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0년 텔레그램 n번방, 박사방 사건은 온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이 사건은 미성년자를 포함한 일반 여성들을 상대로 한 성착취 영상을 해외 모바일 메신저인 텔레그램을 통해 대대적으로 공유·판매한 디지털 성범죄 사건이었다. 그해 3월 16일 ‘박사방’을 운영한 25세 남성 조주빈이 체포되었다. 이 사건 영향으로 2021년 12월부터 성착취물 제작·유포 등 온라인 성범죄에 대한 처벌 범위를 대폭 확대하고, 처벌 수위도 상향한 ‘n번방 방지법’이 시행되고 있다.
자본주의 구조상 수요와 공급은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돌아간다. 공급이 있다면 수요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 사건은 공급책 일부만 잡혔을 뿐 수요자들은 그 존재조차 확인할 길이 없다. 수요자가 다시 공급자가 되는 생산 구조를 가진 디지털 성범죄는 끊이지 않는 수요의 탑 위에 버젓이 새로운 ‘n번방’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것은 여전히 수많은 피해자가 발생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연극 ‘4분 12초’는 디지털 성범죄의 구조적인 문제를 파헤치는 연극은 아니다. 하지만 이 연극은 이런 성범죄가 얼마나 우리 일상 속에 들어와 있는지, 가해자와 피해자가 사회적 편견과 교차되면 어떤 왜곡을 만들어내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관객은, 평범한 여성이자 한 아이의 엄마 ‘다이’가 사건의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변해가는 모습에 주목하게 된다. 극이 끝나면 ‘당신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자리 어디에 서 있는가’란 질문에 답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진실에 다가갈수록 드러나는 진짜 진실
사각의 링 같기도 하고 사각의 화면같기도 한 무대에 엄마 ‘다이’가 흥분한 모습으로 서있다. 아들 ‘잭’의 피묻은 셔츠를 보게 된 것이다. 다이는 남편 ‘데이빗’에게 자초지종을 묻지만 데이빗은 남자 아이들의 작은 다툼이라고 둘러댄다. 이상하게 여긴 다이의 질문에 데이빗은 잭이 여자친구 ‘카라’와의 성관계 동영상을 찍어 온라인에 유포했다는 오해를 받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카라의 오빠가 잭을 폭행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다이는, 아들의 무고함을 밝히기로 결심한다.
열일곱 살 잭은 다이와 데이빗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명문대 법학과 입학시험을 앞두고 있었다. 부부는 아들 잭이 완벽한 삶을 누리게 하는 것이 꿈이었다. 다이는 그런 아들의 미래를 위해 필사적이다. 이들은 잭을 따라다니던 닉이 동영상을 유포한 것으로 확신한다. 가난한 동네에 살며 공부도 못하고 항상 모자란 취급을 받으니 당연히 호기심에 그런 일을 저질렀을 것으로 생각했다.
다이는 카라 역시 피해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평소 카라의 품행이 불량스럽다고 여겨온 다이는 그가 악의적인 소문으로 아들을 곤경에 빠뜨리고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다이는 사건을 들여다볼수록 상상하지 못했던 현실과 불편한 진실에 직면하게 된다. ‘잭은 정말 아무런 잘못이 없는 걸까?’ ‘닉은 진짜 동영상 유출의 범인일까?’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우리 애를 위해서, 사실은 나를 위해서··· 왜냐하면 걔는 나니까!”
다이와 데이빗의 대화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 속에서 발견할 수 없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피해자’이고, 또 하나는 ‘잭의 존재’다. 이 부부의 대화 속에서 피해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아들 잭을 보호하는 것에 생각과 판단이 집중돼 있다. 피해자의 고통이나 피해는 중요하지 않다. 또 아들의 무고함을 증명하기 위해 희생양을 찾는 것을 진실이라 포장한다. 그리고 희생양은 가능하면 더 무지하고 열등하다 판단되는 존재일수록 좋다고 본.
이 작품이 끝날 때까지 아들 잭은 무대에 등장하지 않는다. 엄마 다이는 이 모든 것은 자식을 위한 것이며, 그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라 말한다. 왜냐하면 자식이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 연극은 잭을 등장시키지 않음으로써 엄마 ‘다이’의 변화 과정에 집중하도록 했다. 우리가 눈 감고 묵인하고 지나치는 수많은 진실은 결국 나 자신을 위한 것일 때가 많다. ‘잭’의 존재는 그저 수많은 핑계에 불과하다.
다이가 모성을 빌미로 눈 감아버린 진실은, 결국 작은 틈을 비집고 모습을 드러내고 만다. 닉은 사회적 편견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한다. 카라는 죽어도 지워지지 않을 ‘4분 12초’ 영상의 피해자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싸운다. 무대 위에 등장하는 가해자와 피해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답답한 현실만큼 답답한 결말이다. 가해자는 처벌받지 않았으며 피해자는 일상을 살아내기 위해 애쓴다. 시간이 흘러 그 가운데에 선 엄마 다이는 과연 어떤 현실을 살고 있는지 되묻게 되는 순간이다.
연극 ‘4분 12초’는 5월 14일까지 대학로 극장 쿼드에서 공연된다.
연극 ‘4분 12초’
공연날짜 : 2023년 5월 5일(금)~5월 14일(일) 공연장소 : 대학로 극장 쿼드 공연시간 : 평일 20시/토, 일요일 15시/월요일 공연 없음 러닝타임 : 100분 관람연령 : 만 13세 이상(중학생 이상 관람가) 작 : 제임스 프리츠 연출 : 이 곤 번역 드라마터그 : 마정화 스태프 : 무대 정영/조명 성미림/음악 이승호/보이스코치 최정선/의상 고혜영/분장 김근영/그래픽디자인, 사진 김솔/무대감독 이라임/조연출 곽동우/오퍼레이터 김남균/홍보 정유경/제작피디 권연순 출연진 : 곽지숙, 남수현, 성근창, 박수빈 공연예매 : 인터파크 티켓, 플레이티켓, YES24, 대학로티켓 공연문의 : 02-742-75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