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민영화 논란’에도 지난 16일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를 통과한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법안’과 관련해, 루게릭병 환자가 분노하며 한 말이다. 26년 넘게 루게릭병과 사투를 벌인 김태현 모두함께하는세상 회장은 25일 국회 토론회에서 “국회의원들이 이것을 입법화하려, 정부와 금융위까지 이것을 합법화하려고 변명하는 게 참 가슴 아픈 일”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김성주 더불어민주당 의원, 강성희 진보당 의원, 무상의료운동본부, 한국암환자권익협의회 등은 이날 국회의원회관 제9간담회의실에서 ‘보험업법 개정안 논란 청구간소화인가 의료정보보호 해제인가’ 토론회를 열었다.
토론회는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를 염원하는 민간보험회사와 이 법을 추진하는 정부와 국회에 대한 성토대회를 방불케 했다. 민간보험회사들이 ‘가입자의 편익을 위한 것’이라면서 이 법안 통과를 요구하지만, 실상은 정작 중요한 고액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기 위해 이 법이 악용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한 흉부외과 의사는 “아무리 포장해도 본질은 숨길 수 없다”라며 “이름부터 ‘실손보험 이윤증대법’이라고 바꿔야 한다”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항암치료를 받게 됐을 때 보험회사 집중관리 대상이 된 경험이 있는 지순현 한국암환자권익협의회 사무국장은 “(항암치료를 받는 와중에도)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으려는 보험사와 온 힘을 다해 싸워야만 했다”라며 “이런 것을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은 집권하자마자 여러 방면으로 의료민영화 논란의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다. 그런데 여기에 일부 야당 의원까지 별 문제의식을 갖지 않고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심사소위를 통과시킨 상태다.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란, 실손보험 청구 절차를 보험개발원 등 중계기관에 위탁해 자동 전산화하는 제도다. 기존 실손보험 청구는 진료 받은 환자 중 높은 의료비 등의 문제로 실손보험 청구가 필요한 환자가 병원이나 약국으로부터 받은 증빙서류를 보험설계사 또는 보험회사에 직접 보내 청구하는 식인데, 이 법이 통과되면 환자의 모든 진료비용이 크든 적든 자동으로 보험회사에 청구된다. 문제는 이같이 자동 전산화된 보험가입자의 의료정보가 보험회사가 축적하여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의사·환자·시민사회 단체들은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가 이루어질 경우 민간보험회사들이 고액의 보험금을 지급 거절하거나, 큰 병에 걸릴 사람을 가려내는데 축적된 정보들을 적극 활용할 것이라고 봤다. 1~2만원 상당의 소액 지급은 늘더라도 수천만 원 상당의 고액 지급은 줄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게다가 정부가 중계기관으로 지정하려는 ‘보험개발원’은 공공기관이 아니다. 보험개발원은 민간보험사들이 민간보험산업 발전을 위해 출자하여 설립한 민간연구기관이다. 민간보험회사의 이익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민간기관인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등 의사단체가 최초에 중계기관으로 논의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하 심평원)을 반대했다는 핑계를 대며 민간기관인 보험개발원을 중계기관으로 지정하려 한다. 하지만 의협은 보험개발원을 중계기관으로 지정해도 된다고 동의한 적 없다.
정형준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의사)은 “(민간)보험사의 선의를 단언할 수 있나?”라며 “낙전(작은 돈)은 신속하게 처리하더라도 입원질환(큰 돈)은 회피하려는 시도로 봐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또 정 위원장은 “의협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심평원을 놓아두고 사기업의 연합체인 보험개발원을 중계기관으로 하여 전 국민 80%의 개인질병정보를 집적한다는 것은 개인질병정보 악용 가능성 등의 이유로 안 된다”라고 강력히 반대했다. 그는 “한국의 자료보안이나 악용 현황을 보면 (민간)보험회사가 보험자료를 바탕으로 이미 2차 가공을 한 예가 있고, 거의 모든 사적 데이터베이스가 누출된 바 있다”라며 전 국민 건강정보가 일종의 ‘식별정보’로 쓰일 수 있음을 경고했다. 보험사들이 축적한 개인질병정보로 가입자를 가려 받거나 갱신 시 걸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정 위원장은 이 같은 PPT 자료를 제시하며 미국식 의료민영화를 우려했다. ⓒ보건의료단체연합 제공
더 나아가 그는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등으로 민간보험 산업을 활성화하면 “한국의료제도에 더 큰 파국을 불러올 것이 자명하다”고 경고했다. 민간보험의 확장은 곧 공적의료보험의 축소를 불러오기 때문에, 결국 미국식 의료민영화로 향할 수밖에 없다는 경고다.
이날 토론회 토론자로 참석한 김종민 의협 보험이사는 심평원뿐만 아니라 보험개발원도 중계기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재차 강조했다.
김 이사 또한 민간보험회사의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요구에 “지급 및 갱신 거절 등을 통해 손해율을 낮추려는 숨은 의도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김 이사는 ‘보험가입자의 편익 증대’가 목적이라는 민간보험사 측의 주장을 거짓으로 보는 이유를 다음과 같은 사례로 설명했다. “보험금을 청구하려면 보험사에 전화해서 팩스번호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받은 팩스번호도 딱 한번만 쓸 수 있는 번호다. 추가 서류를 내려면 또 전화해서 물어야 한다. ... 한 보험사는 얼마 전에 민간 핀테크 서비스를 모두 중단했다. 간소화 서비스를 해봤더니 실제 보험사에 도움이 안 된다면서 중단한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할 수 있는 청구 간소화 절차는 갖추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현재도 애플리케이션으로 영수증을 보험사 측에 보내 실손보험 청구를 간편하게 할 수 있는 서비스가 있다. 이는 민간 핀테크 회사들이 수행하고 있는데, 이날 토론회에는 이 기업 관계자들도 참석해 정부가 추진하는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에 반대했다. 이 기업들은 보험개발원을 중계기관으로 한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를 하지 않아도, 보험사들이 노력만 하면 지금 현재 구조에서도 충분히 보험가입자의 편익을 높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성주 한국암환자권익협의회 대표는 “지난 수년 동안 중증 암 환자들이 실손보험금을 청구하면 보험회사들은 약관에도 없는 여러 가지 이유나 회사규정을 들어 보험금 지급을 거절해 왔다. 거절 사유도 다양해 각 보험회사마다, 동일 보험회사 직원마다 각기 다른 잣대로 보험금 지급을 거절했고, 그때마다 금융당국 등에 중증 암환자가 목이 터져라 민원을 제기했지만, 누구 하나 환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도움을 준 적 없다”라며 “그런데 갑자기 국민 편익을 위한다면서 이렇게 일사분란하게 보험회사들의 숙원사업인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에 한 목소리를 내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