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대통령까지 배출한 미국이지만 흑인 차별과 흑백 갈등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100여 년 전으로 돌아가면 그 정도는 더욱 심했지요. 더구나 예술계에서 흑인이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을 정면으로 무너뜨리고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았던 화가가 있었습니다. 에드워드 미첼 배니스터(Edward Mitchell Bannister / 1828 ~ 1901)입니다.
하늘 한 편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시커먼 구름이 다가오는 것을 보니 조만간 비가 쏟아질 것 같은데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먼저 심하게 불기 시작했습니다. 좁은 산길을 걷고 있는 사내는 발걸음을 재촉하지만 앞으로 걷는 것도 힘들어 보입니다. 아직 쉴 만한 곳은 보이지 않는데, 큰일입니다.
배니스터는 캐나다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카리브해에 있는 바베이도스 출신의 흑인이었는데, 어머니의 인종은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배니스터가 어려서 아버지가 죽고 열 여섯 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그는 백인의 집에 맡겨져 자라게 됩니다.
고기 잡는 배에서 요리를 담당하던 베니스터는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미국 보스턴으로 이사를 갑니다. 캐나다 출신이지만 오늘날 미국 화가로 불리는 시작점이지요. 야간반에 입학,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그는 생계를 위해 허드렛일을 전전했습니다.
뭍에 올려놓은 보트를 다시 물로 내려보내기 위해 두 남자가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옆에 앉은 여인의 표정에 약간의 짜증이 보이거든요. 배를 열심히 당기고 있는 붉은 옷의 남자가 베니스터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은 것이라는 추정도 있습니다.
1857년, 스물아홉 살이 되던 해 배니스터는 크리스티나라는 여인과 결혼을 합니다. 로드 아일랜드 출신의 나라간센크족 인디언이었던 그녀는 가발을 만들고 미용사로도 일했습니다. 그런데 훗날 남북전쟁 때는 ‘흑인 병사에게도 백인 병사와 동등한 급여를 지급하라’고 의회를 상대로 로비를 하고, 병사 후원회를 조직하기도 한 여걸이었습니다.
이후 배니스터는 거의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사회 환경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당시 흑인에 대한 미국 사회의 관점을 보여주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1867년 뉴욕 헤럴드 신문에는 ‘깜둥이’도 미술을 감상할 수 있지만, 작품을 제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베니스터의 초기 작품들은 프랑스의 바르비종파 기법의 영향을 받아 무겁고 어두운색이 많이 쓰였지만 20세기에 가까워지면서 밝고 환한 색이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대각선 구도를 사용한 이 작품은 오른쪽에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나온 여인을 배치해서 화면 전체가 관람객의 시선을 당기고 있습니다.
1876년 필라델피아 100주년 박람회에 출품한 풍경화로 배니스터는 동메달을 수상합니다. 처음 심사위원들은 배니스터가 흑인이라는 것을 알고 심사 결과를 다시 검토하고자 했지만, 백인 경쟁자가 심사 결과를 인정해 배니스터가 최종 수상자가 됩니다. 당시 그는 상을 받으러 왔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입장을 제지당하기도 했습니다. 흑인들에게 참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특이한 것은 배니스터 자신이 흑인이었고 당시 사회에서 흑인에 대한 차별이 만연했기에 그 내용을 그림의 주제로 삼을 법했지만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무슨 이유였을까요?
배니스터는 이상적인 전원과 바다 풍경화로 유명했지만, 신화와 초상화, 풍속화로도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는 프로비덴스 지역의 시민들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지도적 위치의 화가가 됩니다. 짧은 그의 미술 교육 배경을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유럽으로 유학을 가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재능을 개발한 놀라운 사례입니다. 19세기 후반, 유일한 흑인 화가라는 평가를 받았던 배니스터 이야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