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의 대표 세단인 그랜저가 신형 모델 출시 이후 잇따른 결함으로 빈축을 사고 있다. 차량이 갑자기 멈추는 등 사고 위험이 있는 결함도 발생해 소비자 우려가 크다. 자동차 내 소프트웨어 영역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품질 관리에 구멍이 생겼다는 지적이 나온다.
16일 국토교통부의 자동차리콜센터에 따르면, 전날부터 7세대 그랜저(GN7)의 전자제어장치(ECU)에 대한 무상수리가 진행되고 있다. 그랜저의 사후조치는 이번이 14번째다. 앞서 리콜 2건, 무상수리 11건이 진행됐다. 지난해 11월 출시 이후 6개월 만이다. 매월 두 건 이상의 결함이 발견된 셈이다.
다른 모델과 비교해 출시 초기 사후조치 빈도가 높은 편이다. 6세대 그랜저(IG)는 출시 6개월간 리콜 2건, 무상수리 2건 등 사후조치가 총 4건이었다. 지난해 내수 시장 판매 1위를 차지한 4세대 기아 쏘렌토(MQ4)는 2020년 3월 출시 이후 6개월간 리콜 1번, 무상수리 10건 등 총 11건의 사후조치가 이뤄졌다.
스테디셀러인 그랜저는 판매량이 많은 만큼 파급력도 크다. 한국자동차산업협회에 따르면, 신형 그랜저는 올해 1~4월 기준 약 4만대가 팔리면서 내수 시장 판매 1위를 기록했다. 세대 변경 과정에서 가격이 크게 오른 점도 소비자 분노를 사고 있다. 파워트레인·트림별로 약 350만원씩 비싸졌다. 소비자주권시민회의 배창범 간사는 “가격을 올렸으면 값어치를 해야 하는데, 지속적으로 결함이 나오면서 품질과 만족도는 반대로 가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사후조치는 양면적인 의미를 지닌다.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면, 제작사가 발 빠르게 대처해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으로 볼 수 있다. 사후조치 건수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비판할 사안은 아니라는 얘기다. 현대차 관계자는 “고객 안전을 위해 과거보다 사후조치에 대해 빠르고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며 “모든 문제를 미리 잡기는 어려운 만큼 사후에라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전했다.
사전에 결함을 잡아내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개선이 필요하다. 특히 안전에 영향을 주는 사안에 있어서는 결함자체로만으로 변명의 여지가 없다. 배 간사는 “신형 그랜저 사후조치 가운데 상당수가 운전자 안전과 생명에 직결되는 문제”라며 “빠른 시정조치도 중요하지만, 차량 출시 전 철저하고 충분한 품질 관리를 통해 소비자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배 간사 지적대로,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결함이 발생한다는 점이 문제다. 리콜 건을 보면, 하이브리드 모델 경우 앞차와 간격을 자동으로 맞추며 달리는 스마트크루즈컨트롤(SCC) 모드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해당 모드를 켜고 경사로에서 주행하다가 앞차가 멈춰 차량이 정차할 때, 뒤쪽으로 밀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주차거리경고(PDW)가 먹통이 되는 문제도 발생했다. 주차할 때 주변 물체와 가까워지면 경고음 울리는 기능인데, 간헐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현상이 확인됐다. 경고음이 울리지 않아 후진하다가 다른 차량과 충돌할 우려가 있다.
무상수리 건에도 안전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달리던 차량이 갑자기 멈추는 일이 벌어졌다. 신형 그랜저 온라인 동호회를 중심으로 문제의 현상을 찍은 영상이 여러 건 올라왔다. ‘귀신 보는 차’라는 지적에서 두려움과 불만이 드러난다. 전방충돌방지보조(FCA)는 앞에 차량이나 보행자가 있으면 경고음을 울리고, 운전자가 속도를 줄이지 않으면 스스로 멈추는 기능인데, 앞에 아무것도 없을 때도 긴급제동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소비자들은 사고 위험을 우려해 조치를 받기 전까지는 해당 기능을 끄고 다니는 실정이다.
D단으로 놓고 멈춰있으면 시동이 꺼지고, 하이브리드 모델 배터리가 방전되는 등 결함도 발견됐다.
현대차 조치에 대한 문제 제기도 나온다. 치명적인 결함에 대해 리콜이 아니라 무상수리로 대응했다는 지적이다. 자동차관리법에 따르면, 안전기준에 부적합하거나 설계·제조·성능 문제로 안전에 지장을 주는 경우에는 리콜을 실시해야 한다. 상품성과 관련된 결함은 무상수리로 처리할 수 있다. 무상수리는 리콜과 달리 시정조치 계획을 언론에 공고하지 않아도 된다. 사전에 차주 사비로 수리한 비용에 대한 보상 의무도 없다. 제작사의 서비스 영역이라는 의미다. 또한 리콜은 사후조치 기한이 없지만, 무상수리는 기한 내에서만 이뤄진다.
국토부 관계자는 “자동차 결함·하자 양상이 수천, 수만 가지에 이르는 만큼 리콜과 무상수리 기준을 구체적으로 정하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어 “무상수리도 제작사가 선제적으로 대응해 문제를 해결한다는 점에서는 리콜과 효과가 같다”며 “차량이 정상 운행 가능하도록 제작사가 책임을 이행하는지 여부가 중요하다”라고 사안의 심각성과 다소 동떨어진 답변을 내놨다.
리콜과 무상수리에 대한 판단은 제작사에 달렸다. 법에 명시된 판단 기준은 대략적이고 모호해, 제작사는 부담이 적은 무상수리로 분류할 심산이 크다. 경사로 밀림 현상과 느닷없는 긴급제동 등은 접촉사고로 이어질 우려가 있지만, 현대차가 이들 결함을 무상수리로 처리한 게 대표적이다.
배 간사는 “리콜과 무상수리를 판단하는 기준이 모호하다”며 “현대차가 무상수리로 처리한 사안 중 일부는 리콜을 시행했어야 한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현대자동차 전방충돌방지보조(FCA) 자료사진. ⓒ현대자동차
‘바퀴 달린 스마트폰’ 된 자동차…결함 방지 테스트 강화 필요
연이어 터지는 그랜저 결함은 현대차의 과제를 드러내기도 한다. 현재까지 발견된 결함 14건 중 10건은 소프트웨어 문제에 기인한다. 부품을 교환하거나 수리하지 않고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 이들 중 수리센터에 가지 않고 무선 업데이트(OTA)가 가능한 건 7건이다. 기계적인 결함은 4건이었다.
현대차그룹은 ‘소프트웨어 중심의 자동차(SDV)’로 전환을 강조하고 있다. 차량을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개발한다는 전략이다. 전기차뿐 아니라, 내연기관차도 예외가 아니다. 기존에는 주요 부품마다 달려있던 차량 제어기를 영역별로 통합하는 '기능 집중형 아키텍처'를 개발해 제어기 수를 줄인다. 또한, 2025년까지 모든 차량에 OTA를 기본 적용할 계획이다. 2030년까지 소프트웨어 분야에 18조원을 투자한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신형 그랜저는 현대차가 SDV 전환 길목에서 내놓은 모델이다. 이전 모델 대비 OTA 적용 항목이 2배 이상 증가했다. 엔진·변속기 제어, 차체 자세제어 시스템, 전자제어 서스펜션, 파워 시트 모듈에 더해 지문 인증 시스템, 빌트인 캠, 무드램프, 하이브리드 모델의 고전압 배터리 관리에도 OTA가 적용됐다.
첨단운전자보조시스템(ADAS)도 고도화하고 있다. 이전 모델에는 고속도로 주행보조(HDA)1이 탑재됐으나, 신형은 HDA2를 지원한다. 방향지시등을 켜면 알아서 차로를 바꾸고, 옆 차로에 다른 차량이 다가오면 간격을 벌려준다.
자동차가 ‘바퀴 달린 스마트폰’으로 진화하면서 제작사가 품질 관리에 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소프트웨어 결함은 기계적인 결함보다 발견하기 어려운 만큼, 출시 전 충분한 테스트를 거쳐야 한다는 설명이다.
가령 전방충돌방지보조(FCA)는 카메라와 레이더가 전방 물체를 감지하고 각각의 장치가 인식한 정보를 처리하게 되는데, 특정 환경에서는 정보 처리 결과와 현실 간 괴리가 생길 수 있다. 현대차는 해당 기능 결함에 따른 긴급제동 원인에 대해 ‘민감 작동 강건화 설계 미흡’이라고 설명했는데, 부족한 주행테스트로 최적의 민감도 설정에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D단 정차 시 시동 꺼짐 문제를 야기한 엔진제어장치(ECU)도 운전자 습관을 학습해, 상당한 테스트가 수반돼야 문제를 찾아낼 수 있다. 온라인상에서 ‘베타테스터 차주들 데이터 수집에만 바쁘다’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자율주행을 비롯한 자동차 내 소프트웨어 확장은 거스를 수 없는 세계적인 흐름으로 평가된다. 현대차그룹이 올해 1분기 처음으로 세계 시장 3위에 오르는 등 선전하는 가운데, 소프트웨어 결함에 대한 철저한 관리가 이뤄져야 성장세를 이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이호근 대덕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기계적인 결함은 초기에 발견이 쉽지만, 전자적인 또는 소프트웨어 문제는 오랜 시간 사용하면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며 “실제 출고 전 모든 케이스를 파악해 커버하기는 어려운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다만 “필드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 특히 치명적인 결함을 사전에 잡을 수 있도록 테스트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며 “소프트웨어 결함은 기계적인 결함과 달리 안전성이 위협받는 리스크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판매 후 조치해도 된다는 안일한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