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개 이상의 배터리 관련 업체가 참가한 ‘2023 인터배터리’에서는 미래 기술에 대한 기대뿐 아니라, 미중 갈등 가운데 압박이 거세지는 공급망 다변화에 대한 고심이 엿보였다.
17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인터배터리에서 배터리 셀 업체는 저마다 수주·기술 성과를 내보였다.
관람객이 가장 많이 몰린 건 전기차였다. 셀 업체 부스에 전시된 전기차는 각자 수주 성과를 직관적으로 드러냈다.
LG에너지솔루션은 부스 중앙에 포드의 머스탱 마하-E와 미국 전기차 스타트업 루시드모터스 루시드 에어를 전시했다. 북미와 유럽에 판매되는 마하-E에는 LG에너지솔루션의 파우치형 배터리가 탑재된다. 머스탱 마하-E가 인기를 끌면서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해, 폴란드 공장의 포드향 배터리 생산라인 규모를 2배 이상 증설하고, 공급 물량을 확대해 나간다고 발표했다. 루시드 에어에는 원통형 배터리가 탑재된다.
대형 트럭이 눈길을 끌었다. 삼성SDI의 원통형 배터리가 탑재되는 볼보트럭의 FM 일렉트럭이다. 원통형 배터리 2만 8천여개가 들어간다. 루시드 에어에 탑재된 원통형 배터리는 6,600개 수준이다. 전기차는 차급이 커지면 배터리가 무게가 늘어나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있으나, 삼성SDI는 니켈 함량 91%의 하이니켈 양극재가 적용된 배터리로 출력과 에너지 밀도를 높였다. FM 일렉트릭 1회 충전 주행거리는 300km 정도다. 옆에는 각형 배터리가 탑재된 주행거리 625km의 BMW 대형 세단 i7이 전시됐다.
SK온도 전기차를 선보였다. 현대자동차 제네시스 eGV70에는 파우치형 배터리가 들어갔다. 그간 파우치형 배터리에 집중해온 SK온은 전시회에서 처음으로 각형 배터리 실물 모형을 공개했다. 폼팩터 확대를 통해 향후 다양한 완성차 업체 요구에 대응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중국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리튬·인산·철(LFP) 배터리에 대한 진출도 가시화하고 있다. LFP 배터리는 한국 업체가 강세인 삼원계 배터리보다 에너지 밀도가 낮아, 주로 중저가 차량에 탑재된다. SK온은 LFP 배터리 시제품을 공개했고, 삼성SDI는 이번 전시회에서 LFP 배터리를 내놓지는 않았지만, 최근 최윤호 대표가 사업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한국 전시회 최초로 LFP 실물 배터리를 공개했다. 다만, 에너지 저장 장치(ESS)용으로, 전기차에 탑재되는 건 아니다.
차세대 기술도 소개됐다. 경기도 수원 공장에 전고체 배터리 파일럿 라인 완공을 앞둔 삼성SDI는 모형을 전시했다. SK온은 전고체 배터리 개발품을 공개했다. LG에너지솔루션과 전고체 배터리 기술을 소개하는 코너를 마련했다. 전고체 배터리는 셀 구성 요소인 전해질을 액체가 아닌 고체로 만들어, 화재 안정성과 배터리 용량이 탁월하다. 전시회장을 돌아다니는 동안 ‘진짜 전구체 나오는 거 아냐’라는 방문객들의 기대에 찬 소리가 들렸다.
삼성SDI 부스에 전시된 볼보트럭의 FM 일렉트럭. ⓒ민중의소리
공급망 하부에서 선명해지는 중국
셀 업체 부스 주변에는 양극재 업체가 자리 잡았다. 전기차와 같은 화려한 제품 자랑은 없다. 대신 공급망을 보여주는 지도와 가루 형태의 각종 소재와 원료가 전시됐다. 전기차 배터리 산업의 기반이 되는 것들이다.
포스코케미칼 부스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왼쪽 벽면을 지도가 채우고 있었다. ‘2030 배터리 소재 밸류 체인’이라는 제목 아래 ‘이차전지 소재 생산능력 확대 및 전구체 내재화로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니켈·리튬·인상흑연 등 자원개발을 통해 안정적인 원료 조달로 시너지를 더하고 있습니다’라고 소개 문구가 달렸다.
배터리는 ‘셀←양극재←전구체←광물’의 흐름으로 만들어진다. 양극재는 배터리 원가의 60%를 차지해, 음극재와 전해질, 분리막 등 여타 요소 중에서도 핵심 소재로 평가된다. 한국 대표 양극재 업체가 전구체와 니켈, 리튬 등 광물 공급망을 전면에 내세운 것에서 공급망 문제의 중요성이 드러난다. 포스코케미칼은 전구체 생산능력을 지난해 기준 1만 5천톤에서 2025년 22만 톤으로 확대해, 자체 생산 비율을 64% 이상으로 확대할 방침이다. 다만, 현재는 중국 의존도가 높다. 포스코케미칼 관계자는 “자체 생산 물량을 제외하면, 전구체 상당수를 중국에서 들여온다”고 전했다. 한국무역협회 수출입 무역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전구체 중국 의존도는 90% 이상에 달했다.
포스코케미칼 부스에 전시된 공급망 지도. ⓒ민중의소리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 공급망 재편을 압박하고 있다. IRA는 중국 등 우려국가의 업체가 생산한 배터리, 또는 중국 업체가 생산한 소재·원료로 만든 배터리가 탑재된 전기차에는 보조금 지급을 제한한다는 규정이 담겼다. ‘탈중국’ 하라는 것이다. 중국산 소재·원료를 어느 비율까지 허용할지 등 세칙은 아직 나오지 않았으나, 전구체 공급망 다변화는 양극재 업체에게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 맞은편 부스의 에코프로비엠 관계자는 “IRA 세칙을 확인해 봐야겠지만, 전반적으로 공급망 다변화 압박이 거세지고 있다”며 “다방면으로 공급망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에코프로비엠은 전구체 생산 자회사로 에코프로머티리얼즈를 두고 있다. 전구체 자회사 JH케미칼을 보유한 엘앤에프의 관계자도 “자회사에서 들여오는 전구체 비중은 아직 높지 않다”며 “배터리 셀 고객사 쪽에서 공급망 다변화 요구가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원료도 중국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전구체와 결합해 양극재를 이루는 리튬, 전구체 구성 요소인 니켈 등을 중국에서 들여온다. 엘앤에프 부스 내 ‘글로벌 네트워크’ 지도에는 중국 지역에 ‘Ni’(니켈), ‘Li’(리튬) 표시가 찍혀있었다.
전구체 생산 진출을 준비 중인 LS MnM의 관계자는 “니켈은 중국이 꽉 쥐고 있다”며 “중국이 수출을 막으면 산업 전반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전 세계 니켈 생산 점유율이 가장 높은 곳은 인도네시아와 러시아다. 러시아산은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에 따른 국제 사회 제재로 무역이 제한되고 있다. 인도네시아 광산 상당수는 중국 자본이 투입됐다. 채굴한 광산을 제련하는 공장은 대부분 중국 현지에 있다.
엘앤에프 부스 ‘글로벌 네트워크’ 지도 ⓒ민중의소리
공급망 강화 방안으로 떠오르는 리사이클
배터리 공급망 강화 방안으로 리사이클 산업이 뜨고 있다. 폐배터리나 불량 셀에서 소재·원료를 뽑아내는 방식이다. 동제련 사업을 통해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한 LG MnM은 리사이클을 통해서도 전구체를 생산할 계획이다. 리사이클 산업이 본격화하면 소재·원료 공급망의 내재화율이 높아진다.
‘유럽판 IRA’로 불리는 유럽연합(EU) 핵심원자재법(CRMA) 초안이 공개된 가운데, 일정 비중의 배터리 재사용·재활용을 의무화하는 조항이 담기는 등 대외적인 환경도 리사이클을 확대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선두 업체 가운데 성일하이텍이 있다. 2008년 리사이클 공장을 세웠다. 폐배터리보다는 셀 업체 공정 과정에서 발생한 스크랩을 리사이클 하는 비중이 높다. 아직 전기차 상용화 기간이 길지 않아, 사용 후 배터리 물량이 많지 않다. 기술력은 준비가 돼 있다. 성일하이텍 관계자는 “배터리 팩·모듈·셀 모든 단위에서 해체 가능하다”며 “업력이 오래된 만큼, 해체 자동화 공정이 상당 수준 이뤄졌다”고 말했다. 성일하이텍은 추출한 원료를 전구체 업체에 납품한다.
고려아연은 아연제련 기술력을 앞세워 리사이클 사업을 추진 중이다. 고려아연 관계자는 “아연제련과 리사이클은 특정 물질을 뽑아낸다는 측면에서 기술이 겹치는 범위가 넓다”고 말했다. 부스 벽면에는 ‘리사이클은 제련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고려아연은 리사이클에서 전구체 생산까지 연계한다. 고려아연과 LG화학이 합작해 설립한 한국전구체는 리사이클·전구체 공장을 2024년까지 완공할 계획이다.
양극재 업체도 리사이클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리사이클-원료 가공-전구체 생산-양극재 생산’을 한 권역에서 처리하는 클로즈 루프(Closed-Loop)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에코프로 경우 포항에 밀집된 계열사 공장 간 소재·원료를 운반하는 배관을 설치했으며, 증설은 계획하고 있다. 에코프로비엠 관계자는 “리사이클부터 양극재 생산까지 한 업체가 수행하면 원가 절감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며 “가격 경쟁력 측면에서 유리하다”고 설명했다.
한편, 지난 15일부터 이날까지 진행된 인터배터리에는 총 477개 업체가 참가했다. 방문객은 전년 대비 1.5배 증가한 6만여명으로 집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