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단내나는 삶] 경제 발작 시대

조세희는 ‘난쏘공’서 한국 근대화 과정을 “경제 발작 시대”로 칭했는데, 아직도 우리는 그 증상을 보인다

서울의 한 아파트 공사 현장 건설노동자들 (자료사진) ⓒ민중의소리

나는 지난 2003~2004년에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조지타운대학교 부설 연구기관 ‘우드스탁 테올로지칼 센터(Woodstock Theological Center)’에서 주최한 ‘세계화의 영향’이란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당시 한국 노동자들이 겪는 세계화의 영향에 대해 면접 조사한 사례를 발표했고, 그 분석 작업에도 동참했다.

한국 서강대학교에서 한때 강의를 했던 데니스 맥라마라(Dennis McNamara, S.J.) 신부님이 그 대학교 사회학과에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었는데, 학부 3, 4학년을 대상으로 ‘근대성Modernity’이란 과목을 강의하고 있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경제적 근대화의 모델로 꼽히는 한국과 그밖에 다른 몇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경험을 들려주고자 특강 시간을 마련했다. 나는 경제학·사회학 전공자가 아님에도 브라질에서 활동하던 예수회원과 함께 그 특강의 발표자로 초대받았다. 맥라마라 신부님은 발표자들에게 ‘내가 경험한 근대화’ 그리고 ‘근대화 과정의 어두움’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나는 한국 근대화 과정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내가 경험한 근대화는 단적으로
‘경제적으로 잘 사는 것’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적 근대화를
성취하기 위해서 가난을
박멸하여야 한다는 잘못된 신화를
사람들의 마음에 심어 놓았다


군인이었던 박정희는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하고 이듬해부터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추진했다. 베이비붐 세대인 나의 삶은 이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소용돌이의 한복판에 있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경제개발 광풍의 소용돌이를 일방적으로 수용했고, 청년기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그 광풍의 어두움을 볼 수 있었다.

1970년 4월 1일 포항제철(현 포스코) 포항제철소 1기 착공식에서 박태준 포항제철 사장과 박정희 대통령, 김학렬 부총리(왼쪽부터)가 착공 버튼을 누르고 있다. ⓒ포스코

내가 경험한 근대화는 단적으로 ‘경제적으로 잘 사는 것’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적 근대화를 성취하기 위해서 가난을 박멸하여야 한다는 잘못된 신화를 사람들의 마음에 심어 놓았다. 이 ‘가난 박멸 신화’의 뿌리가 너무 깊어, 사람들은 가난하지 않게 사는 게 마치 인간의 원형인 것처럼 착각하기 시작했다. 잘못된 신화를 성취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일터에 가 장시간 노동이라는 희생을 감내했다. 그리고 국가는 이들을 산업역군으로 치켜세웠다.

그런 장시간의 노동이 가능했던 것은 “개인을 위해서 국가가 있는 것이 아니고 국가를 위해서 개인이 있는 것”이라는 일본식 애국주의와 군대문화를 통해 견고해진 집단주의 때문이다. 당시 국민은 국가 구성원으로서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국민교육헌장)서 애국주의와 집단주의를 내면화하는게 당연했다. 이런 문화에서 ‘나’ 개인은 오로지 집단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그래서 집단의 이념과 반대되는 의견을 가질 수 없었고, 국가를 위해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라는 가치에 따라 희생을 강요받았다. 한국 사회에선 표현의 자유도 정치적 자유도 인권도 다 유보되었고, 오로지 경제 개발에만 ‘몰빵’했다. 그렇게 우리는 경제개발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다.

수강생들 가운데는 한국인 이민자도 있었는데 그는 나의 발표 내용이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듣던 한국의 성공적 근대화 과정과 매우 달라 좀 충격을 받은 듯 했다. 사실 한국에선 근대화를 이야기 할 때 오직 경제개발 이야기만 한다. 경제적 진보 정도로, 경제 개발의 관점 안에 들어가게 근대화를 축소시켰다. 경제적으로 잘 산다는 것과 삶의 질이 높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삶의 질이 높다는 것은 문화의 문제이고 제도의 문제이다. 그러니 폭넓은 근대화에 대해 논하기 위해선, 근대화 과정에서 삶의 질과 관계가 있는 문화와 인간적 가치 그리고 사회제도에 관한 내용도 포함되어야 한다.

한국 사회는 아직도 근대화를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문화와 인간적 가치, 그리고 사회 제도의 관점에서가 아닌 경제적 관점에서의 발전으로만 이야기한다. 그리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그 희생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하고 있다. 한국은 노동자들이 세계에서 최장시간 노동을 하는 나라 중 하나이다. 이 뿐인가? 세계에서 산업재해가 많고 산업재해 사망률도 높기로 손꼽히는 하나이다. 이런 고통스런 과정을 거치면서, 산재 사고라도 감소했다면 그들의 피해와 죽음이 의미있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산업 현장에서의 재해와 그로 인한 죽음은 전혀 줄어들고 있지 않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조세희 작가는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1970년대 산업화를 통한 근대화 과정을 “경제 발작 시대”로 그리고 “윤리, 도덕, 질서, 책임이 모든 생산행위의 적으로 간주되었다”고 표현한다. 경제 발작 시대는 모든 것을 생산행위에 종속시켰다. 그리고 생산행위를 위축시키는 가치와 문화, 제도는 불필요하고 잘못된 것으로 간주했다.

이제 발작을 멈추어야 한다
자본에 노동이 없다면
그냥 자본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이 더해지면
그들의 삶은 윤택해진다
이제 노동자를 삶의 파트너로
받아들여야 한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출판된 지 45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한국 사회는 경제 발작 증상을 보이고 있다. 현 정부는 노동자들이 건강한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외침을 생산행위를 위축시키키는 ‘악’으로, 불필요한 일로 보는 것 같다. 그래서 주 52시간의 노동시간 상한제를 폐지하고 주 69시간의 노동이 가능케 하는 노동시간 개편안을 발표한 게 아니겠는가.

노동이 삶의 일부이지 노동이 삶의 전부는 아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노동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이 ‘노동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교황 요한바오로2세, 노동하는 인간, 6항)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생산성 향상을 위해 노동자의 희생을 담보하는 노동관은 노동을 징벌이 되게 하고, 노동자를 노예가 되게 하고, 인간을 일하는 기계로 전락시킨다. 이런 노동관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내고 높여줄 수 없으며 인간으로서의 자기완성도 가능하지 않다.(노동하는 인간, 9항)

금속노조 윤장혁 위원장과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28일 서울 중구 정동 금속노조 회의실에서 열린 노동조합 활동을 간첩 활동으로 둔갑시키는 윤석열 정권 규탄 제 시민사회단체 공동 기자회견에서 윤석열 정권 공안몰이 규탄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2023.02.28 ⓒ민중의소리

정치·경제적 기득권자들은 또한 노동조합 활동이 생산행위를 위축시킨다며 발작 증세를 보인다. 그래서 노동조합 활동을 방해하기 위해 ‘귀족노조’라는 말을 퍼뜨려 부정적인 이미지를 확산시키고 있다. 또 노동조합이 청년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면서 노동자와 청년들 사이를 이간질한다. 이는 명백히 폭력과 증오를 미화하고 사람들 사이를 분열시키는 행위이다. 더불어 노동조합법 2·3조가 개정되면 마치 세상이 뒤집힐 것 같이 공포감을 주는 뉴스를 생산하는 언론들의 행태도 매우 편파적이고 반사회적이다.

이제 발작을 멈추어야 한다. 자본에 노동이 없다면 그냥 자본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면 자본가는 그저 돈만 씹어 먹으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노동이 더해지면 그들의 삶은 윤택해진다. 그러니 노동자를 삶의 파트너로 받아들여야 한다. 누구는 말한다. ‘노동이 없으면 음악도 없다!’(No Work, No Music!) 비슷한 말이다. ‘노동이 없으면 삶도 없다!’(No Work, No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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