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2022년 5월 20일 경기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당시 부회장)의 안내를 받으며 생산시설을 둘러보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2022.5.20. ⓒ뉴스1
반도체 등 핵심 산업에 대한 투자 세액공제 확대 법안, 이른바 ‘K-칩스법’에 대한 국회 입법 절차가 진행 중이다. 더불어민주당이 동조하면서 법안 처리에 속도가 붙었다. 전문가들은 단순 세제 지원 효과에 의구심을 제기한다. 미·중 갈등으로 대표되는 대외 불확실성을 해소하는 게 급선무라는 지적이 따른다. 세제 지원이 대기업이 집중되고 정부 세수가 줄어드는 등 우려도 나온다.
21일 국회에 따르면,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조세심사소위원회는 지난 16일 반도체 등 국가전략기술 시설투자에 대한 세액공제 확대를 골자로 하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이번 개정안에는 국가전략기술 시설투자에 대한 세액공제율을 대기업·중견기업 기준 8%에서 15%로 상향하는 내용이 담겼다. 직전 3년 평균 대비 올해 투자 증가분에 대해서는 10%를 추가로 공제한다.
당초 정부안은 국가전략기술을 반도체·배터리·백신·디스플레이 등 4개 분야로 규정했으나, 더불어민주당 요구에 따라 수소와 미래형 이동수단을 더하기로 했다.
세액공제 확대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던 민주당이 선회했다. 지난달 기획재정부가 개정안을 제출할 당시, 민주당은 “기재부가 초부자 감세에 집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지난주 들어 기류가 바뀌었다. 민주당 원내대표단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14일 조특법 관련 회의를 진행한 데 이어, 이튿날 신동근 의원이 세액공제율 인상과 국가전략기술 범위 확대를 골자로 한 조특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큰 틀에서는 여야 합의가 이뤄진 모양새다. 이번 개정안은 오는 22일 기재위 전체회의와 법사위를 거쳐, 30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될 예정이다.
다만, 민주당 내에서도 우려가 여전하다. 조세소위에서 고용진 민주당 의원이 “투자가 증가할 거라는 설득력 있는 자료도 없다”고 지적했고, 같은 당 양경숙 의원도 “과도한 임시투자 세액공제를 제시하고 있어, 정부 자체적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발언했다. 한 민주당 의원실 관계자는 “개별 의원마다 입장이 다를 수 있는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면서도 “세수 감소에 대한 우려와 투자 유인 효과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본다”고 전했다.
반도체 위기 요인은 미·중 갈등, 해법은 대미 외교
국가전략기술 중에서도 핵심 산업으로 반도체가 꼽힌다. 반도체는 지난해 한국 수출액의 18.9% 차지한 1위 품목이다. 법안 별칭도 ‘칩스법’이다. 세계적으로 반도체 산업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공급망 안정화를 위한 지원 필요성이 커졌다는 게 정부 입장이다. 기재부는 최근 참고자료를 통해 “국제사회는 반도체 공급 부족 등을 경험하며 자국 내 생산능력 보유가 갖는 경제·안보적 가치를 재인식하게 됐다”며 “글로벌 기술 패권과 공급망 경쟁 격화에 따라 반도체 등 경제·안보적 가치가 큰 전략 품목에 대한 전폭적 지원이 시급한 상황”이라고 했다.
정부는 경제 위기 극복 효과도 내세웠다. 기재부는 “반도체 산업 등을 중심으로 위축된 기업 투자심리를 반전시키고 국가전략산업의 글로벌 경쟁력 확보를 위한 획기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했다.
업계는 반기는 분위기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첨단산업을 두고 격화되는 글로벌 주도권 경쟁과 세계 경기 침체 등으로 어려움에 직면한 기업들 투자 부담을 덜어줘, 향후 미래산업 주도권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반도체 산업 육성이 중요한 시기라는 데는 대체로 의견이 모인다. 대한상의도 언급했듯, 한국 반도체 산업의 주된 위협 요인은 미·중 갈등이다. 반도체 산업이 기술 패권 경쟁의 격전지가 됐다. 미국은 반도체법을 무기로 중국을 배제하고, 자국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을 꾀하고 있다.
미국 현지 반도체 투자에 대해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의 미국 반도체법에는 보조금 지급 조건이 나열돼 있다. 보조금을 받으면 향후 10년간 중국에 반도체 시설을 짓거나 기존 시설에 추가로 투자할 수 없다. 장비 최신화가 지연되면 공장 경쟁력이 점차 떨어진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공장 운영 차질이 불가피하다.
한국이 미국 반도체법 보조금을 신청하지 않으면, 미국에 등을 돌리는 의사로 풀이될 여지가 있다. 미국의 화살이 한국을 직접 겨눌 우려가 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약한 고리는 장비 분야다. 시장조사업체 IDC에 따르면, 세계 반도체 전공정 장비 시장 점유율은 미국 45%, 일본 32%, 네덜란드 18% 순이다. 세계 20대 기업 가운데 한국 기업은 2곳뿐이다.
미국의 지난해 대중 반도체 수출 규제 품목에는 반도체 완제품뿐 아니라 장비도 포함됐는데, 유사시 한국에도 수출 규제가 적용되는 사태를 가정해볼 수 있다. 미국은 자국 기업뿐 아니라 외국 기업의 대중 수출도 막고 있다. 미국 기술을 활용해 생산한 제품도 미국산으로 간주해 수출 시 상무부 허가를 받도록 하는 해외직접생산품규칙(FDPR)을 적용했다. 최근 미국의 대중 수출 규제에 동참하기로 한 네덜란드의 ASML이 한국 기업에 장비를 주지 않으면 큰 타격을 입게 된다. ASML이 독점 생산하는 EUV 장비는 고성능 선단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이다.
반도체 세액공제 확대는 위기 원인을 잘못 진단한 결과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세제 지원이 아닌 대외적 불확실성을 해소하는 게 우선이라는 설명이 따른다. 반도체 산업에 정통한 한 통상 전문가는 “기업 입장에서 세액공제율을 높이면 나쁠 건 없다”면서도 “지금 국내에서 반도체 세액공제가 낮아서 투자가 안 된다는 얘기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어 “현재 반도체 위기는 세금 문제라기보다 미국이 반도체법을 통해 한국의 중국 수출까지 규제하는 상황과 맞물려 있다”며 “무작정 세액공제율 높일 게 아니라, 투자의 최대 장벽이 되는 대외환경 불확실성으로 국내에서 투자 여건이 악화하는 부분을 해소하는 차원에서 세액공제가 어느 정도 효과를 낼지 평가하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대미 외교를 강조했다. 미국에 대해 저자세로 일관하는 윤석열 정부 기조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 전문가는 “미국이 과하게 자국만 생각하는 ‘아메리카 퍼스트’를 밀어붙이고 있어, 한국으로서도 미국을 신뢰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미국이 관성적으로 자국 우선주의를 유지하면 동맹국도 미국과 윈윈하고자 하는 유인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데 이것이 과연 장기적으로 서로에게 도움이 될지 생각해야 한다는 식으로 미국 측에 한국 입장을 강하게 전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2일(현지 시간) 백악관에서 개최한 반도체 화상회의에서 반도체 웨이퍼를 들어 보이며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AP
“투자 유인 효과 미미한 대기업 특혜”
반도체 세액공제 확대로 정부가 기대하는 전반적인 산업 역량을 강화하는 효과를 볼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해 의견이 엇갈린다.
대기업에 혜택이 집중된다는 점에서 산업 역량 강화 효과를 반감된다. 국가전략기술 세액공제가 도입된 2021년 말 해당 법안에 대한 기재위 검토보고서에 따르면, 시설투자 세수 효과 중 82.8% 대기업에서 발생한다. 중견기업은 5.7%, 중소기업은 11.5%에 그쳤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측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만 세액공제를 받는 건 아니다”라며 “패키징·소재·부품·장비 분야도 세액공제 대상에 포함된다”고 설명했지만, 기업 규모별 세수 효과는 대기업이 압도적이다.
이른바 ‘낙수효과’도 미미하다. 반도체 완제품을 만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공장을 세우면, 해당 공장에 들어가는 장비 구입이 늘어, 산업 전반이 활성화한다는 게 정부와 재계 주장이다. 현실은 다르다. 반도체 장비 상당 부분을 외국에 의존하고 있다. 장혜영 의원은 최근 관련 토론회에서 “대기업 팹 설비투자는 단지 20%가 국내 장비 기업 매출과 관련이 있을 뿐”이라며 “투자 증가 혜택을 외국기업이 대부분 가져간다는 얘기”라고 지적했다.
세액공제 확대가 기업 투자를 촉진한다는 대전제도 논거가 빈약하다. 감세의 투자 유인 효과에 대해 실증적, 이론적으로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게 다수 전문가의 설명이다. 지난해 국회 예산정책처는 법인세 인하 내용이 포함된 세제개편안에 대한 검토보고서에서 ‘(법인세 인하와 세액공제 등 감세 정책은) 대내외 경기 불확실성 등 다양한 투자 결정요인을 고려하면, 투자유인 효과가 불확실하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국책연구기관인 대외경제정책연구원도 2018년 ‘리쇼어링의 결정요인과 정책 효과성 연구’ 보고서에서 세금 감면 등 지원책에 대해 “리쇼어링 사례가 제한적이어서 투자 유치 효과를 얻기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투자 유인 효과가 없는 감세는 산업 경쟁력 강화와 경기 활성화 대책이 아니라, 대기업 특혜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국가전략산업 세액공제는 2024년 말까지 이뤄진 투자에 대해 적용된다. 문제는 세액공제율 인상 방안이 담긴 이번 개정안이 통과 전 발표된 기존 투자 계획에도 인상된 공제율이 적용된다는 점이다. 삼성전자는 2042년까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300조원을 투자한다고 최근 밝혔고, 앞서 SK하이닉스도 용인에 120조원 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이들 투자 계획은 세액공제율과 무관해 투자 유인 성과라고 볼 수 없으나, 세제 혜택을 받게 된다.
세금을 깎아주면 정부가 거둬들이는 세수가 줄어든다. 경기 둔화와 고물가로 정부 지원을 위한 재정 지출 필요성이 늘어나는 가운데, 세수 감소는 오히려 경제 위기 극복 걸림돌로 작용한다.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 분석 결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2021년 기계장치 취득액 규모를 유지한다고 가정할 때, 이번 개정안의 세액공제율을 적용한 세수 감소 규모는 각각 7조 9천억원, 1조 8천억원에 이른다. 두 기업에서만 연 10조원에 육박하는 세수가 줄어드는 셈이다.
이 수석연구위원은 “미·중 갈등이라든지, 소재·부품·장비와 팹리스(설계) 분야 경쟁력 등 복합 위기 대응을 위한 재정 지출이라면 반대하지 않는다”며 “대책 없이 단순히 세금만 깎아 주는 건 반도체 산업 위기에 제대로 대응할 방법도 아닌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안일한 대책을 펴면서 돈까지 쓴다는 게 문제”라며 “실효적인 방안을 마련해야지, 정부와 국회가 뭔가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근거도 빈약한 정책을 추진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