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 지난 추석에 이어 설 명절을 맞아 경제역사에서 벌어졌던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사건들을 소개하는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연휴 기간 동안 모두 네 건의 경제역사가 소개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과 성원 바랍니다.
① 아메리카 대륙의 등장, 은화를 무너뜨리다 _ 금본위제도와 은본위제도 ② 영미의 지지 아래 유대인의 나라 이스라엘을 세우다 _ 밸푸어 선언 ③ 월스트리트가 벌인 초대형 사기극 _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④ 중국, 일본의 무릎을 잠시 꿇렸지만 _ 희토류 분쟁
동아시아에는 역사를 왜곡하면서까지 자국의 영토 확장에 눈독 들이는 두 나라가 있다. 하나는 아직도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 우기는 ‘일본’이고, 다른 하나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을 기치로 역사왜곡을 서슴지 않는 ‘중국’이다.
한때 전 세계를 자신의 발밑에 두겠다는 야망으로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킨 일본과, ‘세계의 중심은 중국’이라 믿는 중화사상(中華思想)의 소유자 중국이 영토를 두고 다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만인은 평등하고 각 나라는 자주적 권리를 지닌다는 상식에 비춰 볼 때 이들의 다툼은 그야말로 도긴개긴, 오십보백보, 도토리 키 재기, 그놈이 그놈인 셈인데 결과가 궁금하기는 하다.
그런데 비교적 최근 두 나라가 영토를 두고 심각하게 충돌한 사례가 발생했다. 일본은 ‘센카쿠열도’[尖閣列島]라 부르고, 중국은 ‘댜오위다오’[钓鱼岛]로 부르는 섬들을 둘러싼 영토분쟁이 그것이다. 이 글에서 이 섬들이 일본 땅이냐, 중국 땅이냐를 논할 생각은 없다. 다만 현재 일본이 이곳을 실효 지배하고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센카쿠열도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로 한다.
2010년 9월, 이곳 주변을 순찰하던 일본 순시선이 조업하던 중국 어선을 나포한 적이 있다. 그곳을 자기네 바다로 생각한 일본은 중국 어선에 “당장 떠나라!”라고 경고했지만, 중국 어선은 경고를 무시하고 조업을 계속했다.
일본 순시선은 중국 어선을 나포한 뒤 선장을 체포해 일본 땅에 감금했다. 이에 중국 정부가 격렬히 항의하며 ‘센카쿠열도분쟁’(혹은 댜오위다오분쟁)이 시작됐다. 영토를 넓히기 위해 역사왜곡도 서슴지 않는 두 나라의 한판 대결, 과연 승리는 누구에게 돌아갔을까?
자원 갑질로 승리한 중국
그런데 이 분쟁은 의외로 싱겁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중국이 보복 차원에서 ‘일본에 희토류 수출을 중단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희토류는 열과 전기가 잘 통해서 스마트폰이나 전기차 등에 쓰이는 소재 산업에 반드시 필요한 원소다.
문제는 희토류가 매장된 곳은 많지만, 추출할 때 환경오염 문제가 적지 않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 그때만 해도 중국 외에 이를 생산하는 나라가 거의 없었다. 2010년 당시 중국의 희토류 생산량은 전 세계 생산량의 97%를 차지할 정도였다.
일본과 중국이 분쟁을 벌이는 지역 ⓒjakopoid
인류의 삶에 꼭 필요한데 그것이 오로지 한 나라에서만 생산된다면, 이는 그 나라에 매우 강력한 무기가 된다. 1970년대 중동국가들이 석유를 무기로 전 세계를 위협할 수 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희토류는 중국의 강력한 무기였고 ‘중동에 석유가 있다면 중국에는 희토류가 있다’라는 이야기까지 나돌았다.
중국은 이 희토류를 무기로 삼았다. 다른 곳에서 희토류를 구할 수 없던 일본은 도리 없이 중국인 선장을 풀어 주며 백기를 들었다. 중국이 자기만 보유한 자원으로 갑질을 한 셈인데, 이 갑질이 통한 것이다.
홀드업 이론
그렇다면 이런 갑질이 각 나라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2009년 ‘홀드업’(hold up) 현상에 관한 연구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미국의 경제학자 올리버 윌리엄슨(Oliver E. Williamson)은 갑질 문제를 통렬히 짚어 냈다.
홀드업은 우리말로 하면 ‘꼼짝 마!’ 혹은 ‘손들어!’쯤 된다. 두 사람이 관계를 맺을 때 더 적극적으로 매달리는 쪽과 상대적으로 느긋한 쪽이 있게 마련이다. 이때는 보통 느긋한 쪽이 ‘갑’이고, 적극적으로 매달리는 쪽이 ‘을’이다. 을은 갑의 결정에 목숨을 걸기도 한다. 이렇게 을이 갑에 집착하는 상황을 윌리엄슨은 ‘꼼짝 못 하는 상황’이라는 뜻으로 ‘홀드업’이라고 표현했다.
예를 들어 보자. 청년 ‘로버트’는 ‘린다’라는 여성을 사랑한다. 이때 갑은 사랑받는 린다이고, 을은 린다에게 매달리는 로버트다. 로버트가 린다를 따라다니며 “내 사랑을 받아 주세요”라고 청했더니, 린다는 “나를 사랑한다면 삭발하고 이마에 ‘린다만을 사랑해’라는 문신을 새겨 주세요”라고 요청한다. 전형적인 갑질이다.
하지만 로버트는 린다를 너무 사랑하는 을이기에 이 무리한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원래 을이란 이렇게 불쌍한 존재다.
여기서부터 홀드업 상황이 시작된다. 린다는 자신을 위해 삭발도 하고 이마에 문신도 새긴 로버트를 예전보다 살갑게 대할까? 노벨상 수상자 윌리엄슨의 대답은 “천만의 말씀!”이다.
로버트는 린다를 위해 엄청난 투자를 감행했다. 문제는 이 투자가 오로지 린다만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 있다. 삭발한 뒤 이마에 ‘린다만을 사랑해’라고 문신을 새긴 이 투자는 린다 외 세상 그 어떤 여성도 감동시키지 못한다. 생각해 보라. 이마에 문신으로 ‘린다만을 사랑해’라고 새긴 남자를 사랑할 여자가 린다 말고 이 세상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렇게 로버트가 린다만을 위해 투자하면 린다는 로버트와의 관계에서 그냥 갑도 아니고 압도적 갑의 위치에 오른다. 린다가 아무리 로버트를 학대해도 로버트는 다른 여자를 선택할 수 없다. 이때부터 린다는 로버트를 훨씬 막 대한다. 이것이 바로 윌리엄슨이 말하는 ‘꼼짝 마’ 상황이다.
로버트는 린다가 “내 발을 닦아라”라고 명령하면 무릎 꿇고 린다의 발을 씻겨 줘야 한다. 린다가 새벽에 “우리 집 앞으로 당장 튀어 와라”라고 요구하면 잠도 덜 깬 채로 린다 집 앞에 뛰어가야 한다. 왜냐고? 로버트에게는 린다 외 다른 여성을 만날 가능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를 현실세계에 적용해 보자. 우리나라 대기업과 협력사의 관계가 대충 이렇다. 보통 대기업 협력사들은 오로지 대기업 한 곳에 물건을 납품한다. 생산 라인 자체가 그 대기업이 요구하는 대로 설계돼 있다.
그래서 A라는 대기업에 납품하는 협력사가 이 회사와 마음이 안 맞는다고 해서 “나 지금부터 B 대기업에 납품할래”라고 말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하려면 수십억 원을 들여 생산 라인 자체를 B 기업에 맞게 뜯어고쳐야 한다.
협력사들이 생산 라인을 특정 대기업 입맛에 맞추는 순간, 이들은 절대 그 대기업을 벗어날 수 없다. 대기업이 어떤 요구를 해도 협력사들은 다 받아들여야만 한다. 로버트가 린다에게 종속된 상황이 재연되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원가 9,000원에 제품을 만들어서 1만 원에 납품하던 협력사가 있다고 치자. 이 회사가 기술혁신을 통해 원가를 5,000원으로 낮췄다. 이러면 협력사의 이익은 1,000원에서 5,000원으로 늘어나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귀신같이 이 사실을 알아낸 대기업은 재깍 협력사에 연락해서 “원가 줄였다면서? 그러면 납품단가도 6,000원으로 깎아야지”라고 강요한다. 성질 같아서는 당장 때려치우고 싶지만, 이미 홀드업 상태에 놓인 협력사는 이를 거절할 방법이 없다. 시키는 대로 납품단가를 낮추고, 기술혁신의 공을 고스란히 대기업에 바친다.
사정이 이렇다면 어떤 협력사가 기술혁신에 나서겠나? 혁신으로 얻는 이익을 대기업이 족족 채 가는 상황에서 말이다. 당연히 협력사들은 기술혁신보다 대기업과의 유착에 더 집중한다. 갑을관계가 한국 경제의 창의성과 효율성을 좀먹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갑질의 종말
그렇다면 홀드업 상황을 이용해 갑질한 린다는 행복할까? 그렇지 않다는 게 이 이론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린다의 갑질이 곧 사방팔방 소문나기 때문이다. 소문을 들은 남성이라면 그 누구도 린다에게 관심을 주지 않을 테다. 잘못하다가는 이마에 문신을 새기고 인생을 망칠 수도 있다.
로버트도 어떻게든 린다로부터 벗어날 방법을 찾을 것이다. 뛰어난 의사를 찾아서 최대한 문신을 흐릿하게 만드는 식으로 말이다. 그래야 홀드업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결국 린다는 갑질 이후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한 명뿐인 ‘노예’ 로버트마저 떠나보낸다. 홀드업을 이용한 갑질은 결국 갑과 을 모두에게 비극으로 마무리된다.
다시 일본과 중국의 영토분쟁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희토류 갑질로 일본의 무릎을 꿇린 중국은 과연 쭉 행복했을까? 그렇지 않다. 희토류 갑질에 된통 당한 일본이 대안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은 세계 곳곳 희토류를 생산하는 공장에 투자했다. 또 오스트레일리아와 합작해 말레이시아에 희토류 제련 공장을 세웠다.
2012년 4월, 일본 대기업 히타치는 희토류를 사용하지 않는 산업용 모터를 개발했다. 한번 중국에 당한 일본은 어떻게든 중국 희토류에 대한 의존도를 줄여 나갔다. 2009년 86%에 육박하던 일본 기업의 중국 희토류 의존도는 2015년 55%까지 떨어졌다.
일본뿐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도 탈중국에 나섰다. “린다가 갑질을 한 대”라는 소문을 들은 남성들이 린다를 회피하는 상황처럼, 세계 각국은 ‘언제든지 중국이 희토류를 무기화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미국도 자국에 희토류 광산을 개발하고 제련 시설을 갖춰 나갔다. 전 세계가 희토류의 중국 의존도를 줄이면서 2010년 97%이던 중국의 희토류 점유율은 70%대까지 하락했다. 중국은 희토류 갑질로 영토분쟁에서 일시적인 승리를 거뒀어도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 했다.
이처럼 갑질은 을뿐 아니라 갑에게도 피해를 준다. 홀드업 이론의 창시자인 올리버 윌리엄슨이 노구를 이끌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갑질을 멈추고 신뢰에 바탕을 둔 경제활동을 하라.”라고 호소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희토류 분쟁은 단기적으로 중국에 승리를 안겼지만, 장기적으론 일본의 산업적 기반을 더 탄탄하게 만들어 줬다. 그래서 이 분쟁의 진정한 승자는 일본이라는 평가마저 나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