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자동차 부품 회사인 일본 ‘덴소(DENSO)’의 자회사인 한국와이퍼가 법인 청산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대량해고를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은 부당하다는 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수원지방법원 안산지원 제10민사부(재판장 남천규 부장판사)는 30일 금속노조가 한국와이퍼를 상대로 낸 단체협약 위반 금지 가처분 사건을 인용했다. 노조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재판부는 “한국와이퍼는 단체협약 절차에 따른 노조와의 합의 없이 노조 소속 조합원들을 해고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경기도 안산시 반월공단에 위치한 한국와이퍼에서 생산한 제품은 ‘덴소’의 한국지사인 ‘덴소코리아’를 통해 현대자동차로 납품된다. 그만큼 규모가 컸던 한와이퍼가 지난해 7월 주주총회에서 법인 해산을 결의했다. 2021년 10월 노조와 “총고용을 보장한다”는 ‘고용안정협약’을 체결한 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 협약에는 ‘회사는 청산, 매각, 공장이전의 경우 반드시 노동조합과 합의해야 한다’는 내용과 함께, 이 협약을 어기면 1인당 1억 원씩 위약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조항까지 담겨 있었다. 한국와이퍼 노사 각 대표가 합의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와이퍼의 원청 격인 덴소의 한국지사 덴소코리아 대표도 ‘연대보증’을 했던 협약이었다.
그런데 이 협약을 뒤엎고 덴소코리아는 지난해 7월 경영악화를 이유로 한국와이퍼를 청산한다고 일방적으로 노조에 통보했다. 노조는 한국와이퍼 청산이 노조 파괴 등을 목적으로 기획적으로 이뤄졌고, 청산이나 구조조정은 노조와 사전 합의해야 한다는 ‘고용안정협약’을 지키지 않았다며 투쟁으로 맞섰다.
금속노조 경기지부 시흥안산지역지회 한국와이퍼분회 최윤미 분회장은 국회 앞에서 ‘위장 청산 철회’를 요구하며 44일간 단식 투쟁을 진행했다. 현재는 노조 조합원들이 한국와이퍼의 일방적인 청산을 막기 위해 공장 안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와이퍼는 지난 12일 노조 조합원 209명에게 기어코 해고예고 통지서를 보냈다. 노조의 반발에도 일방적인 회사 청산을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노조는 “한국와이퍼에 대해 노조와의 합의 없는 해고 절차 진행의 정지를 요구한다”며 법원에 한국와이퍼를 상대로 단체협약 위반 금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이에 한국와이퍼는 “상법상 정해진 청산 절차에서 근로자의 해고를 청산 절차로 정하고 있지 않아 해고가 청산에 관한 절차라고 볼 수 있는 법률상의 근거가 없다”고 반박했다. 또 희망퇴직 제도를 진행했다는 점을 근거로 들며 “(고용보장 협약이) 곧바로 해고에 대한 합의를 의미한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한국와이퍼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 사건 합의조항(고용보장 협약)에 따른 합의의 대상인 ‘청산의 경우’는 청산 과정에서 일어나는 ‘해고’를 포함한 청산에 관한 절차 내지 청산에 관한 사항을 모두 포함한다고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또한 “(고용보장 협약의) 주된 목적은 청산 자체를 막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청산 과정에서 채권자 소속 조합원들의 고용승계 또는 고용안정이라고 판단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재판부는 “(고용안정 협약은) 한국와이퍼가 노조와의 합의에 따라 청산 과정의 해고를 제한하는 내용으로서 유효하다”며 노조의 손을 들어줬다. 사측과 노조가 협의한 내용이 강행법규나 사회질서에 위배되지 않으면 사측은 이를 따를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재판부는 덴소가 뒤에서는 한국와이퍼 청산을 계획하고 앞에서는 고용안정 협약을 맺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한국와이퍼는 이 사건 협약서 체결 당시부터 청산을 예정하고 있었다거나 청산에 이를 것임을 예견·인식하고 있었고, 애초부터 이 사건 협약서를 준수할 의 사가 없었거나 또는 단체협약상 의무를 준수하지 못할 상황을 예견·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는 ‘고용보장 협약 체결 이후 현저한 사정 변경으로 그 이행을 강요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한국와이퍼 측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재판부는 “이 사전 협약서의 구속력이 배제돼야 한다는 한국와이퍼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다만, ‘단체협약 절차에 따른 노조와의 합의 없이 한국와이퍼가 계속해서 해고를 밀어붙일 경우 하루당 5천만원을 노조에 지급하라’는 노조의 이행강제금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법원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한국와이퍼가 금지 행위를 반복할 개연성이 충분히 소명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번 법원 결정에 대해 노조를 대리한 금속노조 법률원 장석우 변호사는 “고용안정협약 중 기업청산에 대한 노동조합의 합의권, 그중에서도 청산 과정에서의 해고에 대한 노동조합의 합의권의 유효성을 인정한 법원의 첫 판단”이라고 평가했다.
최 분회장은 “덴소 자본이 우리 노동자를 기만하는 방식으로 단체협약을 체결했으나 그 단체협약을 만들어왔던 민주노조의 정신과 투쟁이 덴소 자본의 탐욕에 제동을 건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7개월간 우리 투쟁의 정당성과 금속노조를 믿고 흔들림 없이 투쟁해 온 한국와이퍼분회 조합원들이다. 세상의 상식을 지키기 위해 지금도 차가운 현장 바닥을 지키고 살을 에는 거리 선전전을 이어가는 우리 조합원들을 보면 너무 마음이 아프다”며 “이런 아픔을 끝낼 수 있도록 더 많은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린다”고 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