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삶이 행복한 삶인가? 이 철학적인 주제에 경제학도 한 발을 걸친다. 행복경제학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행복을 경제학적으로 연구하는 경우가 꽤 있기 때문이다.
원래 주류 경제학에서는 “사용할 수 있는 재화가 늘어날수록 행복이 증가한다”고 간단히 행복을 정의해왔다. 돈이 많으면 구입할 수 있는 재화도 늘어나니 당연히 행복도 증가한다는 이야기다. 이 주장에 따르면 수백 억 원대 부자는 수백 억 원만큼 행복하고, 수조 원대의 부자는 수조 원만큼 행복하다.
그런데 미국의 경제학자 리처드 이스털린(Richard Easterlin)은 이런 주장에 정면으로 반하는 ‘이스털린의 역설(Easterlin Paradox)’이라는 이론을 1974년 발표했다.
이스털린은 경제적 부(富)와 행복의 상관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다양한 사람들의 행복 정도를 조사했다. 미국의 경우 1940년대부터 1950년대 후반까지 국민들의 행복이 전반적으로 증가했다. 이 시기 미국의 경제도 꽤 괜찮은 성장을 보였으므로, 돈이 많아질수록 행복이 증가한다는 주류경제학의 전제는 들어맞는 듯 보였다.
그런데 이후에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졌다. 개인 소득이 종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늘어난 1960년대 미국 국민들의 행복이 오히려 감소한 것이다. 논문을 발표한 이스털린은 자신의 가설을 확인하기 위해 1972~1991년 국민들의 행복도를 추가로 조사했는데 이때도 결과가 마찬가지였다.
이 시기는 개인들의 실질소득이 과거에 비해 무려 33%나 늘어난 때였다. 그런데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국민들의 비율이 되레 감소했다. 돈은 많아졌는데 사람들은 더 불행해지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세계행복보고서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이스털린에 따르면 일정수준까지는 부(富)가 늘어나면 행복감도 함께 증가한다. 그런데 어느 정도 생활수준이 높아지면 상황이 달라진다. 행복의 기준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찢어지게 가난할 때에는 머리 하나 기댈 작은 방 한 칸과 끼니를 거르지 않을 따뜻한 쌀밥 한 공기만 있으면 행복하다. 하지만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넘어서면, 방 한 칸과 쌀밥 한 그릇으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소득이 늘어날수록 행복에 대한 기준점이 높아지기 때문에 부(富)의 크기와 행복이 비례하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경제학이 새롭게 정의하는 행복의 요소는 무엇일까? 매년 3월 국제연합(UN)에서는 <세계행복보고서>라는 것을 발간한다. 그리고 이 보고서에서는 행복을 규정하는 여섯 가지 요소를 제시한다.
그 여섯 가지 기준은 △1인당 국민소득(GDP) △얼마나 오래 건강하게 살 수 있나(건강기대수명) △얼마나 자주적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나(삶의 선택권을 가질 자유) △우리는 이웃과 사회에 얼마나 관용적인가(관용성) △사회가 얼마나 공정하고 깨끗한가(부패인식) △내가 어려울 때 나를 도와주는 벗이 있는가(사회적 지원)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 여섯 가지 기준에 따르면 물론 돈도 행복에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그 외에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다섯 가지 기준이 더 있다. 행복이란 이처럼 “돈 많으면 행복해”라는 한 마디로 정의하기에 어려운 것이다.
2023세계행복보고서 표지 ⓒ국제연합
세계행복보고서는 매년 이 조사를 통해 6가지 세부 항목의 점수를 합산해 매긴 행복 순위를 발표한다. 올해 조상대상은 모두 137개 국가였는데 한국의 행복 순위는 이들 중 57위로 나타났다.
높은 것 같은가? 천만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이는 선진국들의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기준으로는 끝에서 4번째에 해당하는 참담한 수치이기 때문이다. OECD 회원국 중에서 한국보다 행복 순위가 낮은 곳은 그리스(58위), 콜롬비아(72위), 튀르키예(106위) 등 3곳뿐이었다.
더 처참한 사실이 있다. UN은 앞에서 언급한 6개 조사 항목의 점수를 합산해 종합 순위를 매긴다. 한국은 이 6개 조사 항목 중 건강기대수명(Healthy life expectancy) 분야에서 무려 세계 4위에 올랐다. 윤석열 정권이 개판을 치려 하고 있어서 그렇지 한국은 사실 건강보험 체계가 매우 잘 돼있는 나라다.
또 다른 조사 항목인 1인당 GDP 분야에서 우리나라는 24위를 차지했다. 한국은 절대 경제력 면에서 불행을 느낄 수준의 국가가 아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종합 순위에서 뒤쳐졌을까? 복지지표를 나타내는 사회적 지원(Social Support) 분야에서 77위, 사회적 협업을 나타내는 관용성(Generosity) 분야에서 90위, 공직사회의 청렴도를 나타내는 부패인식(Perceptions of corruption) 분야에서 97위를 차지하며 후진국 수준의 지표를 나타냈기 때문이다. 특히 국민들에게 삶의 선택권이 있는지 여부를 조사한 ‘삶의 선택권을 가질 자유(Freedom to make life choices)’ 분야에서는 순위가 무려 107위까지 떨어졌다.
이 분야에서 우리와 경합(?)을 벌이는 나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우리가 얼마나 후진국스러운 모습을 보이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한국과 경합 중인 나라는 말리(108위), 우간다(110위), 몽고(111위) 케냐(113위) 등이다. 심지어 나이지리아(106위)나 러시아(105위), 미얀마(102위)는 우리보다도 순위가 높다.
삶의 선택권이 없는 나라
내가 이 지표에 주목하는 이유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민중들에게 삶의 선택권을 주는 데 아예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 기본소득 실시를 강력히 지향하는 벨기에의 경제철학자 필리페 판 파레이스(Philippe Van Parijs)는 삶을 선택할 자유에 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만일 내가 무일푼이라면, 나는 실제로는 유람선 여행에 함께 할 자유가 없다. 내가 굶어 죽는 것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거나 혹은 형편없는 직업을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다면, 나는 실제로는 그 직업을 거부할 자유가 없다.”
그렇다. 대한민국이 삶의 선택권 분야에서 거의 세계 최하위권 수준에 머무르는 이유는 이 나라의 복지체계가 엉망진창이고, 부의 불균등이 너무나 극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꿈을 꾸며 살지 못한다. 꿈? 그게 뭔데? 50대 중반에 들어선 우리 나이 대에서 “너는 꿈이 뭐니?”라고 물어보면 미친 놈 취급을 받는다.
우리의 자녀들이라고 다른가?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꿈을 가지고 그 꿈의 실현을 위해 살라”고 권하는가? 아니면 “꿈같은 소리 작작하고 일단 대학부터 가서 취직부터 하라”고 권하는가? 누가 봐도 후자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아닌가?
그래서 나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삶을 살아가는 나라’가 아니라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나라’라고 종종 묘사한다. 꿈이 없고, 삶을 선택할 자유가 없는 나라에서 사는 것이 어찌 ‘살아가는 것’인가? 그건 ‘죽어가는 것’이다.
나는 부디 이 나라가 삶에 대한 선택권이 있는 나라였으면 좋겠다. 우리의 아이들이 먹고 사는 걱정을 떠나서(도대체 왜 그 어린 나이에 먹고 살 걱정부터 해야 하는가?) 진정 자기의 꿈을 키울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그런 세상을 만들어 물려주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우리에게는 지금보다 나은 사회를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물려줘야 할 책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