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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염수, 너도 버렸으니 나도...공범의식으로 뭉친 친원전국

[오염수 방류 숨은 쟁점 ⑤] “일본 오염수도 핵 식민주의” 핵으로 바다 오염시킨 핵 추진국의 역사



1954년 3월 1일 이른 아침, 롱겔라프(Rongelap) 환초에서 평온한 아침을 맞이하며 커피를 마시던 존 안자인(John Anjain)은 서쪽 지평선에서 거대한 섬광을 보았다. 빨강, 초록, 노랑 등의 색으로 아름다웠다. 서쪽 지평선에서 떠오른 섬광이었기에, 그것은 분명 태양이 아니었다. 하지만 일출처럼 아름다웠다. 그리고 얼마 후 잿빛 장막과 같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고, 태풍처럼 강하고 따뜻한 바람이 롱겔라프를 휩쓸었으며, 굉음이 이어졌다. 어떤 사람들은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렸다.

이는 ‘비키니 환초 핵실험장’에 관한 유네스코 공식 문서에 기록된 존의 목격담이다. 비키니 환초에서 동쪽으로 약 150km나 떨어진 롱겔라프 주민들은 당시 비키니섬에서 자행된 미국의 핵실험을 이같이 바라만 봐야 했다.

미국이 1954년 3월 1일 비키니 환초에서 벌인 핵실험 캐슬 브라보. ⓒ비키니 환초에 관한 유네스코 문서


핵폐기물 태평양 투기 시작


이날 비키니 환초에서 벌인 핵폭탄 실험은 ‘캐슬 브라보’(Castle Bravo). 미국 최초의 수소폭탄 실험이다. 폭발은 미국 과학자들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히로시마 원폭보다 1000배 큰 규모의 폭발이었다. 이 폭발로 세 개의 섬이 지도에서 사라졌다. 폭 2km 깊이 80m 규모의 분화구를 만들었으며, 200명의 주민이 평화롭고 목가적인 삶을 영위했던 섬은 방사능으로 뒤덮였다. 미국의 핵실험 후 귀향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섬을 잠시 떠난 대다수 주민은 영영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핵 유목민’이 됐다. 롱겔라프 주민들은 당일 밤 머리카락이 전부 빠지기 시작했고, 심한 구토와 설사 그리고 가려움·화상 증상으로 공포에 휩싸였다. 시간이 갈수록 방사능 오염 구역은 점점 넓어졌다. 롱겔라프 주민뿐 아니라 우트릭(Utrik), 우젤랑(Ujelang), 리키에프(Likiep) 환초 주민들도 대피해야만 했다. (▶ 비키니 환초에 관한 유네스코 문서 등 참고)

섬에서 동쪽으로 160km 떨어진 태평양에서는 ‘제5 후쿠류마루호’ 선원들이 참치를 잡고 있었다. 폭발 후 머리 위로 떨어지는 ‘죽음의 재’를 경악스럽게 지켜본 선원들도 구토를 시작했다. 일주일쯤 지나자 머리카락이 뿌리까지 뭉텅이로 빠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픔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것이 선원들을 더욱 몸서리치게 했다. 일본으로 돌아온 선원 1명은 2주 만에 숨졌다. 23명의 선원 중 10여명이 간암, 간경색, 뇌출혈 등으로 죽었다. 살아남은 이들도 암 등 크고 잦은 병치레와 사산 등을 겪으며 힘겨운 삶을 살았다. 하지만 당시 미국 원자력위원회 수장 루이스 슈트라우스(Lewis Strauss)는 방사선 때문에 선원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오늘날 원전 피해자들을 대하는 원전산업계처럼 “방사선 때문이 아니라 산호에서 변환된 물질이 화학적 반응을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도립 제5후쿠류마루 전시관 등 참고)

비키니 환초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됐다. 방사성 낙진은 건강에 해롭지 않다고 했던 핵실험 안전 책임자 스태퍼드 워런(Stafford Warren) 박사는 이 핵실험 이후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1947년 8월 11일 미국 시사 사진잡지 ‘라이프’에 게재한 ‘비키니에서 과학이 배운 것’ 글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오염이 대상 밖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물속의 해조류가 방사성 입자를 흡수하여 작은 물고기에게 전달했다. 이들은 둘째 주에 죽었고, 더 큰 물고기들에게 먹혔다. 더 큰 물고기들은 세 번째 주에 죽었고, 사체가 부패하면서 다시 해조류에 방사능을 전달했다. 탐사대를 지원하는 선박에 해조류가 붙어 자라면 강한 방사능이 강철 선체를 뚫고 탐지됐다. 그럼 선원들의 침대를 옮겨야 할 때도 있었다.

1947년 8월 11일 미국 시사잡지 ‘라이프’에 실린 스태퍼드 워런 박사의 글 ‘WHAT SCIENCE LEARNED AT BIKINI’ ⓒ미국 시사잡지 ‘라이프’ 1947년 8월 11일 자

2014년 11월 자 외교부 간행물 ‘태평양도서국 개황’ 등에 따르면, 미국은 1946년 6월부터 1958년 8월까지 마셜제도의 비키니섬과 네이위탁섬에서 67차례의 핵실험을 했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대표적인 핵산업 국가가 태평양에서 벌인 핵실험은 300회가 넘는다.

미국 등의 국가는 이때부터 태평양 바다를 핵으로 수없이 오염시켰다. 미국이 일본의 오염수 방류 계획에 가장 먼저 지지를 표명한 이유를 예상할 수 있는 지점이다.

책 ‘방사선 피폭의 역사’를 쓴 박찬호 반핵의사회·탈핵신문 운영위원은 지난 18일 민중의소리와의 인터뷰에서 “핵폐기물의 시작은 미국”이라고 말했다. 그는 “양은 비밀에 부쳤기 때문에 어느 정도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미국은 계속해서 핵폐기물을 (태평양에) 버리고 있었다”라며, 미국이 가장 먼저 지지를 표명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핵재처리시설이란 게 있다. 원전에서 발전하고 난 뒤 핵연료봉을 뜯어다가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그런 작업을 하는데, 이 작업을 위한 시설을 핵재처리시설이라고 한다. 대개는 핵폭탄을 만들기 위한 작업이다. 그곳에서 버리는 핵폐기물이 굉장히 많았다. 드럼통 같은 용기에 담아 그냥 버리고, 이런 일이.”

소위 ‘선진국’이라 불리는 국가들은 산업화 과정에서 막대한 양의 핵폐기물을 바다에 버렸다. 이러다가 큰일 나겠다는 우려에 1972년 12월 82개국이 모여 폐기물 해양투기를 하지 말자고 약속한 게 런던협약이다. 해양환경 분야 최초로 이루어진 전 지구적 약속이지만, 협약 위반에 대한 강제조항 미비 등으로 불법투기 방지에 큰 효과를 보진 못했다.

도쿄전력은 홉페이지를 통해 2022년 12월 31일 기준 보관 중인 처리수(오염수) 현황을 이같이 밝혔다. ⓒ도쿄전력

원전에서 나온 물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사용한 옥신(auxin)이란 화학물질을 전쟁 후 민들레를 박멸하기 위한 제초제로 판매하며 화학산업을 키웠던 것처럼, 미국 등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원자력발전소로 핵산업을 키웠다. 핵은 “평화를 위한 원자력”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미국과 소련이 경쟁적으로 이 같은 선전전을 펼쳤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피해와 제5 후쿠류마루호 사태를 겪고 원자력에 대한 두려움이 컸던 일본은 “평화의 원자력”이라는 반복적이고 집요한 선전전으로 자국의 여론을 원전 친화적으로 돌렸다. 그리고 미국과 일본 등 친원전국 중심의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원자력의 세계 평화”라는 구호로 핵산업의 부흥을 이끌었다.

이후 친원전 국가들은 원전을 운용하며 바다를 방사성 물질로 천천히 오염시켰다. 원전을 운영하면서 발생한 핵폐기물 대부분은 재처리시설 또는 방폐장에 보관됐으나, 원전을 식히기 위해 사용한 온배수는 바다에 방류했다. 한국에서도 이 온배수 문제가 여러 번 문제가 됐다. 원전 핵연료봉에 직접 닿은 물은 아니더라도, 이 또한 방사성물질인 삼중수소에 오염된 물이었다. 일본은 이를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투기의 명분으로 사용했다.

일본이 올여름 해양투기를 시작하겠다고 한 오염수는 온배수와는 차원이 다르다. 일본의 오염수는 원전 폭발로 녹아내린 핵연료에 직접 닿은 물이다. 일본은 알프스(ALPS)라는 여과설비로 방사성 핵물질을 걸러내면 된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일본과 도쿄전력의 주장일 뿐이다. 도쿄전력이 측정한 데이터가 사실에 부합하는지 비교할 수 있는 제3자의 데이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객관적이지 못한 데이터조차 문제가 많다. 알프스로 방사성물질을 걸렀으나 방사능 수치가 기준치 이하로 떨어지지 않았다고 도쿄전력이 자백한 오염수는 전체의 70%(2022년 12월 31일 기준)에 이른다. 이중 상당량의 오염수 방사능 수치는 기준치보다 100~1만9909배 높았다. 도쿄전력은 이를 ‘정화 처리 과정 중인 물’이라는 뜻의 “처리도상수”라고 불렀다. 기준치 이하라고 주장하는 30%의 물은 “처리수”라고 불렀다. 삼중수소와 탄소14와 같은 방사성물질은 알프스로 걸러낼 수 없기 때문에, 처리수라는 30%의 물에도 엄청난 양의 방사성 물질이 남아 있었다.

핵산업계는 알프스로 처리하면 안전하다고 끊임없이 반복해서 선전했다. 대선 때부터 ‘친원전 공약’을 선보인 한국의 여당 국민의힘도 비슷한 취지로 선전전을 벌였다. 지난 19일에는 “내 앞에 후쿠시마 물 1L가 있다면 바로 마실 수 있다”고 말해 논란이 된 웨이드 엘리슨 영국 옥스퍼드대 명예교수를 국회로 초청해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웨이드 앨리슨 옥스포드대 명예교수가 19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국민의힘 '우리바다 지키기 검증 TF' 주최로 열린 초청간담회에서 '방사능 공포괴담과 후쿠시마'를 주제로 특강에 앞서 자료를 확인 하고 있다. 2023.5.19. ⓒ뉴스1

바다에 버리는 이유
“이 외에 인간에게서 영원히 떼어놓을 방법이 없다”


이런 물은 굳이 일본에 둘 필요가 없다. 더 빨리 방류해야 한다.

국민의힘이 개최한 기자간담회에서, 웨이드 교수는 ‘오염수가 안전하다면 일본 내수용으로 사용하면 안 되느냐’는 CBS 기자의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웨이드 교수의 말대로 먹을 수 있는 안전한 물이라면, 굳이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으며 바다에 버리지 말고, 일본에서 사용하면 되지 않느냐’라는 취지의 질문이었다. 질문의 취지에서 벗어난 답변이 나오자, 기자가 한 번 더 취지를 반복 설명하면서 던진 질문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얼른 방류해야 한다고 답할 뿐이었다. 이 외에도 이날 웨이드 교수는 “방송에 출연해서도 마실 의향이 있지만, 정치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에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플루토늄보다 산소가 더 위험하다”, “일본 후쿠시마 수산물은 한국의 수산물, 세계 여느 지역 수산물과 마찬가지다” 등의 발언으로 기자들을 놀라게 했다. 오염수는 안전하다는 그의 과장된 발언은 오히려 오염수가 위험하다고 외치는 것 같은 효과를 줬다.

안전하다는 오염수를 굳이 바다에 버리려는 이유는 뭘까?

비키니 환초 핵실험 안전을 담당했던 워런 박사의 라이프지 글을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다. 워런 박사는 라이프지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방호장갑을 벗은 사람은 산(acid)으로 손의 바깥쪽 피부층을 녹여야 했고, 목표 지역에서 입었던 옷은 너무 오염되어 세척할 수 없었다. 수백 켤레의 신발과 장갑, 몇 톤의 옷을 바다에 수장해야 했다. 그 외에 인간에게서 영원히 떼어놓을 방법이 없었다.

지난 20일 서울 중구 세종대로에서 열린 후쿠시마 오염수 투기 저지 대회에서 시민들이 일본의 방사능 오염수 해양투기 반대 윤석열 정권 규탄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3.05.20 ⓒ민중의소리

“핵 식민주의”


2011년 3월 후쿠시마 제1원전 폭발은 비극이었지만, 태평양을 향해 불었던 바람은 일본에 큰 행운이었다. 비키니·롱겔라프 환초 등 마셜제도 주민들은 그런 행운을 누리지 못했다. 비키니 환초에서 동쪽으로 150km 떨어진 롱겔라프 주민 등은 핵실험에 의한 방사능 바람을 피할 수 없었다. 이에 마셜제도 주민들은 고통의 세월을 겪었다. 유산과 사산 급증 그리고 장애아 출산이 이어졌고 생존자 대부분은 갑상선 이상, 암 등을 겪었다. 피폭당한 롱겔라프 주민들이 1957년 고향에 돌아갔다가 1985년 그린피스 레인보우 워리어 호를 타고 다시 대피했던 이유이며, 태평양도서국이 일본의 오염수 방류 계획에 가장 강하게 반대하고 있는 이유다. 태평양도서국포럼(PIF)이 일본의 계획을 검토하기 위해 임명한 5명의 독립적인 과학자들은 도쿄전력의 데이터에서 여러 모순되는 지점을 지적하며 “신뢰할 수 없다”고 밝혔다.

뉴질랜드에서 활동하는 사회학자 칼리 버치(Karly Burch)는 ‘일본 오염수 해양투기 계획’을 “태평양에서 이미 오랜 역사를 지닌 ‘핵 식민주의’(nuclear colonialism)의 한 예”라고 말했다. 일본의 계획이 태평양 주민의 주권, 자결권, 그리고 그들이 의존하는 바다에 대한 무시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다만, 박찬호 반핵의사회 운영위원은 “핵을 사용하면 필연적으로 문제가 발생한다”며 ‘핵 식민주의’라는 시각도 부족하다고 말했다. 인류로부터 길게는 수만 년을 차단해야 하는 핵폐기물 문제, 체르노빌·후쿠시마 등과 같은 재난은 현재 인간의 과학기술로는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에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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