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2021년 4월 12일(현지 시간) 백악관에서 개최한 반도체 화상회의에서 반도체 웨이퍼를 들어 보이며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AP
미국의 반도체 투자 보조금이 한국 기업의 최대 고민거리가 됐다. 보조금을 신청하자니 조건이 너무 까다롭다. 중국 공장 운영 타격에 더해 기밀 유출까지 우려된다. 보조금을 신청하지 않으면 미국의 보복 가능성이 있다. 전문가들은 보조금 신청이 불가피할 경우에 대비해 정부가 미국과의 협의에 적극 나서 조건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6일 업계에 따르면, 미국 상무부는 지난달 28일 미국 반도체지원법(CHIPS Act)상 인센티브 프로그램 중 반도체 제조시설에 대한 재정지원 세부 계획을 공고했다.
반도체지원법은 지난해 8월 발효된 법으로, 반도체 산업에 관한 재정지원 527억달러(68조 6천억원)와 투자세액공제 25% 등을 규정한 내용이다.
이번에 발표된 내용은 시설투자 중 제조시설에 대한 재정지원 계획으로, 소재·장비와 연구개발(R&D) 관련 재정지원 계획은 추후 발표될 예정이다.
제조시설에 대한 재정지원은 설비투자액의 5~15% 수준이다. 현재 삼성전자는 텍사스주 테일러에 170억달러(약 22조원) 규모의 파운드리(위탁생산) 공장을 짓고 있다. 삼성전자가 받을 수 있는 보조금은 최대 25억 5천만달러(3조 3천억원) 규모다. SK하이닉스는 미국 내 반도체 R&D 협력과 패키징 제조 시설에 150억달러(19조 5천억원)를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지난해 7월 밝힌 바 있다. 일정과 부지 등 구체적인 계획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당초 밝힌 규모만큼 투자가 이뤄지면 보조금은 최대 22억 5천만달러(2조 9천억원)가 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보조금 신청을 고심하고 있다. 미국이 제시한 조건이 만만치 않아, 유불리 계산이 복잡해졌다.
가장 우려되는 조항은 중국에 대한 견제다. 미국의 국가 보안 가드레일 조항에 따르면, 보조금을 받는 기업은 중국 등 우려대상국 기업과 공동 연구, 기술 라이선스 계약이 금지된다. 향후 10년간 반도체 제조 능력 확장과 관련된 거래도 제한된다. 앞서 반도체지원법 발효 당시 포함된 내용을 재확인한 것이다.
또한 미국은 지난해 10월, 중국에서 반도체를 생산하는 기업에 미국산 반도체 장비를 수출하지 못하도록 수출통제 조치를 발표하면서 1년 유예를 허용한 바 있다.
한국 기업은 중국 현지 공장에 대한 신증설과 장비 교체가 막히게 되는 상황에 처했다. 장비를 교체하지 못하면 경쟁사 대비 집적도 등 성능이 떨어져 시장에서 도태된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 공장에서 자사 낸드플래시의 40%를, SK하이닉스는 우시 공장에서 D램의 45% 이상을 생산한다. SK하이닉스는 2020년 인텔로부터 90억달러(11조 7천억원)에 인수한 다롄 낸드플래시 공장도 운영하고 있다.
메리츠증권은 최근 보고서에서 “포괄적 범위의 재투자는 미국으로 철저히 제한하면서 최대 수요처인 중국에서의 추가 투자는 금지할 가능성이 높아, 이미 중국 내 생산시설을 가동 중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관련 업체 경우 가동 유지와 출구 전략까지 고심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가드레일 관련 세부조항은 아직 발표되지 않았다. 신증설과 장비 교체뿐 아니라, 현재 운영 중인 공장 가동마저 제한이 걸릴 가능성도 제기된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미국은 한국 기업의 중국 현지 공장을 중국 기업의 기술 수준에 맞춰서 규제하려고 할 것”이라며 “중국 메모리 반도체 기술 수준이 낮아, 이미 한국 기업은 그 수준을 뛰어넘는 제품을 중국에서 생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중국 수준에 맞춰서 규제가 이뤄지면, 현재 한국 기업이 생산하는 제품도 위태로워진다”고 말했다.
정보 유출 가능성도 쟁점이다. 미국이 내놓은 지침에는 기업의 상업적 타당성과 재무상태, 투자이행 역량을 확인하기 위한 자료 제출 조건이 담겼다. 제출 자료로는 생산 제품의 수요·공급 전망을 포함한 현금 흐름 계획을 비롯해, 수익률과 수익성 지표, 공장 운영 계획 등이 제시됐다. 미국 상무부는 “보조금 신청 기업의 약속이 유지되고 프로그램 목표가 달성됐는지 면밀히 모니터링할 수 있도록 정기적인 보고를 요구할 것”이라며 “최소 반기마다 재무 및 프로그램 보고서를 받아 성과를 평가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이 요구한 자료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로서 경쟁사에 넘어가서는 안 될 영업기밀에 해당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게 반도체 공정 수율과 마진율 등이다.
메리츠증권은 “재정 지원을 받기 위해 제조 시설의 세부사항과 기술 역량이 공개될 가능성이 높다”며 “반도체 생산 공정은 제조기업의 극비 사항으로 메모리 반도체에 있어서는 원가경쟁력, 로직반도체에 있어서는 성능경쟁력과 직결되는 부분”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경쟁사와의 공정 격차가 중요한 반도체 산업에 있어 정보 공개는 치명적일 수 있다”고 했다.
미국 반도체지원법(CHIPS Act) ⓒ미국 상무부
‘중국 고립’ 의도 보조금, 거절 시 보복 우려도…“정부, 조건 최소화 끌어내야”
이번 발표 내용에는 세계 주요 반도체 기업을 미국의 통제하에 둬, 미국 중심의 공급망을 구축할 뿐 아니라 미국의 경제 성장 동력으로 활용하겠다는 의지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미국은 인재 양성 계획을 요구했다. 보조금을 받으려면 공장 건설 지역 내 고등학교, 2년제 전문대와 협력 프로그램을 마련해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 유색인종, 참전 용사, 여성 고용에 대한 계획도 심사 기준에 포함했다. 보조금을 1억 5천만달러(2천억원) 이상 받는 기업은 노동자 자녀를 위한 보육 서비스도 제공해야 한다.
‘지역 경제 발전’과 ‘포용적 경제 성장 촉진’ 계획도 평가 대상이다. 미국 내 R&D 시설 건설 등 향후 투자 계획을 내야 하고, 철강 등 건축 자재도 미국 생산 제품을 써야 한다. 또한, 100% 재생에너지로 공장을 가동해야 한다.
납세자 보호 카테고리에는 초과이익공유(Upside sharing) 조항이 들어갔다. 보조금 1억 5천만달러 이상 기업은 당초 예상치를 초과한 수익의 일부를 미국 정부와 공유해야 한다. 미국 상무부는 “초과이익공유 조건은 사례별로 설정되며, 기업이 재무 예측을 최대한 정확하게 하도록 장려할 것”이라고 밝혔다.
보조금을 배당이나 자사주 매입 등 주주환원에 사용하는 것도 제한된다. 기업은 향후 5년간의 자사주 매입 계획을 제출해야 한다. 기업이 벌어들인 돈을 미국 내 R&D 시설 설립 등 재투자에 쓰라는 의미다.
문제는 보조금을 신청하지 않는 선택도 쉽지 않다는 점이다. 미국의 반도체지원법에는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겠다는 의도가 담겼다. 한국 기업이 보조금을 신청하지 않으면, 미·중 기술 패권 경쟁에서 미국에 등을 돌리는 의사로 풀이될 여지가 있다. 이 경우 미국의 보복이 우려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가령 한국 기업에 대한 첨단 장비 공급을 제한하는 방안이 있다. 네덜란드 ASML은 미국의 압박으로 2019년부터 SMIC 등 중국 기업에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를 수출하지 못하고 있다. ASML 장비에는 미국 기술이 적용되는데, 해당 장비가 중국에 넘어가 군사용으로 활용되면 미국 안보에 위협이 될 것이라는 게 미국의 명분이다. ASML이 독점 생산하는 EUV 장비는 고성능 선단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이다. 미국이 한국 기업으로의 ASML 수출 길목을 막으면, 한국 기업의 반도체 발전은 큰 타격을 받게 된다.
김 전문연구원은 “ASML 수출 규제는 단적인 예로, 미국의 보복 수단은 다양할 수 있다”며 “미국이 보조금을 내세워 세계 반도체 기업을 부르는 건 대중 패권 경쟁에서 자신들 편에 서라는 것인데, 이를 무시하고 보조금 신청을 안 하는 것 자체가 부담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대응해 미국 반도체지원법 조건을 완화해야 한다는 게 김 전문연구원 주문이다. 그는 “개별 기업이 대응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정부가 미국과의 협의를 통해 가드레일 조항과 정보 제공을 최소화하는 게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산업부는 오는 7일 안덕근 통상교섭본부장이 미국 반도체지원법과 관련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주요 반도체 기업과 면담을 가질 예정인 것으로 전해졌다. 업계 요구사항을 듣고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한 취지다. 앞서 산업부는 지난 1일 “그간 정부는 가드레일 조항 등과 같이 우리 기업 경영에 과도한 부담을 줄 수 있는 사항에 대해 업계와 대응 방안을 논의해, 미국 상무부 등 관계 당국에 입장을 적극 개진해 왔다”며 “가드레일 세부 규정 마련 과정에서 우리 기업 입장이 충분히 반영될 수 있도록 앞으로도 미국 관계 당국과 계속 협의할 예정”이라고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