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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양곡법 거부권 행사는 식량안보 포기 선언이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대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공식 건의했다. 한 총리는 29일 대국민 담화를 통해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우리 농업을 파탄으로 몰 것”이라며 시장 수급조절 기능을 마비시키고, 미래농업에 투자해야 할 재원을 소진시키면서, 진정한 식량안보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쌀 농가는 역대급 쌀값 폭락으로 고통 받고 있다. 쌀값은 지난 해 8월 기준으로 그 전 해에 비해 24.9% 폭락했다. 1977년 이후 45년 만에 최대 낙폭이다. 가뜩이나 어려운 대다수 쌀 농가에게 이런 사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다. 이대로 방치한다면 쌀 산업 전반의 위기로 비화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한 총리는 양곡법 개정안이 시장 수급조절 기능을 마비시킬 것을 걱정했지만 애초에 시장 수급조절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현실에는 눈을 감고 있다. 양곡법 개정안이 시장 기능을 마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불완전함 때문에 양곡 수급에 대한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필요한 것이다. 수급이 제대로 조절되지 않을 때에도 국민의 ‘주식’인 쌀의 생산기반은 지켜야 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인데 정부 입장은 본말이 전도돼 있다.

농업에 투자해야 할 재원을 말려버리고 있는 것은 쌀값 폭락 시에 한해서 1조 가량의 재원이 소요될 양곡법이 아니라 오히려 정부가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부자감세 정책이다. 정부는 반도체 대기업에 대해서 한 해에 3조가 넘는 세금을 깎아주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반도체 산업에 세금 혜택을 몰아주면서 내세우는 말이 ‘반도체는 산업의 쌀’이라는 것인데, 진짜 쌀을 생산하는 농가의 어려움은 외면하는 상황이 어처구니없다.

지금의 양곡관리법 개정안도 미흡하다. 지난 23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여야 공방 속에 기존 민주당안보다도 훨씬 후퇴된 안이다. 지난해 10월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에서 통과된 안은 쌀 초과 생산량이 3%를 넘거나 쌀값이 5% 넘게 하락하면 매입을 의무화하는 것이었는데, 이번 개정안의 핵심 내용은 3~5% 이상 생산량이 초과되거나 5~8% 이상 가격이 하락할 때로 구간을 설정해 정부의 재량 범위를 확대했다.

기존에도 초과 생산된 쌀에 대한 시장격리 실시는 정부 재량이었다. 작년에 정부는 그 재량으로 시장격리 실시를 차일피일 늦췄고, 그 결과가 45년 만의 최대 폭 하락이다. 한마디로 작년 같은 일이 계속 반복될 위험은 여전한 불완전한 대책이다.

이마저도 정부와 여당은 대통령 거부권 행사를 기정사실화 하면서 의무화에 반대하고 있다. 그러면서 대책이라고는 쌀 소비 확대 같은 구체성 없는 하나마나한 이야기뿐이다. 실질적인 대책도 없이 거부권 행사를 강행한다면 어려운 여건에서 우리 농업을 지켜온 농민의 의욕을 꺾고 우리 농업을 더 암담한 수렁에 빠뜨리는 일이 될 것이다. 사실상의 식량안보 포기 선언지자 농민생존 포기 선언이 될 거부권 행사 전에 농업 현장의 목소리부터 다시 들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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