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완배 협동의 경제학] 정의로운 민주시민과 일베 또라이가 공존하는 나라

가끔 한국에서 살다보면 이 나라의 정체성이 두 개가 아닌가 하는 헛갈림을 느낄 때가 있다.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운 정의로운 촛불 시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 나라는 실로 아름답고 강인한 민중을 보유했구나’ 감탄하다가 단식하는 세월호 참사 유족들 앞에서 치킨과 피자를 처먹는 인간 말종들을 보면서 ‘뭐 이런 미친놈들이 득세하는 나라가 다 있어?’라는 혐오감이 들기도 한다.

어떤 사회건 진보와 보수가 공조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 나라는 그 공존의 강도가 너무 심한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이토록 정의로운 시민과 이런 상또라이들이 함께 살아간다는 게 과연 가능하긴 한 건가?

그래서 오늘 칼럼에서는 이에 관해 2008년 <사이언스>에 실린 흥미로운 논문 하나를 소개하려고 한다. 행동경제학자 베네딕트 헤르만(Benedikt Herrmann) 노팅엄 대학교 교수가, 크리스찬 퇴니(Christian Thöni), 시몬 개히터(Simon Gächter) 등과 함께 발표한 연구다.

정의로운 민주시민의 이타적 처벌

실험경제학에서 종종 사용하는 게임 중에 독재자 게임이라는 것이 있다. 게임 규칙은 이렇다. 실험 참가자들을 A와 B 두 그룹으로 나누고, A에게 1만 원을 준 다음, 그 돈을 B그룹 파트너에게 마음대로 나눠주라고 요구한다.

얼마를 나눠주는지는 순전히 A 마음이다. 예를 들어 이기적인 인간이라면 0원을 주고 자기가 1만 원을 다 가질 수도 있고, 테레사 수녀님 같은 이타적인 분이라면 만 원을 다 줄 수도 있다. 반면 돈을 받는 B에게는 어떠한 권한도 없다. A가 주는 대로 받아야 한다. 이 게임의 이름이 독재자 게임인 이유다. 전권을 쥔 A가 독재자라는 이야기다.

인간이 주류경제학이 전제하는 호모에코노미쿠스라면 A는 돈을 나눠줄 이유가 없다. 나의 이익을 극대화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 실험을 해보면 A는 평균 25% 정도를 B에게 나눠준다. 이것만 봐도 우리는 호모에코노미쿠스가 아니라는 사실이 입증된다.

그런데 이 게임에 변수를 하나 개입시킨다. 제 3자인 C가 관찰자로서 게임을 지켜보는 것이다. 그리고 C 또한 게임 시작 전에 만 원을 받는다.

그런데 C에게는 특이한 권한이 있다. A그룹 멤버 중에 얍실한 놈이 있어서, 만원을 다 들고 튀었다고 가정하자. 이런 거 옆에서 보면 솔직히 엄청 얄밉다.

이때 관찰자 C는 이기적인 A를 처벌할 수 있다. 어떻게 하느냐? 자기가 받은 돈 만 원 중에서 얼마를 내면, 그 돈의 세 배에 해당하는 돈을 A로부터 진행자가 빼앗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예를 들어 A 중 이기적인 얍실이가 만원을 다 가져갔을 때, 관찰자 C가 열이 받아서 A를 응징하기 위해 자기돈 1000원을 진행자에게 내면 게임 진행자는 1000원의 세 배인 3000원을 A로부터 빼앗는 거다.

만약 C가 매우 정의로운 사람이라면, 3000원을 내서 이기적인 A로부터 9000원쯤 빼앗아 올 수도 있다. 제 3자가 게임에 개입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게임을 ‘제 3자 처벌(Third-party punishment) 게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C가 자기 호주머니에서 얼마를 꺼내건 C에게 돌아오는 돈은 한 푼도 없다는 점이다. 1000원을 내건 3000원을 내건 그 돈은 오로지 A를 응징하는 데에만 사용이 될 뿐이다.

주류 경제학 입장에서 보면 C가 굳이 자기 돈을 내서 이기적인 A를 처벌할 이유가 없다. 자기 돈만 날리고 이익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실제 실험을 해보면 A가 B에게 5000원 이하를 제공했을 때, 그러니까 A가 더 많은 돈을 가지겠다고 욕심을 부렸을 때, 관찰자 C 멤버 중에 무려 55%가 자기 지갑에서 돈을 꺼내서 A를 처벌한다.

이 말은, ‘내가 손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저런 욕심쟁이를 가만 두고 볼 수는 없어!’라고 생각하는 정의의 사도가 생각보다 매우 많다는 뜻이다. 이 게임의 또 다른 이름이 ‘이타적 처벌 게임’인 이유이기도 하다.

칼럼 맨 앞에서 언급한 우리나라의 정의로운 민주시민들이 바로 이런 이타적 처벌 참여자들이다. 우리는 왜 귀한 내 돈, 귀한 내 시간 들여가며 그 추운 겨울에 촛불집회 나갔나? 정의감이 넘치는 인류의 속성, 즉 이타적 처벌 성향이 있기 때문이었다.

또라이들의 반사회적 처벌

그런데 이 게임을 해보면 이타적 처벌을 감행하는 정의로운 민주시민과 달리 진짜 황당한 또라이들이 가끔 나타난다. 헤르만 교수의 실험에서 제 3자 역할을 맡은 C 중에는 이기적인 사람을 처벌하는 게 아니라 착하고 협력적인 사람을 찾아 굳이 처벌을 하는 미친놈이 종종 나타난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A중에 이타적인 사람들은 자기는 대충 1000원만 챙기고 9000원을 B에게 나눠주는 사람들이 있다. 참 존경스러운 협동적 인물들이다.

그런데 관찰자 C 중 어떤 또라이들은 바로 이런 이타적 A의 돈을 굳이 빼앗아 온다. 예를 들어 이타적인 A가 9000원을 B에게 나눠주고 1000원만 챙겼다면 C는 그 1000원 챙긴 것도 고깝다면서 자기 돈 333원 내고 그 남은 1000원을 빼앗아버렸다는 거다.

이건 무슨 상또라이짓인가? 헤르만 교수는 처음에 이런 현상이 발견됐을 때, ‘저 사람들이 게임 규칙을 이해를 못했구나’라고 믿었다. 하지만 게임 규칙을 다시 잘 설명하고 여러 차례 게임을 반복해도 관찰자 C중에 굳이 자기 돈을 쓰면서까지 도덕적이고 이타적인 사람을 집중 공격하는 엽기적인 또라이가 꼭 나오더라는 것이다.

세월호특별법을 촉구하는 시민들의 단식농성장이 있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일간베스트 일부 회원과 자유대학생연합 소속 대학생들이 식사를 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2014.09.06 ⓒ뉴시스

굳이 자기 돈 내고 자기 시간 들여 단식하는 세월호 유족들 앞에서 치킨과 피자를 처먹는 일베들, 바로 이런 자들이다. 이런 또라이들의 행태를 헤르만 교수는 반사회적 처벌(Antisocial punishment)이라고 불렀다.

이 두 가지가 공존하는 나라

이제 헤르만 교수 팀 연구의 진짜 결론을 살펴볼 차례다. 이 연구는 특이하게도 실험을 총 16개 나라의 대표 도시에서 진행했다. 그리고 이 16개 도시 중에는 서울이 포함돼 있다.

참고로 연구 대상이 된 16개 도시는 미국의 보스턴, 오스트레일리아의 멜버른, 영국의 노팅엄, 스위스의 장크트갈렌과 취리히, 중국의 청두, 독일의 본, 덴마크의 코펜하겐, 우크라이나의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 터키의 이스탄불, 벨라루스의 민스크, 러시아의 사마라,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 그리스의 아테네, 오만의 수도 무스캇, 그리고 서울이었다. 그냥 아무렇게나 뽑은 도시들이 아니고, 각 지역의 독특한 문화를 가진 문화 대표 도시들을 뽑은 것이다.

실험을 해보면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의 이타적 처벌이 가장 강하다. 그만큼 이 도시 시민들의 정의감이 강하다는 이야기다. 덴마크의 코펜하겐이 2위, 영국 노팅엄, 터키 이스탄불, 스위스 취리히, 미국 보스턴도 상위권이다. 그런데 자랑스럽게도 서울이 노팅엄 취리히 이스탄불과 거의 박빙으로 6위를 차지해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이건 충분히 이해가 되는 결과다. 우리나라는 촛불혁명을 완수했을 정도로 정의로운 민주시민들이 가득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짜 황당한 대목은, 이런 정의로운 도시 서울이 반사회적 처벌 실험, 즉 또라이들이 얼마나 많이 사는지를 측정한 실험에서도 16개 도시 중 7위로 상위권에 올랐다는 점이다. 그것도 4, 5, 6위와 거의 차이가 없는 아슬아슬한 7위였다.

이건 정말 이례적인 일이다. 이타적 처벌이 강한 나라들, 즉 시민들의 정의심이 강한 도시는 대부분 이런 반사회적 처벌 성향이 매우 낮기 때문이다. 정의로운 사람들이 많을수록 이런 또라이들이 발을 못 붙이는 게 상식 아닌가? 실제로 또라이가 적은 대표적 도시들은 보스턴, 멜버른, 노팅엄, 취리히, 본, 코펜하겐 등으로 모두 이타적 처벌에서 상위권을 달린 도시들이었다.

반면에 또라이들이 엄청 많은 도시 1위는 오만의 무스캇이었고 2위는 그리스 아테네였는데 이 두 도시는 이타적 처벌, 즉 정의로운 시민들이 많은 도시 기준으로 최하위권이었다. 벨라루스의 민스크, 러시아의 사마라,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 등도 또라이들이 많고 이타적 정의로운 시민이 적은 곳들이었다.

그런데 이 연구에서 제일 특이한 도시가 바로 서울이었다. 서울은 이타적 보복 측면에서도 6위에 올라있는 상당히 정의로운 도시였지만 반사회적 처벌에서도 16개 도시 중 7위인 또라이 다수 보유국이었다. 이 두 가지 현상이 공존하는 도시는 서울이 유일했다. 정의로운 민주시민도 많고, 또라이도 그만큼 많다. 대한민국은 참으로 이상한 나라다.

도대체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 서울에 대한 직접적 해석은 아니었지만 헤르만 교수는 이 연구에 이런 힌트를 제공한다. 또라이들이 많은 도시에서 유일하게 발견된 공통된 특징이 하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세계가치조사(world value survey) 결과 준법정신과 시민규범이 전부 하위권에 처진 도시들이라는 이야기다. 즉 법을 잘 지키고, 시민들 사이에 합의된 규범을 잘 지키는 상식이 있는 도시에서는 그런 또라이가 별로 없다는 뜻이다.

나는 이 해석을 보며 민주시민과 또라이가 공존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투쟁의 나라이자 정의로운 시민이 가득한 이 나라에 언젠가부터 법을 넘어서는 탈법적 존재들이 권력을 쥔 것이다. 이들은 합의된 시민의 규범도 거침없이 파괴한다.

재벌과 군인, 검사 권력 커넥션에서 법질서는 개판이 된다. 재벌은 죄를 저질러도 감옥에 안 간다. 이러니 정의로운 시민들 속에서 또라이들이 양산되기 시작한다. 한국이 민주시민과 일베 또라이가 공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이상한 나라가 된 이유가 바로 이것 아니겠나?

그래서 이 나라의 정치가 그렇게 중요하다. 정의로운 시민들을 탄압하며 재벌과 기득권을 옹호하는 정치가 계속될수록 이런 또라이들은 더 양산될 것이다. 물론 우리 정의로운 민주시민들의 기개도 결코 꺾이지는 않겠지만 이런 또라이들과 굳이 우리가 공존해야 할 이유는 없다.

선거를 통해, 시민운동을 통해, 활발한 SNS 활동을 통해 우리 민주시민들은 이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 일베에서 멍멍이 소리나 찍찍 뱉어내고 세월호 유족 앞에서 피자와 치킨을 처먹는 이 미친 또라이들을 제거하고 이타적 처벌의 정의가 넘치는 나라를 만들어야 할 의무가 우리 앞에 있다.

기사 원소스 보기

기사 리뷰 보기

관련 기사

기사 원소스 보기

기사 리뷰 보기

관련 기사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