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조선일보, 동아일보, 문화일보의 보도. 민주노총의 “퇴진” 구호가 북의 지령에 따른 것이라는 보도인데, 정작 근거 자료로 사용된 사진은 민주노총과 전혀 무관한 촛불행동 주최의 집회 사진이다. 민주노총은 현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집회를 연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며, 참여한 적도 없다. ⓒ언론보도 캡쳐
집회에서 “윤석열 퇴진” 등 구호를 외치라고 북이 민주노총에 지령을 내렸는 수사당국발 언론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민주노총이 북의 지령에 따라 반정부 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북의 지령에 따른 것이라고 지목된 집회와 구호는 모두 민주노총과 무관한 단체가 주도한 것이었다. 수사당국이 민주노총에 대한 ‘표적 수사’를 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14일 조선일보 등 다수의 보수언론은 국가정보원과 경찰청이 지난 1~2월 복수의 민노총 사무실과 산하 노조 사무실, 관계자 주거지 등에 대한 압수 수색에서 확보한 압수물을 분석한 결과 북의 지령문 등을 확보했다고 보도했다.
해당 보도들에 따르면 북이 지난해 10월 이태원 참사 이후 ‘국민이 죽어간다’, ‘퇴진이 추모다’, ‘이게 나라냐’ 등 반정부 시위 구호를 구체적으로 적어 국보법 위반 혐의를 받고 있는 이들에게 내려보냈다고 한다. 조선일보는 “북한 지령문의 반정부 선동 문구와 국내 단체들이 내건 문구가 일치하는 경우가 상당수인 만큼 민노총(민주노총) 주도의 반정부 시위와 북한 지령과의 관계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으로 안다”는 익명의 ‘정보 당국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보도하기도 했다.
실제 이태원 참사 이후 ‘국민이 죽어간다’, ‘퇴진이 추모다’, ‘이게 나라냐’는 구호가 일부 집회 과정에서 나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 구호가 나온 집회는 모두 촛불행동이란 시민단체가 주최한 것으로, 민주노총과는 무관했다. 해당 보도들에 사용된 자료사진 역시 촛불행동이 주최한 집회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촛불행동은 이태원 참사와는 별개로 “윤석열 퇴진”을 핵심 구호로 내걸고 거의 매주 집회를 열고 있다.
정작 민주노총은 촛불행동 집회에 거리를 두고 활동해왔다. 민주노총은 이태원 참사 때에도 촛불행동 집회에 결합하지 않고 유가족과 함께 따로 추모 집회를 열어 왔다. 이 추모 집회에는 “윤석열 퇴진” 구호가 나오지도 않았으며, “이태원 참사는 국가 책임이다”,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수준의 구호만 터져 나왔다. 이는 민주노총이 주도한 노동자대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수사당국과 보수언론이 근거도 없이 민주노총이 북의 지령을 받아 활동했다고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여당 지도부도 장단을 맞췄다.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는 이날 SNS를 통해 “이 지령문에는 작년 핼러윈 참사 때 ‘시민단체들과 연대해 윤석열 정권 퇴진과 탄핵 분위기를 조성하라’는 구호까지 하달됐고, 민노총은 이를 충실히 집회 현장에서 그대로 외쳤다”며 “우리 당의 모든 당력을 모아 종북 간첩단과의 전쟁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같은 당 주호영 원내대표도 이날 원내대책회의에서 “충격을 금할 수 없다”며 “수사당국은 북한 지령문에 적힌 반정부 구호가 국내 일부 시민단체 투쟁구호, 현수막 문구로 사용된 유통경로 등을 더 철저히 수사해 국내에 있는 종북세력 척결에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민주노총은 대변인 논평을 통해 “소설을 써도 정도껏 써야지”라며 황당해했다.
민주노총은 “보도의 요지는 민주노총이 북의 지령을 받아 이태원 참사 추모집회 등에서 ‘퇴진이 추모다’, ‘패륜 정권 퇴진 ’등의 구호를 외쳤다는 것인데, 관련한 집회 혹은 민주노총의 집회를 직간접적으로 취재라도 했다면 절대 나올 수 없는 기사”라고 지적했다.
민주노총은 “실제 민주노총은 윤석열 정권 퇴진이라는 구호를 걸어본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거론된 이태원 참사 관련 집회도 유가족들과 함께 소위 ‘퇴진 촛불’과는 거리를 두고 별도의 추모 행사와 집회를 진행해 왔고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민주노총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가 있다면 민주노총의 사업과 투쟁은 중층이 논의 구조를 거쳐 결정하고 집행하는 구조인데, ‘윤석열 정권 퇴진’은 조직적으로 논의한 바도, 결정한 바도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라며 “결정한 적이 없으니 집행도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민주노총이 ‘윤석열 퇴진’을 주장하는 피켓이나 선전물이 있으면 제시하기 바란다”고 꼬집었다.
민주노총은 “‘노조법 2·3조 개정’, ‘대우조선 하청노동자 투쟁’을 북의 지령이라고 써대더니, 이젠 아직도 고통 속에 있는 희생자·유가족까지 욕보이는 국정원과 수구언론의 행태는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다”고 질타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