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을 후끈 달군 정순신 사태, 독자 여러분들도 전말을 잘 알고 계실 거라 믿으니 이 사태에 대한 요약은 생략하겠다. 내가 이 사태에 관한 여러 기사를 읽으면서 제일 빡쳤던 부분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그 악랄한 학교폭력 가해자 정순신의 아들 정 모 군이 서울대에 입학했다는 사실.
둘째는 학폭위 조사에서 정순신 부부가 “물리적으로 때린 것이 있으면 더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겠지만, 언어적 폭력이니 맥락이 중요한 것 같다”고 변명한 대목이다. 주먹으로 때린 게 아니라 말로 욕한 것이니 괜찮지 않냐는 이야기렷다?
그렇다면 나도 정순신 가족에게 주먹을 휘두르지 않고 말로만 씹어줄 테니 아주 괜찮아하기를 바란다. 야 이 삐리리한 삐리리들아. 어디서 삐리리같은 삐리리 소리를 씨불이고 자빠졌냐? 삐리리도 못한 것들이 삐리리가 삐리리로 보이냐? 진짜 기분이 삐리리해서 너네 만나면 삐리리하게 삐리리해버리고 싶다. 하여간 삐리리도 아닌 것들이 말만 삐리리하게 처하고 자빠졌어, 이 삐리리들아.
부와 기득권의 상징이 된 서울대
나는 2년 전 3월 이 칼럼을 통해 서울대 해체를 주장한 바 있다.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막대한 기득권까지 손에 쥔 서울대가 더 이상 이 나라 공동체의 협업을 위해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나는 서울대를 해체해야 한다는 나의 신념이 돌처럼 단단히 굳어졌다. 서울대가 왜 이 따위 인성을 가진 자를 받아들였냐는 이야기가 아니다. 세상은 넓고 또라이는 많다. 잘 뒤져보면 정순신 같은 자도 있고, 그 아들 같은 놈도 있기 마련이다. 그런 이들이 대학에 입학하는 것까지 걸러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잘 안다.
내가 정말 뚜껑이 열리는 대목은 서울대라는 엄청난 기득권이 이 악랄한 인성을 가진 자들 사이에서 세습된다는 점이다. 마치 재벌들이 권력을 세습하듯, 서울대를 나온 정순신의 서울대 권력은 그 아들에게 고스란히 세습됐다.
부전자전이라고 서울대 동창인 이 부자들이 지껄인 기록들을 보라. 자식은 피해 학생에게 “좌파 빨갱이”, “제주도에서 온 돼지”라고 폭언을 했다. 또 평소 친구들에게는 당시 고위 검사였던 정순신에 대해 “아빠는 아는 사람이 많다” “판사랑 친하면 재판에서 무조건 승소한다”고 자랑했단다.
그 아비인 정순신은 학폭위 조사에서 “물리적으로 때린 것이 있으면 더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겠지만, 언어적 폭력이니 맥락이 중요한 것 같다”고 했단다. 게다가 혹시 아들의 대학 진학에 누가 될까봐, 머리 조아려 백배사죄해야 할 일을 대법원 상고심까지 끌고 갔단다. 이런 삐리리한 부자를 보겠나? 아빠 삐리리가 자식 삐리리를 낳았는데, 그 아빠 삐리리가 자식 삐리리를 서울대 보내겠다고 삐리리 짓을 한 셈이다. 진짜 세상 참 삐리리하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서울대를 해체해야 한다고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높인다. 서울대는 더 이상 이 나라의 협력적 공동체에 전혀 기여하지 않는다. 서울대 권력은 그냥 기득권의 상징이 돼버렸다. 게다가 그 기득권은 세습이 된다.
정순신 저작권:경찰청
나는 가끔 노동조합 강연 등에서 노동자들을 만나면 이런 이야기를 한다. 우리를 왜 노동자 ‘계급’이라고 부르는가? 계급은 세습되기 때문에 계급인 것이다. 우리가 노동자면 우리 자식들도 별 이변이 없는 한 노동자로 살아야 한다. 우리 손주들도 마찬가지다.
서울대 권력을 휘어잡은 삐리리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서울대 권력을 중심으로 뭉쳐진 하나의 계급이다. 왜냐고? 그 계급이 세습되기 때문이다. 정순신이 서울대를 나왔으면 그 삐리리한 아들도 서울대를 나온다. 이 악순환을 언제까지 두고 봐야 하나? 이 괴물 같은 거대권력을 이제는 해체할 때가 됐다는 이야기다.
마시멜로 테스트의 진짜 결론
한 가지 이야기를 덧붙여보자. 마시멜로 테스트라는 유명한 심리학 실험이 있다. 1966년 스탠퍼드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월터 미셸(Walter Mischel)이 실시한 실험으로 3살짜리 아이들에게 달콤한 마시멜로를 하나 쥐어준 뒤 “15분만 참으면 하나 더 줄게”라고 유혹을 했다는 게 실험의 요지다.
그깟 15분, 성인이면 다 참는다. 그런데 3살짜리 아이들 중에는 못 참는 아이가 꼭 나온다. 미셸 교수는 이 실험으로 인내심이 있는 아이들과 없는 아이들을 구분한 뒤, 이 아이들이 성인이 된 후 어떤 삶을 사는지 추적했다.
그 결과 인내심이 있었던 아이들이 대학수학능력시험(SAT)에서 훨씬 높은 점수를 받았고 훨씬 더 성공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 실험의 결론이다. 쉽게 말하면 “성공하고 싶으면 참고 노력하라”는 뻔한 이야기다.
내가 이 뻔한 실험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2018년 6월 영국 사회과학 학술지 <세이지 저널(SAGE journals)>에 이 실험의 결론을 완전히 뒤집는 새로운 연구가 소개됐기 때문이다. 뉴욕 대학교와 UC어바인 대학교 심리학과 연구팀은 3살짜리 아이의 표본을 900명으로 늘린 뒤 미셸과 똑같은 마시멜로 테스를 진행했고 이후 그들의 삶을 추적했다.
그런데 이 연구 결과 아이들의 인내심은 이들이 성인이 됐을 때 성공 여부와 그 어떤 통계적 연관성도 찾을 수 없었다. 아무리 참고 노력해도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그 아이들의 성공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요소가 무엇이었을까? 이 대목이 중요하다. 그 요소는 바로 부모의 사회적 경제적 능력, 즉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는 운이었다는 이야기다.
내가 정순신의 삐리리한 아들이 이 사회에서 여전히 성공가도를 달릴까봐 정녕 두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저 난장을 치고도 저 삐리리는 명문대 졸업장을 달 것이고(이건 순전히 아빠 삐리리가 정순신이었기 때문에 생긴 운빨이다), 아빠 삐리리의 도움으로 로스쿨 같은 곳에 가서 변호사가 될 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전히 세상에 불만이 없는 돈 많은 우파들이나 모집하며(실제 정순신 아들이 SNS에서 했던 것으로 알려진 행동이다) 그렇게 잘 살아갈 것이다.
이 세상이 옳은가? 정말로 웃음, 아니 울음밖에 나오지 않는 삐리리한 세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무리 도덕이 땅바닥에 떨어졌기로서니 이런 삐리리까지 잘 먹고 잘 사는 꼴을 우리가 봐서야 되겠는가?
나는 정순신이라는 삐리리의 이름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며, 그 삐리리한 아들의 이름(알고도 이 칼럼에서 안 쓴 것이다)도 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많지 않지만, 이 정신머리 없는 부자의 과도한 만행만큼은 대한민국 역사가 반드시 막아주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