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마녀’로 살았던 윤미향 의원과 ‘드디어’ 마주 앉게 됐다. 2020년 5월 정의기억연대와 윤 의원을 둘러싼 논란이 일파만파 커졌을 때, 윤 의원에게 인터뷰를 요청하기 위해 전화 통화를 시도하고 문자 메시지도 보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이후 긴 시간이 흘렀고, 그 사이 윤 의원의 여러 혐의가 대부분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윤 의원은 1심 판결 후 일주일가량 지난 16일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가졌다. ‘예전에 인터뷰를 한 번 요청한 적이 있었다’고 상기시키자, 윤 의원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때 제가 아무런 반응을 안 보였죠? 제가 죽을 곳을 찾을 때였거든요.”
윤 의원은 자신이 속했던 정당도, 자신의 활동을 응원해주던 진보 인사와 언론도, 모두 자신에게 등을 돌렸을 때, 법정에서 고군분투하며 눈물을 삼켜야 했다. 그는 1심 판결을 통해 누명을 벗게 되어서야 비로소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게 됐다.
“30년 동안 거리에서 담대하게 싸워왔지만, 2년 8개월 간 벌어진 한국사회의 공격은 충격”
윤 의원이 2020년 4월에 열렸던 21대 국회의원 선거에 더불어시민당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했을 때부터 조선일보는 연일 윤 의원에 관한 기사를 쏟아내며 그의 출마를 경계하고 있었다. 윤 의원이 대표로 있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정의기억연대가 지방자치단체와 정부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신청한 모든 것이 마치 ‘범죄’인양 보도를 하기도 했고, ‘反美(반미) 구호 외친 시민당 비례, 자녀는 미국 유학’이라는 제목의 단독 기사를 내기도 했다.
윤 의원이 당선된 직후에는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 내부 갈등을 계기로 본격적인 ‘마녀사냥’이 시작됐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은 그 불씨를 당겼다. 이후 윤 의원이 기부금을 유용해 딸의 유학비로 지출하고 아파트를 사들였다거나 안성힐링센터에 부친을 형식상 등재해 임금을 횡령했다는 의혹이 함께 불거졌다. 심지어 ‘위안부’ 피해자 장례지원금을 횡령했다는 의혹이나 피해자에게 화해치유재단 위로금 1억원을 수령하지 말도록 강요했다는 의혹도 있었다.
언론보도를 통해 쏟아진 이런 의혹들은 시민단체의 고발과 검찰 수사로 이어졌다. 하지만 너무 황당한 내용들이라 경찰과 검찰 수사 과정에서 걸러져 아예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나 검찰은 먼지털이식 수사를 벌인 끝에, 2020년 9월 윤 의원과 실무책임자였던 김 모 정의연 이사를 업무상 횡령과 배임 등 7개 혐의로 기어코 기소했다. 나아가 검찰의 일방적인 주장이 담긴 공소장은 국민의힘 전주혜 의원을 통해 언론에 그대로 보도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윤 의원은 재판을 받기도 전에 이미 ‘파렴치한’이 돼있었다.
인터뷰에서 윤 의원은 당시 상황이 억울한 듯이 말했다. “저에게는 어떤 방어권도 주어지지 않았어요. 일방적이었어요. 그런데 재판이 시작되자 기자들이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어요. 그 모습에 정말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윤미향을 공격한 것으로 일단 목표를 달성했구나 하는 인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어요.”
30년 동안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을 벌였던 그에게 난관은 숱하게 많았다.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극우세력의 괴롭힘에 늘 시달려야 했다. 국가정보원과 일본 극우세력이 유착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역사를 왜곡하는데 앞장섰다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그럴 때마다 윤 의원은 의연하게 싸워왔지만, 최근 겪었던 공격은 견디기가 힘들 정도로 가혹했다고 한다.
“제가 사실은 30년 동안 거리에서 굉장히 담대하게 싸워온 사람이에요. 일본 우익들의 공격을 받아도, 바로 눈앞에서 일본 우익들이 막 욕을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거든요. 내가 운동을 하면 받을 수밖에 없는 공격이라고 생각했어요. 오히려 우리의 운동이 일본 우익에게 방해가 되고, 그만큼 중요하다는 걸 평가할 수 있는 지점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2년 8개월 동안 한국사회로부터 받은 그 공격은 목적이 대체 뭔지 처음에 잘 보이지 않았어요. 그래서 더 견디기 힘들었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도 몰랐어요.”
‘의혹이 불거지던 초기에 더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대응했더라면 나아질 수 있지 않았겠나’라는 질문에 윤 의원은 고개를 저였다. “아니요. 사실은 그때 일부 언론과 인터뷰도 하고 대응을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 인터뷰 내용을 가지고 또 일파만파로 논란이 커지니까 대응을 더 할 수가 없었어요.”
윤 의원은 자신을 이해해줄 거라고 믿었던 진보언론마저도 악의적으로 기사를 내는 것을 보면서, 더이상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 갇히게 됐다. “정의연 후원금으로 딸을 유학 보냈다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얼토당토않은 보도가 나온 적이 있어요. 그러자 저와 친했던 진보매체의 모 기자가 연락이 와서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딸 유학비가 언론에 보도된 만큼 많이 들지 않았다고 구체적으로 답해줬어요. 그런데 그걸 그대로 기사로 써서 내보내더라고요.” 자신의 해명이 의혹의 근거로 갑자기 바뀌어 언론에 보도가 됐던 것이다. 하지만 딸 유학비와 관련된 의혹은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무혐의 처분을 받은 것이다.
1심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안성힐링센터 관련 혐의도 언론보도로 시작된 것이었다. 윤 의원은 “그 보도가 나왔을 때 충격이 컸다. 사실 너무 무서웠다”고 회상했다.
“안성힐링센터 부지를 시가보다 비싸게 샀다면서 뭔가 뒷거래가 있을 것이라는 보도였어요. 그때는 배임 의혹을 제기한 게 아니었어요. 검찰이 주변 사람들을 소환해 물었던 것도 ‘윤미향에게 리베이트를 안 줬냐’는 거였어요. 그런 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거든요. 오래된 역사를 가진 단체이고, 이사회가 있고 운영위원회가 있고 재정 담당 기구가 있는데 어떻게 제가 현금을 들고 뒷거래를 할 수가 있겠어요? 하지만 이미 시끄럽게 떠들었으니 검찰 입장에선 뭐라도 잡아 기소를 해야 하니까 엉뚱하게 배임 혐의로 기소를 한 거예요. 그런데 부지를 시세보다 비싸게 산 건 배임이고, 싸게 판 건 무혐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부지를 판 건 제가 대표를 그만 둔 다음에 벌어진 일이거든요. 그것도 웃기지 않나요?”
일방적인 언론보도에 윤 의원은 점점 무력해졌다. “그때 진보언론만이 아니라 진보인사, 진보단체도 다 의심했어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도 그렇고 다 그랬어요. 그들이 SNS에 내뱉는 말들이 다 보였어요. 그때는 너무 힘겨웠습니다. 그래서 제가 포기했죠. 내가 뭐라고 해도 소용이 없구나. 그러니까 제가 대응을 안 한 게 아니에요. 제가 대응을 못하게 만들었던 거죠. 제가 대응을 하더라도 그걸 제대로 썼을까요? 이미 기사의 흐름은 다 정해져 있었잖아요. 윤미향은 보조금도 먹고, 아버지를 안성힐링센터에 앉혀 놓고 돈을 받아먹고, 후원금으로 딸을 유학 보낸 파렴치한이 되어 있었잖아요.”
‘동지’ 손영미 소장의 죽음, 그리고 자책
윤 의원은 자신이 기소되기 전 사무실과 집 앞에 진을 치고 앉아 불빛이 번쩍이는 카메라를 들이대던 취재진의 모습이 아직도 트라우마처럼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잊으려고 해도 유튜브 알고리즘이 그날로 다시 그를 이끌었다. 윤 의원이 말했다. “우리는 최루탄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최루탄 쏘는 소리에 트라우마가 좀 있거든요. 저를 향해 터지는 카메라 셔터소리, 그리고 커다란 렌즈가 저한테는 총구같이 느껴졌어요. 무서움과 두려움이 느껴졌어요. 지금도 그런 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와요.”
그때 윤 의원은 피신해있었다. 한동안 집에도 가지 못했다. 그런 그를 걱정해주던 사람이 ‘평화의 우리집’ 손영미 소장이었다. 손 소장은 2004년부터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쉼터인 ‘평화의 우리집’ 일을 도맡으며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해 온 인물이다. 윤 의원에겐 ‘오랜 동지’였다. 하지만 손 소장은 윤 의원과 정의연을 둘러싼 검찰의 마녀사냥식 수사와 언론의 무분별한 의혹 제기에 고통스러워하다 2020년 6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윤 의원이 힘겹게 고인을 다시 머릿속에 떠올렸다. “아팠던 손 소장님이 오히려 나를 걱정했어요. 내가 그렇게 사느라 우리 손 소장님이 힘들었던 걸 사실 못 본 거죠. 손 소장님이 돌아가셨을 때, 비로소 제가 정신을 좀 차렸어요.”
윤 의원은 손 소장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날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2020년 6월 6일 토요일이었다. ‘피신처’에 있다가 집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미국에서 잠시 돌아온 딸, 그리고 남편과 함께 식탁에 둘러 앉아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으로 페이스북을 열었는데 더불어민주당 이탄희 의원이 공황장애로 휴직을 한다는 글이 올라와 있었다. 이를 보고 윤 의원은 ‘나도 공황장애구나’라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침대에 물이 흥건하게 있었다고 했는데, 저와 너무나 똑같았어요. 그럼 우리 (손영미) 소장님은 어떨까, 소장님도 마찬가지인가 싶어서 전화를 했어요. 그게 아마 아침 10시 10분 정도였던 거 같아요. 그때 왜 그렇게 전화를 하고 싶었는지...사람이 그럴 때가 있나 봐요. 그때 소장님이 굉장히 힘들어 했었어요. 막 사람들을 보면 안아달라고 그러고 무섭다고 그랬어요. 저한테 ‘카메라가 총구 같다’고 말할 때였거든요. 그래서 제가 전화를 해서 ‘소장님 우리 잘 버팁시다. 우리 둘이 가기로 했던 오로라 여행 나중에 진짜 갑시다’라고 했어요. 그런데 소장님은 ‘너무 버티기가 힘들다’고 했어요. 당시 소장님이 운전 중이셨나봐요. 나중에 다시 전화를 걸겠다고 해서 알겠다고 하고 끊었어요. 그리고 한참 있다가 다시 전화가 왔어요. 주차를 했다고요. 소장님이 ‘저 조금만 울다가 들어갈게요. 좀 울고 나면 시원할 거 같아요.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러세요. 제 치료 방법도 우는 거예요’라고 답해줬죠.”
그게 윤 의원과 손 소장의 마지막 대화였다. 오후 3시쯤 손 소장이 ‘평화의 우리집’에 오지 않았다는 전화가 왔고, 오후 5시쯤 손 소장이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전화가 왔다. 그때부터 윤 의원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가 넘어간 저녁에 비보가 들려왔다. 손 소장이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는 소식이었다. “‘그분이 가셨습니다’라고 문자가 왔어요.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다는 걸 알게 되고나서 그냥 정신이 나가버렸죠. ‘나 때문인가’ 하는 자책감이 들었어요. 오히려 내가 그 길을 먼저 떠났다면 우리 소장님은 살 수 있었을 텐데...그런 생각이 들었죠.”
그때도 윤 의원을 향한 마녀사냥은 멈추지 않았다. “‘윤미향이 죽인 거다’, ‘윤미향이 배후에 있다’는 글들 계속 봐야 했어요.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심지어 그날조차도 기자들이 저를 찍으러 왔거든요. 제가 그전까지는 그걸 그냥 당했는데, 처음으로 기자들을 정면으로 보고 ‘나 죽는 거 찍으러 왔냐’고 했어요. 집에 들어와서 ‘내가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지?’ 하는 생각을 했죠.”
윤 의원은 주변에서 ‘이제 그만두면 안 되냐’는 말을 할 때마다 “제가 지금 그만두면 저들의 논리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힘들지만 제가 그만둘 수 없다. 그리고 할머니들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제가 이 일을 계속해야 한다”고 답하며 버텨왔다. 하지만 뒤를 돌아서면 ‘내가 버티면 또 다른 누군가 희생이 되지 않을까’라는 걱정하는 마음이 다시 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수없이 갈등을 했던 윤 의원은 가족이 없었다면 아마 버티지 못했을 것이라고 털어놨다. ‘김복동 할머니 생각도 많이 났을 거 같다’는 말에 윤 의원은 “제가 지금 살아있는 이유”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자 여성인권평화운동가였던 김 할머니는 2019년 1월 별세했다. 정의연 사태가 터지기 불과 1년여 전이었다.
“김복동 할머니는 14살에 끌려가서 22살 때 집으로 돌아와요. 그 뒤로 손가락질을 당하면서 살다가 1992년에 저를 만나 ‘함께 싸웁시다’ 해서 운동을 시작했죠. 그렇게 ‘평생 동지’가 됐어요. 그리고 할머니는 늘 당신이 저와 남편을 ‘중매’ 했다고 생각했어요. 남편이 감옥을 간 것도 우리가 운동을 하다가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제 딸도 그냥 딸로 안 봤어요. 할머니는 늘 ‘나에게 참 아픈 손녀다’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우리 딸이 대학에 들어갈 때도 등록금 낼 때 보태라며 용돈을 쥐어주시기도 하고요. 그렇기에 저와 남편, 딸에게 김복동 할머니는 친할머니 같은 관계를 넘어서서 굉장히 소중하고 멋진 분이세요. 그런 삶을 살아온 분을 두고서, 제가 이까짓 공격을 받고 나약한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거였죠.”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진실, ‘우리 참 열심히 살았구나’
윤 의원은 1심 재판을 준비하면서 지난 30년간 벌여온 활동 내역을 다시 하나하나 들여다보게 됐다고 밝혔다. 공소시효로 인해 최근 10년간 활동에 대해서만 기소가 됐지만, 그 혐의를 소명하기 위해서는 정대협부터 정의연까지 이어진 모든 활동을 다시 돌아봐야 했던 것이다. 다행히도 혐의를 반박할 증빙 자료가 많이 남아 있었다. 윤 의원은 “이번에 하나하나 다시 보면서 우리가 부족했던 점을 확인하고 성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힘들게 활동하면서도 기록을 참 열심히 했구나를 확인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이번에 새롭게 깨달았던 건 기록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거였어요. 다른 기관들은 보통 규정상 회계 장부도 5년이 지난 건 다 폐기할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딱 한 번 정도를 제외하고는 30년 기록이 다 남아 있었어요. 할머니들 지장을 찍어서 지원금을 받아간 것까지 다 보관하고 있었거든요. 1992년에 모금해서 할머니들께 250만원씩 나눠드린 영수증도 남아있고, 1997년에 할머니들 계좌로 입금한 자료까지 다 가지고 있었어요. 심지어 미국에 살고 계시던 피해자에게도 돈을 보낸 송금증까지 다 남아 있었어요. 그게 다 역사라고 생각해서 보관해뒀던 거예요.”
뿐만 아니라 활동 내역도 꼼꼼하게 기록해뒀다. “제가 주간 소식도 일일이 다 써서 보냈거든요. 이번 주에는 누가 후원회원이 됐다는 것부터 오늘은 누구를 방문했다는 것까지 길게 썼더라고요. 그게 재판 과정에서 증거 자료로 많이 활용됐어요. 그리고 우리는 활동 일지도 꼭 정리했어요. 사실 꼼꼼히 썼다고 하더라도 다시 보니까 빠진 것도 많더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무자들이 정성을 들여 기록을 하고 있었어요. 돌아가신 손영미 소장님도 쉼터에 계신 할머니들에 대한 기록을 빼곡히 써놨더라고요. 그런 걸 보면서 실무자들이 이런 기록도 굉장히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구나, 나중에 역사가 된다는 걸 알고 있었구나 생각이 들어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러면서도 실무자가 4명밖에 없던 탓에 회계자료상 미숙한 부분들이 있었던 것도 다시 보게 되고, 실수했던 것들도 다시 보게 됐습니다.”
일각에선 정의연 사태를 두고 “정대협은 사실상 윤미향 1인이 이끌어온 체제였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왔다. 각종 의혹이 윤 의원이 정보를 독점한 채 사실상 주먹구구식으로 단체를 운영해온 결과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윤 의원은 황당해했다. “윤미향 1인 조직이라고요? 우리도 이번에 재판 증빙 자료를 찾으면서 그동안 정말 민주적으로 일을 했구나를 새삼 깨달았어요. 회의를 열심히 했는데, 그 회의에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했거든요. 정의연의 이사만 30명이 넘었어요. 한 기관에 이사를 30명이나 둔 곳은 거의 없어요. 그렇게 한다는 건 결정을 하지 않고 토론만 하겠다는 얘기나 마찬가지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렇게 했던 이유는 수많은 단체들의 의견을 모아 함께 운동을 해나가기 위해서였어요. 다름을 조정해가면서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바로 평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윤 의원은 “우리를 보면 ‘수요시위만 했겠지’라고 많이 생각할 텐데, 돌아보면 다양한 일들을 굉장히 열심히 해왔더라”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한 달에 한 번씩 피해자들 집에 직접 방문하고, 세계를 돌며 연대 조직을 만들고, 곳곳에 소녀상을 세우고, ‘위안부’ 문제 해법을 연구하고, 한국과 일본 전문가들로 법률전문위원회를 구성하기도 했다. 그렇게 30년을 한결같이 활동한 결과 수요시위도 남녀노소 구분 없이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는 대중적인 운동으로 점차 커져 나갔다. ‘윤미향 1인 조직’이라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1심 무죄에 안도의 한숨 “김복동·길원옥 할머니 명예회복 다행”
1심 법원은 윤 의원에게 벌금형 1천500만 원을 선고했다. 윤 의원은 업무상 횡령죄를 제외한 나머지 7개 혐의에 대해서는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업무상 횡령죄도 애초 검찰이 기소한 1억원 가운데, 5분의 1도 되지 않는 1천700만원가량만 인정됐다. 이마저도 윤 의원은 “횡령하지 않았다”며 항소를 통해 모두 무죄 선고를 받아내겠다는 입장이다.
윤 의원은 무엇보다 김복동 할머니의 ‘단짝’인 길원옥 할머니에 관한 자신의 혐의가 무죄로 판결이 내려진 데 대해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선고 공판 도중 그가 눈물을 훔친 대목도 김 할머니에 관한 부분이었다. 검찰은 길 할머니가 2017년 11월경 길 할머니가 여성인권상으로 받은 1억원 상금의 절반을 정의연에 기부한 행위 등이 길 할머니의 심신장애를 이용한 윤 의원의 강요에 의한 것이라며 준사기 혐의로 기소했다.
“특히 길원옥 할머니에 대한 부분이 걱정이 많이 됐어요. 제 사건으로 인해 정말 존경스럽게 운동을 하셨던 길원옥 할머니가 치매에 의해서 윤미향에게 끌려다닌 할머니, 아무 인식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시킨대로 인터뷰를 하고, 기부를 한 할머니가 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었어요. 할머니가 당신의 명예와 존엄을 회복하기 위해서 힘겹게 노력하셨던 삶이 수포로 돌아가면 어쩌지 하는 걱정, 그로 인한 고통이 저한테 굉장히 깊었어요. 게다가 검찰은 윤미향뿐만 아니라 손영미도 공모했다고 봤기 때문에 더 고통이 컸죠. 길원옥 할머니는 손영미 소장님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준 천사 같은 사람’이라고 늘 말씀하셨어요. 제가 보기에도 그분은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싶었어요. 할머니가 아침에 일어나시면 깨끗이 목욕을 해드리고, 그리고 나서 할머니에게 뽀뽀를 해요.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할머니들을 모신 분이 소장님이세요. 그런 분에게 치매에 걸린 할머니의 돈을 갈취했다는 프레임을 씌우다니요.”
윤 의원은 개인 계좌를 통해 김복동 할머니 장례비를 모집했다가 기부금품의 모집 및 사용에 관한 법률을 위반한 혐의로도 기소됐는데, 이 역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재판부는 그 선고 과정에서 “김복동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자 살아생전 여성인권가로서 ‘위안부’ 문제 해결과 재일조선학교, 남북통일 위한 다양한 활동을 했다”고 설명했다.
윤 의원은 이처럼 재판부가 김복동 할머니에 대해 제대로 된 평가를 내려준 부분이 특히 가슴에 와 닿았다고 밝혔다. “심지어 앞이 잘 안 보이는 김복동 할머니를 제가 여기저기 끌고 다녔다는 얘기도 있었어요. 그건 김복동 할머니에 대한 엄청난 공격이었어요. 아마 할머니가 살아계셨다면 그건 용납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건 당신의 평생을, 당신의 자존감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일이기 때문이에요. 다행히 재판부에서 김복동 할머니를 여성인권 운동가이자 남북평화 운동가라고 얘기해주었어요. 그 순간 김복동 할머니가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이 살포시 떠오르더라고요. 김복동 할머니, 길원옥 할머니가 판결문에서 고귀한 존재로, 우리보다 훨씬 멋진 운동가로 자리매김이 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선고 직후 이재명 대표의 사과, “서운함 싹 잊었다”
대부분 무죄 판결이 났지만, 극우세력은 아랑곳하지 않고 윤 의원을 계속 공격했다. 1심 선고 직후 법원 앞에는 취재진뿐만 아니라 극우 유튜버들도 몰려와 있었다. 유튜버들은 윤 의원을 향해 혐오 발언을 쏟아냈다. 윤 의원이 웃고 있는 모습이 취재진 카메라에 포착된 건 이 순간이었다.
“재판이 끝난 뒤 주변에서 저보고 왜 웃었냐고 묻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웃으려고 웃은 게 아니었어요. 취재진이 갑자기 몰려와 저한테 뭔가를 들이댔고, 그 왼쪽에선 덩치가 아주 큰 유튜버가 ‘윤미향 죽여라’라고 큰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어요. 그래서 ‘어이없다’는 웃음이었어요. 사실은 굉장히 아픈 웃음이었습니다.”
윤 의원은 오히려 “너무 허탈했다”고 밝혔다. “지나간 2년 8개월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어요. 저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가족이 다 그랬던 것 같아요. 그냥 주말 내내 멍하게 있었어요. 참 희한하죠? 뭔가 기쁘고 그래야 할 거 같은데 그러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땐 의원실 차원에서 논평 하나만 내고 저는 한마디도 못 했어요. 적어도 일주일 간은 먼저 가신 분들에 대해 추모하는 마음으로 겸허하게 지내자, 그리고 저로 인해 고통을 겪었던 활동가들에 대해 미안한 마음으로 지내자는 심정으로 있었습니다.”
침묵을 지키는 동안 향후 활동에 대한 고민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판결이 그렇게 났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똑같은 인식을 가지고 있잖아요? 언론과 방송이 그만큼 보도를 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날 집에서 멍하게 있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어떻게 하면 전국 방방곡곡에 퍼져 있는 윤미향이 악마화된 인식들을 바꿀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윤미향이 얼마 남지 않은 국회의원 임기 내에 할머니들과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다시 윤미향이 새롭게 활동을 시작할 수 있을까?”
그러는 동안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윤 의원을 향한 사과의 글을 올렸다. 이 대표는 “인생을 통째로 부정당하고 악마가 된 그는 얼마나 억울했을까. 검찰과 가짜뉴스에 똑같이 당하는 저조차 의심했으니”라며 “미안하다. 잘못했다. 다시 정신 바짝 차리겠다”고 밝혔다. 윤 의원은 “저에겐 만병통치약이었다. 지난 서운함을 싹 잊게 만들었다”며 이 대표의 사과를 반겼다. 윤 의원은 “무언가를 따지거나 저울질 하지 않고 저한테 즉각적으로 미안하다고 한 게 바로 이 대표의 마음이자 삶의 자세인 것 같다”며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당을 책임지는 대표로서 저렇게 해도 괜찮을까?’라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고 말했다.
반면 검찰은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검찰은 1심에서 무죄 판결이 난 부분에 대해선 사실오인과 법리오해를 이유로, 유죄 판결이 난 부분에 대해서는 “양형이 지나치게 가볍다”는 이유로 항소했다. 이에 대해 윤 의원은 “검찰은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며 “다만 안타까운 건 저와 함께 기소돼 완전 무죄를 받은 동료는 검찰의 항소로 인해 여전히 자유를 얻지 못하고 똑같은 절차를 다시 밟아야 한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윤 의원은 최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반드시 공권력을 동원해서 정의로운 결과를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윤 의원의 1심 판결을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한 데 대해서는 “정말 무서운 정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그는 “판사의 판결에 대해서 무슨 공권력을 동원하겠다는 것인가. 문제가 있어 보인다”고 비판하는 한편, “항소심도 만만치는 않을 것 같다”고 우려했다.
윤 의원은 일부 유죄가 나온 부분에 대해서는 항소심에서 마저 다투겠다는 입장이다. “증빙 자료가 남아있거나 공적으로 분명히 사용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유죄로 판결이 난 부분이 있어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판단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회의비라든지, 사무실 간식비라든지, 수요시위 끝난 뒤 할머니들과 한 식사비라든지, 이런 게 사진이나 SNS 활동으로 확인된 것은 무죄로 판단됐는데, 사진이 없는 경우에는 유죄로 된 부분이 있어요. 그래서 입증할 수 있는 자료들을 좀 더 열심히 충분히 찾고, 어떻게 대응할지도 논의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