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숙농성이 예고된 대법원 인근에 펜스를 설치했다. ⓒ금속노조 제공
경찰이 25일 불법파견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1박2일 투쟁을 원천 봉쇄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1박2일 투쟁은 지난해부터 여러 차례 진행됐지만 노숙 농성 자체를 차단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윤희근 경찰청장이 민주노총 건설노조 집회를 빌미로 사실상 집회·시위에 대한 강경 대응을 예고하자마자 벌어진 일이다.
이날 민주노총 금속노조와 비정규직 이제그만 공동투쟁은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1박2일 투쟁을 진행한다.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법원 앞까지 2시간여 행진한 뒤, 대법원 앞에서 문화제와 노숙 농성을 이어가는 게 주된 일정이다.
이들이 대법원 앞에서 농성하는 이유는 대법원에 계류돼 있는 불법파견 관련 판결을 조속히 해달라는 요구를 하기 위해서다. 금속노조에 따르면, 현재 대법원에 계류돼 있는 불법파견 관련 사건은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한국지엠, 현대제철, 아사히글라스, 포스코 등이다. 이 외에도 10개 사업장에서 일하는 5천여명의 노동자들의 불법파견 관련 소송이 진행 중이다.
노숙 농성은 시민의 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불법파견 피해 당사자 50여명이 1인용 텐트를 일렬로 설치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지난해부터 여러 차례 같은 장소에서 노숙 농성을 했고, 불과 한 달여 전에 열린 농성도 큰 문제 없이 마무리됐다.
그런데 전날, 경찰이 돌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야간문화제와 노숙 농성을 금지하겠다고 통보해 왔다. 경찰은 대법원 앞에 텐트를 설치할 수 없도록 펜스를 치고, 노숙 농성을 준비 중인 이들에게 "엄정하게 대처하겠다. 현장에서 해산 조치하겠다"는 엄포를 놓은 것으로 전해졌다.
차헌호 공동투쟁 공동소집권자는 민중의소리와의 통화에서 "그동안 1박2일 농성을 하면서 민원이 들어온 적도 없었다. 저희도 시민들 통행에 최대한 불편을 끼치지 않기 위해서 텐트를 일렬로 쳤고, 대법원 앞 인도가 넓어서 텐트를 설치하려는 범위보다 3배가량 넓은 통행로가 보장된다"며 "오히려 경찰이 펜스를 치면서 시민들에게 더 불편함을 끼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라고 꼬집었다.
공동투쟁에 따르면, 경찰은 "오래전부터 대법원 앞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 것을 안다"면서도 "지금은 분위기가 아니다. 위에서 강경대응하라고 공문이 내려왔다. 청장 지시도 있고, 대통령 발언도 있어서 지난번처럼 조율해서 진행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윤석열 정부가 헌법으로 보장된 집회·시위의 자유를 박탈하고, 국민의 자유와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다"며 "윤석열 정부의 반민주적 폭거에 맞서 엄정하게 대응할 것이다. 끝까지 평화롭게 문화제와 노숙 농성을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경찰의 대응이 180도 바뀐 이유는 경찰 지휘부의 기조와 연관된 것으로 해석된다. 앞서 진행된 건설노조의 1박2일 상경 투쟁을 두고 보수언론과 정부·여당이 일부 시민의 불편만을 과도하게 부각하며 비난을 퍼붓자, 윤희근 경찰청장은 "재발 방지를 위한 특단의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경찰청장이 집회 대응과 관련해 언론 앞에서 입장을 발표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윤석열 대통령도 '공권력의 엄정한 법 집행'을 지시했다.
지난 23일 익명 커뮤니티에 올라온 경찰 내부 문건에는 이러한 분위기가 잘 담겨 있었다. '경비국장 주재, 최근 대규모 집회 사후평가 회의 결과'라는 제목의 문건에는 건설노조의 집회를 언급하며 "경찰의 안일한 대응에 대한 비판이 있다. 구성원 모두가 엄중한 상황임을 인지하고 전열을 재정비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특히 "이번 고용노동청 앞 도로 점거 사례와 같은 상황이 자주 발생할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단계적인 해산 및 검거 훈련을 실시하겠다"고 했다.
실제, 지난 24일부터 내달 6일까지 전국 기동대 131개 중대를 동원한 집회 대응 훈련이 진행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의 불법집회 해산 훈련은 2017년 이후 6년 만이다.
경찰 내부에서도 지휘부의 방침에 거센 반발이 터져 나오고 있다. 한 경찰관은 공문에 담긴 '이번 기회에 모든 기동대원들의 정신 재무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내용을 문제 삼으며 "정신 무장이 필요한 건 책임 떠넘기기 바쁜 무책임한 지휘부"라고 꼬집었다. 또 다른 경찰관도 "앞으로 더 필요한 건 현장 기동대원들의 정신 재무장이 아니라 경찰청 지휘부의 지휘 역량과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한 모습"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