유가족들을 보며 부끄러웠다고 한다. 그는 지난 2019년 충남 아산 염치읍 민간인 학살 유골 발굴 현장을 구 감독과 함께 촬영차 방문했고, 민중의소리와 만나 “2014년 세월호 사건 당시 딸 시신을 찾기 위해 8일 동안 기다렸어요. 그 짧은 시간도 기다림의 고통이 엄청났습니다. 그런데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들은 70년이란 시간이 흘렀어요. 유족들이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았으면 해요. 땅에 묻힌 피해자들의 시신이 이제라도 온전한 모습으로 너무 늦지 않게 가족들의 따뜻한 품으로 돌아갔으면 합니다”고 말했다.
민간인 학살의 진실이 알려지길 바랐던 김영오 씨는 구자환 감독이 영화 ‘태안’을 만들기 위한 후원에 동참했다. 후원에 감사하는 인사를 전하기 위해 구 감독은 김영오 씨에게 연락했고, 영화 촬영에 같이 할 수 있겠냐고 제안했고, 잠시 고민한 뒤 수락했다. 구 감독은 “심한 아픔을 느낀 이가 아픔에 더욱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무엇보다 심성이 고운 영오 씨가 유족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가슴으로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다고 보았어요”라고 설명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민간인 학살 유족들도 세월호 참사를 알고 있었고, 그렇게 마음과 마음은 아픔으로 통했다.
70년 전 좌와 우로 갈라져 서로가 학살하고 증오했던 시간을 풀어내기 위해선 아직 갈 길이 멀다. 좌익 또는 인민군에 의해 학살당한 자유수호 유족 가운데 인터뷰에 응하고, 영화에 나온 사람은 한 분밖에 없었다. 그는 “70년 세월이 지났으니깐 그 당사자들은 미워도, 가족들은 미워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시대가 만든 아픔이라며 화해를 원하면서도 보도연맹 학살자 유족이나 부역 학살자 위령제를 군청에서 여는 것에 대해선 아직 마음을 열지 못한다. 진정한 화해를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 걸까?
“국가가 그들을 지키지 못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렇게 국가가 책임지고 사죄해야 개인들의 아픔이 풀어질 수 있어요”
“그분들은 여전히 같은 마을에서 함께 살아가고 계세요. 친한 친구의 할아버지와 자기 할아버지가 학살의 가해자와 피해자인 경우도 있어요. 한 마을 출신의 두 남녀가 사귀게 되어 결혼하려고 보니 서로 학살로 얽힌 원수 집안인 경우도 있습니다. 두 집안은 이런 아픔을 후손까지 물려주지 말자면서 결혼을 허락했다고 해요. 이렇게 개인들끼리 풀어내기도 하지만,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요. 결국, 국가가 나서서 사죄해야 합니다. 국가의 의무와 책임이 있잖아요. 국민보도연맹과 부역자 학살사건은 국가가 직접 총과 칼을 들고 죽인 책임을 져야 하고, 인민군 또는 좌익세력에 의한 학살도 국가가 그들을 지키지 못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렇게 국가가 책임지고 사죄해야 개인들의 아픔이 풀어질 수 있어요.”
비극의 사연은 제각각이지만, 그들의 아픔은 닮아 있었다. 구 감독이 학살사건 조사를 하며 서명을 받다 보면 두 유족 모두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해 글을 몰라 서명할 줄 모르는 분들이 많았다. 유족들의 삶은 너무나 고달팠다. 아직도 지하방을 전전하는 이들이 많았고, 식모살이하며 근근이 버틴 이들도 많았다. 구 감독은 “배고픈 이들이 배고픈 이들의 사정을 안다고 이런 어렵고, 한 많은 지난 세월이 두 유족을 이어주는 끈이 되기도 해요”라고 말했다. 실제로 2009년 전남 화순에서 전국 최초로 좌와 우를 가리지 않고, 양쪽 유족이 모두 참석하는 합동위령제를 연 이후 조금씩 다른 지역으로도 퍼져나가고 있다.
구 감독은 최근 또 민간인 학살을 주제로 한 다큐를 준비 중이다. 미니 다큐 형식으로 제작할 예정인데, 유족들이 증언하실 수 있을 때까진 계속 영상을 찍는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CMS 후원도 받고 있고, 지역 촬영에 동행해 함께 취재에 나설 시민 출연자도 모집하고 있다. 구 감독은 “시민 출연자가 민간인 학살 관련 조사를 하는 과정도 담을 생각이에요. 이런 방식을 통해 한 명이라도 더 관심을 가지게 하려는 겁니다”라고 자신의 구상을 이야기했다.
이런 구 감독의 노력에도 진실은 여전히 묻혀있다. 학살에 가담했던 이들은 ‘우리가 있었기에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라고 학살을 합리화하며 오랜 기간 침묵하다가 지금은 거의 세상을 떠났다. 피해자 유족들은 평생 자신이 빨갱이가 아님을, 빨갱이 후손이 아님을 증명받기 위해 심지어 ‘태극기 부대’가 되어 거리에 나서기도 한다.
“옛날 세상 돌아올까 싶어서 겁이 나는 기라” 여전히 세상이 두려운 유족들 그들을 위해 오늘도 카메라를 드는 구자환 감독
윤석열 정부가 집권한 뒤 친북세력 척결을 이야기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이야기한다. 극우주의자들의 입에선 여전히 ‘빨갱이’라는 소리가 쉽게 흘러나오고 있다. 세상은 여전히 무섭다. 며칠 전 도봉산에 오른 구 감독은 쌓인 눈에 쓰인 ‘북진 통일’이라는 글귀를 보았다. 영화 태안에 등장하는 유족이 지적하듯, 지금 전쟁이 일어난다면 과거와 같은 비극이 반복될 수 있다고 그들은 느끼고 있다. 영화 ‘레드 툼’에 출연한 한 할머니는 떨리는 목소리로 “겁이 난다”는 말을 자꾸만 되풀이했다.
“세상은 좋은 세상이 돌아왔는가 싶다가도 나는 자꾸 겁이 나서. 혹시나 또 그런 세상 돌아올까 싶어서 겁이 나요. 옛날 세상 돌아올까 싶어서 겁이 나는 기라. 아직까지 남북이 갈려서 안 있는교. 갈려서 있는데 겁이 안 날 턱이 있는가. 겁이 나는데…….”
유족들이 느끼는 두려움은 어쩌면 당연하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고, 외면하는 현실은 그들을 과거의 공포를 여전히 오늘에도 이어갈 수밖에 없도록 내몰고 있다. ‘온 국토가 무덤’이지만, 발굴은 더디다. 구 감독은 “발굴과 함께 위령 시설을 공원처럼 짓고 그곳에 학살 관련 영상, 사진, 자료를 전시해 학살의 진실을 기록해야 과거의 비극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역사의 진실을 조금이라도 더 알리기 위해 그는 자신이 찍은 영화를 유튜브에 올려 대중들에게 공개했다. 그가 찍은 영화들은 지난 2021년 12월 국가기록물로 지정돼 국가기록원에 영구 보관되고 있다. 그는 끝으로 자신이 남긴 또는 앞으로 찍을 영상이 비극을 마무리하기 위한 소중한 자료로 쓰이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제가 민간인 영상 작업을 하는 걸 보고 칭찬하는 이들이 많아요. 그런데, 솔직히 경제적, 정신적 출혈이 너무 커요. 열심히 찍는다고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민간인 학살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는 것도 아니에요. 그래도, 지금은 아니더라도 이후 세대 가운데 누군가는 볼 거라는 생각으로 만들어요. 기록은 남는 거잖아요. 기록을 남기면 제가 남긴 기록으로 공부하려는 이가 있을 것이고, 새롭게 무언가 만들려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 언젠가를 위해 열심히 찍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