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서울 중구 숭례문 일대에서 열린 '기후재난 이대로 살 수 없다, 924 기후정의행진' 대회에서 참석자들이 기후위기 경고 피켓을 들고 있다. 2022.0924 ⓒ민중의소리
오늘 세계는 위기다. 러시아가 시작한 전쟁은 전세계 경제위기로 번졌을 뿐 아니라, 강대국들의 국방비 증액과 합종연횡이라는 도미노 같은 격랑을 일으키고 있다. 러시아, 미국, 일본, 중국 등 강대국 간의 긴장은 날로 높아진다. 이러다 더 많은 전쟁이 터질 것 같다.
그 와중에도 기후위기는 깊어지고 있다. 작년 11월 7일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제27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자회의 정상회의 연설에서 “회복 불가능한 지옥으로 향하고 있다”고 까지 말했다.
한국이라고 얼마나 다를까. 윤석열 대통령은 왜 대통령이 되려했는지 알 수 없는 무책임한 발언과 편가르기만 반복하는 중이다. 국정의 한축인 더불어민주당은 이재명 지키기에 목을 맨 강성지지층에 휘둘려 허송세월하고 있다.
한국은 믿을 수 없는 경제성장으로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고도, 선진국임을 부정하게 만드는 노동시간, 자살률, 노조조직률, 산재율, 여성 대상 범죄 등으로 앙상한 실체를 드러낸 상태다. 정체성과 가치관의 차이로 인한 사회적 갈등은 갈수록 극심해진다. 0.78명이라는 출생률이 가장 적나라한 자화상이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세상은 온통 공멸을 향해 질주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세상이 망하지 않고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 그 전에 멈춰야 한다. 새로운 길을 찾아내야 한다. 근본적인 변화를 준비하고 시도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예술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상품으로 탄생하고 존재해야 하는 운명을 거부할 수 없는 자본주의 사회의 대중음악은 재난이나 다름없는 현실 속에서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던지고 나누는 중일까.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처럼 복수를 감행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게 만드는 일 말고, 케이팝 뮤지션들의 인기와 높은 판매고를 만들어내는 일 말고 어떤 의미 있는 역할을 하고 있을까.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 국회의원들과 시민들이 6일 서울 중구 서울시청 앞 이태원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 앞에서 서울시의 10. 29 이태원 참사 시청 분향소 철거 예고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3.02.06 ⓒ민중의소리
음악은 기록하고 증언하고 위로하고 달랜다. 열정에 불을 지르거나 쉬게 만들고 사유로 이끌기도 한다. 정보, 콘텐츠, 사건이 넘치는 요즘은 위로라는 역할이 유독 강조된다. 하지만 위로가 예술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되어도 좋을까. 그보다는 위기를 총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도울 뿐 아니라, 새로운 감수성과 철학을 예술언어로 표현함으로써 심장을 흔들며 말을 거는 길잡이 역할을 담당해야 하지 않을까. 달라질 미래를 상상할 수 있도록 초대하는 작품이 늘어나야 하지 않을까.
안타깝게도 날마다 수천 곡씩 쏟아지는 새 음악 가운데 이 역할을 해내는 작품을 찾기쉽지 않다. 정부가 가로막기 때문이 아니다. 상품이라는 속성 때문이고, 음악의 역할을 한정하는 분위기 때문이다. 사유와 도전도 부족하다. 그럼에도 어떤 뮤지션은 음악으로 표현하고 실천으로 연대한다. 쓰레기를 최소화하는 공연과 페스티벌 역시 늘어간다.
밴드 허클베리핀은 2022년 9월 22일 발표한 정규음반 [The Light Of Rain]의 수록곡 ‘비처럼’에서 “이제는 숨 쉬기 위해 많은 게 필요해졌어 / 이 모두 우리의 끝없는 욕망이 만든 걸”이라고 기후위기의 원인을 짚었고, 걸그룹 드림캐쳐는 2022년 4월 12일 발표한 음반 [아포칼립스 : 세이브 어스’(Apocalypse : Save us)]의 타이틀곡 ‘메종’(MASION)‘에서 “이상하게 덥지? / 이 행성의 법칙 / 마치 말라가는 / 네 양심과 똑같지”라고 노래한 이유다. 비건문화를 만드는 모임 나유타와 예술활동가 공동체 플라가미가 동물해방을 위한 두 번째 컴필레이션 음반 [공명]을 내놓은 이유도 동일하다. 10.29 이태원 참사 추모공연을 하는 뮤지션들은 가족을 잃고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한 이들 곁에서 음악으로 연대한다.
이 음악가들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인기를 얻고 사회적 반향을 끌어냈는지가 아니다. 당대의 명성과 수익이 예술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어버린 시대이지만, 오래 반복해서 듣고 높게 평가하는 음악들이 모두 인기곡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현실을 총체적으로 담아내는지, 새로운 감수성과 인식을 제시하고 교감하는지, 밀려나고 지워진 이름을 얼마나 단단하게 껴안는지 여부이다.
동물해방물결 등 동물권 시민·사회단체원들이 2020년 11월 1일 오후 서울 세종대로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기후위기대응 및 그린뉴딜 정책에 육류소비 감축과 채식 장려정책 포함, 채식선택권 보장 및 비건채식 급식 실시 등 기후와 환경을 위해 비건 채식 동참을 촉구했다. 2020.11.1 ⓒ뉴스1
그래서 이미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위기를 적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정도로는 부족할 만큼 중차대한 상황이며, 훌륭한 작품이 해낸 일이 그것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는 위대한 작품 하나가 세상을 바꾼다고 믿기에는 콘텐츠가 너무 많아졌고, 창작보다 마케팅의 비중이 커져버렸다. 심오한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 번번이 빠르게 지지와 호응을 얻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어떤 작품은 시대의 용광로를 태우고, 절망한 이들을 달래며, 새로운 가치와 세계로 전진한다. 오래도록 샘솟는 샘물이 되고, 늘 펄럭이는 깃발이 된다. 천재 예술가 한 사람의 재능 때문이 아니다. 정직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며, 치열하게 모색한 결과이다. 상품이라는 숙명과 갈등하면서 빚어낸 목소리가 터져 나올 때 우리는 그 곳에 모여 다르게 보고 새롭게 꿈꿀 수 있다.
자신의 삶과 아픔에서 출발해 이웃과 생명을 껴안는 음악, 사유의 범위를 확장해 문명을 성찰하는 음악이 간절하다. 소비 자본주의에서 탈출해 자연과 생명의 가치, 그 상상력을 옹호하는 음악, 평등과 공생을 노래하는 음악, 정신과 영혼과 사상으로서의 음악을 충분히 듣지 못했다.
지금 부족한 것은 테크닉과 마케팅이 아니라 삶의 근본에 대한 질문이다. 혼자만의 감정을 발산하기 급급한 음악보다, 불안과 위기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우리 안에 이미 존재하는 흙냄새 가득하고 다정한, 오래된 미래를 꽃피우는 음악을 모두의 마음에 씨 뿌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