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김용균 노동자 사망사건에 대한 항소심 판결이 내려졌다. 대전지법에서 9일 열린 선고공판에서 재판부는 업무상 과실치사와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김병숙 전 한국서부발전 사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1심보다도 훨씬 후퇴한 판결이다.
1심에서 벌금 1천만 원의 형을 받았던 한국서부발전 법인에 대해서도 무죄가 선고됐다. 1심에서 집행유예 형을 받았던 한국서부발전 태안발전본부장은 무죄를 받았다. 하청업체 사장 등 1심에서도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던 관련자들도 줄줄이 형량이 더 낮아졌다. 김용균씨의 죽음에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재판부는 김 전 사장이 설비나 작업 방식과 관련된 위험성을 인식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결했다. 대표이사가 태안발전본부 내의 개별적인 작업환경을 점검하고 위험예방 조치에 대한 구체적인 주의 의무를 가진다고 보기 어렵다는 재판부의 설명은 납득하기 어렵다. ‘가보지 않았다’, ‘모른다’고 변명하는 피고들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인 결과로 보인다.
안전을 위해 설비를 개선하고 인력을 투입할 수 있는 권한은 어디까지나 원청 경영진에게 있다. 그들의 의사에 반하여 하청업체나 현장의 말단 관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거나 사소하다. 재판부의 판결은 원래 현장의 위험을 방치하고, 촉발하고, 조장하는 권력은 현장과 멀리 떨어져 있기 마련인데 그 거리를 이유로 면죄부를 준 꼴이다.
원청인 한국서부발전과 김용균 노동자가 실질적인 고용관계에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1심 판결도 그대로 유지됐다. “서부발전 측의 요청이나 지시·감독 행위가 있긴 했지만 용역 업무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이뤄진 것이지 피해자가 종속돼 근로를 제공했다고 보긴 어렵다”는 판결 내용은 한마디로 지시·감독 권한은 있지만 사고에 대한 책임은 안 진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하청을 주면 책임이 없고, 모른다고 하면 무죄라는 이번 판결은 단지 아쉬운 정도가 아니라 매우 위험하다. 결국 누구도 감옥 간 사람이 없다. 원청은 벌금조차 빠져나가고 겨우 하청업체에 1200만원 부과된 것이 전부다. 이런 식이라면 안전관리에 시간과 자원을 쓰는 것보다 벌금 좀 내고 마는 것이 훨씬 싸다. 사실상 살인 노동을 부추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김용균씨의 죽음은 우리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낳았다. 누구나 죽지 않고 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산업안전에 대한 여론을 환기했다. 결국 산업안전보건법 개정과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번 판결은 그 모든 것을 뒤집고 되돌린 판결이라는 점에서 퇴행적이다.
중대재해가 줄지 않는 이유는 기업이 처벌을 겁내지 않기 때문이다. 여론이 일어나고 법이 바뀌어도 결국 법원이 안전 범죄에 대해서 엄격한 판결을 내리지 않으면 기업은 결국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번 판결은 생명보다 이윤이 우선시 되는 풍토를 조금이라도 바꾸려면 결국 법원이 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일깨운 판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