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에 확산하고 있는 퍼스트리퍼블릭은행 앞 긴 줄. ⓒ출처 : @CitizenFreePres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실버게이트 파산 여파가 확산하고 있다. 뉴욕주에 있는 시그니처은행이 추가로 폐쇄됐고, 샌프란시스코에 본사를 둔 퍼스트 리퍼블릭은행도 뱅크런 위기설이 돌고 있다. 미 금융당국은 ‘보호 수준을 넘는 예금도 지급을 보증하겠다’며 사태 확산 저지에 나섰다.
12일(현지시간) 로이터·블룸버그 등 외신에 따르면 뉴욕주 금융서비스부(DFS)는 이날 뉴욕주 소재 시그니처은행을 인수하고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를 파산관재인으로 임명했다. 폐쇄된 시그니처은행은 뉴욕·코네티컷·캘리포니아·네바다·노스캐롤라이나 등에서 영업하는 상업은행이다. 시그니처은행은 지난주 청산한 실버게이트은행과 함께 디지털자산(가상화폐) 주요 거래 은행으로 꼽혀 왔던 곳으로 알려졌다. 다른 금융기관에 비해 가상화폐 부문 비중이 매우 큰 것으로 전해졌다. 로이터에 따르면 지난해 9월 기준 시그니처은행 예치금의 1/4 정도가 가상화폐 부문에서 나왔다. 지난해 말 기준 시그니처은행 총자산은 1,103억달러(약 146조원) 수준, 예치금은 885억달러(약 117조원) 규모다.
실리콘밸리 인근의 또다른 중소은행 퍼스트리퍼블릭 위기설도 확산하고 있다. 실리콘밸리 업계 한 투자자는 “SVB만큼은 아니지만, 퍼스트 리퍼블릭 은행에도 많은 스타트업과 VC(벤처캐피탈)들이 돈을 예치하고 있다”며 “미 정부가 전체 예금은 보호해준다고 했지만, 문이 열리면 안전한 곳으로 돈을 옮기려고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SNS에는 퍼스트리퍼블릭 은행 지점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사진이 퍼졌다. 퍼스트리퍼블릭측은 유동성이 충분하다는 입장문을 배포했다.
미 금융 당국은 사태 확산 저지에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다. 미 재무부를 비롯한 은행 감독당국은 공동성명을 내고 SVB 예금주들은 보호 대상 한도와 무관하게 전액 지급을 보증하는 한편, 유동성이 부족한 금융기관에게는 자금을 대출하기로 했다.
재무부와 연방준비제도(Fed),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는 공동성명에서 “우리는 은행 체계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강화해 미국 경제를 보호하기 위해 결정적인 행동에 나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모든 예금주는 13일부터 예금을 전액 인출할 수 있게 됐다. 다만 SVB 주주, 담보가 없는 채권자는 보호를 받지 못한다. SVB 고위 경영진은 자리에서 물러났다. 시그니처은행에 대해서도 비슷한 대책을 내놨다.
연준은 은행에 유동성을 지원한다. 새로운 기금(BTFP: Bank Term Funding Program)을 조성한다. 은행이 보유한 미국 국채, 주택저당증권(MBS) 등을 담보로 1년간 자금을 대출하는 기금이다. 연준은 채권 담보 가치를 시장가가 아닌 액면가로 평가하겠다고 밝혔다. 급격한 금리 인상으로 채권 가격이 급락한 것을 감안한 조치로 보인다. 연준은 “새로운 기금은 우량 증권을 담보로 한 추가 유동성을 제공해 금융기관이 압박을 받는 시기에 증권을 서둘러 매각하지 않아도 되게 한다”고 설명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우리시간으로 14일 밤, 금융권 위기 사태와 관련한 대국민 연설에 나선다. 백악관은 성명을 통해 “은행권의 회복탄력성을 어떻게 유지해 우리의 역사적인 경제 회복을 지켜낼지에 대해 내일 아침(현지시간, 13일) 연설하겠다”고 밝혔다.
한국 금융 당국은 국내에 미칠 파장을 주시하고 있다. 한국은행은 이승헌 부총재 주재로 시장 상황 점검 회의를 열었다. 이 부총재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 은행들의 건전성이 개선돼 왔고, 미 금융당국이 예금자 전면 보호조치를 즉각적으로 시행했다며 “현재로서는 SVB, 시그니처은행 폐쇄 등이 은행 등 금융권 전반의 시스템 리스크로 확산할 가능성은 크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고 말했다.
앞서 SVB은행은 여러 위기 요인들이 중첩되며 폐쇄됐다.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한 IT업계가 주요 고객층이었던 SVB는 테크업계 불황으로 예금 수급이 줄어들었다. 최근 몇년간 이어졌던 IT업계 황금기에 은행에 예치금으로 들어왔던 자금은 일부 대출 되긴 했으나, 상당부분 미국 국채에 투자됐다. 최근 기준금리가 급등하며 SVB가 보유한 채권 가치가 급락했다. SVB는 유상증자를 통해 자산을 늘리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자금 조달 실패 소식이 전해지면서 위기설이 확산했고 결국 50조원 규모의 뱅크런이 발생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미 금융당국은 SVB 폐쇄를 결정했다.
10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클라라에 있는 실리콘밸리은행(SVB) 본사. ⓒ제공 : 뉴시스·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