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저가 배터리를 앞세워 시장 확대에 나서고 있다. 한국에서는 ‘주행거리가 짧아 한계가 있다’며 뒷전 취급해 온 리튬인산철(LFP) 배터리다. 중국이 신기술로 LFP의 주행거리를 400km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탈 만해졌다’는 분위기다. 한국 배터리 3사도 LFP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늦었지만 다행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8일 에너지 전문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1∼4월 올해 전기차 배터리 세계 시장 점유율 1, 2위는 각각 CATL(35.9%), BYD(16.1%)로 모두 중국 기업이다. 두 기업 합산 점유율은 52.0%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전년 동기(45.9%) 대비 6.1%p 올랐다. 양사의 배터리 사용량은 전년 동기 대비 각각 55.6%, 108.3% 증가했다.
한국 배터리 3사 점유율은 총 23.4%로 전년 대비 2.8%p 하락했다. LG에너지솔루션은 3위, SK온은 5위, 삼성SDI는 7위를 각각 기록했다. 이들 기업의 총 배터리 사용량은 지난해보다 33% 늘었다. 전반적으로 성장세를 이어가고는 있지만, 중국에 비해 더디다.
중국 기업은 자국을 제외한 시장에서도 가파른 성장세를 보인다. LG에너지솔루션에 이어 세계 2위를 기록한 CATL 점유율은 26.5%로, 6.4%p 상승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전년과 동일한 27.8%로 집계됐다. 격차가 줄어드는 모습이다.
SNE리서치는 “중국 내수 시장 성장률이 낮아지고 중국 업체 간 경쟁이 심화함에 따라 중국 기업의 해외 진출이 본격화될 것”이라며 “중국 기업이 LFP 배터리를 중심으로 해외 시장을 공략할 것으로 보여, 유럽을 중심으로 시장 점유율 변화가 주목된다”고 언급했다.
LFP 배터리 채용이 확산하면서 중국 기업 존재감이 커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세계 LFP 배터리 가운데 95% 이상이 중국에서 생산되며, 전기차용 LFP 배터리 공급은 CATL과 BYD가 80% 이상을 차지한다. 한국 배터리 3사는 아직 LFP 배터리 양산 전이다.
테슬라는 모델3와 모델Y 스탠다드 트림에 LFP 배터리를 탑재한 것으로 알려졌다. 포드는 올해부터 머스탱 마하-E SUV, 내년부터 전기 픽업트럭 F-150 라이트닝에 CATL의 LFP 배터리를 사용하기로 했다. 현대차그룹도 LFP 배터리 적용을 확대할 방침이다. 지난 3월 인베스터 데이에서 “기존의 NCM(니켈·코발트·망간)에 더해 LFP까지 배터리 타입을 다변화해 선진 시장부터 신흥 시장을 포함한 다양한 시장의 수요에 대응하며, 배터리 공급업체 다변화를 추진해 가격 경쟁력을 개선할 것”이라고 밝혔다. KG모빌리티가 올해 하반기 출시할 토레스 EVX에는 BYD의 LFP 배터리가 탑재된다.
태생적 한계 깨고 400km 달성한 중국 LFP 배터리
LFP 배터리는 NCM 등 삼원계 배터리와 함께 전기차 배터리 양대 축을 이룬다. LFP와 삼원계 배터리는 양극재 구성 물질에 따라 구분된다. 양극재는 배터리 용량과 전압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다. LFP는 탄산리튬과 인산, 철을 배합해 만든다. 삼원계는 수산화리튬에 니켈, 코발트, 망간, 알루미늄 등을 섞는다.
LFP 배터리는 가격 면에서 유리하다. 삼원계 배터리에 들어가는 니켈과 코발트 등 고가의 광물가 들어가지 않는다. 하나증권의 ‘LFP에 대한 고찰’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3월 기준 철의 1톤당 가격은 127달러다. 반면, 니켈과 코발트는 각각 2만달러, 3만달러 이상이다. LFP 배터리 생산 비용은 동일 용량의 삼원계 배터리보다 약 30% 저렴하다.
광물 수급 측면에서도 LFP가 유리하다. 철은 세계 매장량이 1,700억톤이 달할 정도로 흔한 광물이다. 니켈 매장량은 9천만톤, 코발트는 710만톤이다. 지정학적인 요인도 작용한다. 하나증권은 “철의 최대 매장지는 호주와 브라질이며, 유럽과 캐나다도 상당량의 철광석을 수출하고 있다”면서 “니켈과 코발트 경우 매장량도 적거니와 중국과 외교적으로 가까운 남미와 아프리카 등지에 주로 매장돼 있어, 미국과 유럽 입장에서는 해당 국가들에 대한 업스트림(광물 채굴과 정제, 제련 등 후방산업) 의존성이 커지는 부담이 있다”고 설명했다.
LFP 배터리의 문제는 1회 충전 주행거리가 짧다는 점이다. 에너지 밀도가 낮아 배터리 용량을 늘리는 데 한계가 있다. 물질의 특성상 셀 자체의 에너지 밀도를 개선하기 어렵다. 1kg당 평균 에너지 밀도가 LFP는 128Wh, 삼원계는 154Wh 수준이다. 배터리를 많이 탑재해 전기차 주행거리를 늘릴 수는 있으나, 공차중량이 무거워져 효율성이 떨어진다.
중국 기업은 LFP 배터리의 낮은 에너지 밀도를 조립 공정 개선으로 해결하고 있다. 배터리는 기본적으로 셀-모듈-팩 단위로 구성된다. 양극재를 비롯해 음극재, 분리막, 전해질 등 소재로 이뤄진 전지의 최소 단위가 셀이다. 여러 개의 셀을 묶어 모듈을 만들고, 모듈로 팩을 구성해 전기차에 탑재한다. 모듈을 없애고 그 공간에 추가적인 셀을 채우는 방식이 도입되고 있다. 이른바 셀-투-팩(CTP) 기술이다.
CTP 기술을 적용하면 공간 활용성이 커져 팩 단위에서 에너지 밀도가 향상되는 효과가 있다. CTAL은 지난 2019년부터 CTP 배터리를 양산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3세대 CTP 기술을 적용한 ‘기린(Qilin)’을 출시했으며, 올해 하반기 대량 생산에 돌입할 예정이다. CATL에 따르면, 기린 배터리의 에너지 밀도는 LFP 160Wh/kg, 삼원계 255Wh/kg 수준이다. BYD도 2020년부터 CTP 기술을 기반으로 한 ‘블레이드’를 생산하고 있다.
CTP 기술을 바탕으로 LFP 배터리가 변곡점을 맞았다. 소비자의 심리적인 장벽인 주행거리 400km를 달성한 것이다. 최근 블룸버그는 미국에서 팔리는 전기차 평균 주행거리가 300마일(약 480km)에 육박한다면서, 세계 시장 평균보다 3분의 1가량 높다고 전했다. 유럽 등 주요 시장에서는 400km대 주행거리면 충분한 상품성을 갖는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미국에서도 충전 인프라가 보급될수록 소비자가 요구하는 주행거리가 점차 낮아질 수 있다.
CATL의 LFP 배터리를 탑재한 테슬라의 모델3는 한국에서 주행거리 403km를 인증받았다. BYD의 블레이드 배터리가 탑재된 한(HAN) EV의 주행거리는 유럽 NEDC 기준 602km다. NEDC 인증은 다소 느슨해, 환경부 기준으로 측정한 값보다 높은 경향이 있다. 한(HAN) EV의 환경부 기준 주행거리는 400km 초중반 수준으로 추정된다.
박철완 서정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LFP가 관심을 끌게 된 데는 테슬라가 LFP 배터리로 400km 이상의 주행거리를 구현한 영향이 크다”면서 “그간 한국에서는 LFP 배터리는 상품성이 안 나온다고 봤는데, 이제는 소위 ‘탈 만해졌다’는 인식을 갖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추격 나선 배터리 3사
LFP 배터리가 득세를 보이면, 상대적으로 삼원계 배터리는 입지가 좁아지게 된다. 현재 중국을 중심으로 확산하는 LFP 배터리가 미국과 유럽 등 다른 시장에서 얼마나 채용될지가 관건이다. 전기차 전문 매체 인사이드EVS에 따르면, 세계 전기차 시장에서 LFP 배터리 탑재 비중은 지난해 3분기 기준 31%로, 2021년 1월 17%에서 크게 뛰었다. LFP 배터리 탑재 전기차의 85%는 세계 최대 전기차 시장인 중국에서 팔렸다. 나머지는 테슬라 모델3를 중심으로 한 미국을 비롯해 인도, 유럽에서 판매됐다. 이 매체는 “LFP 점유율이 더욱 확대되려면, 토요타·폭스바겐·스텔란티스·포드 등 다른 글로벌 완성차 기업이 LFP를 채택하고, 중국 기업에서 세계 시장으로 수출되는 전기차에 대량으로 사용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중국의 전기차 전문 매체 CnEVPost는 오는 2024년 세계 시장 LFP 배터리 점유율이 삼원계 배터리를 넘어 60%에 달할 것으로 전망하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이미 2021년 LFP 배터리가 52%의 점유율을 기록했으며 점차 비중이 커지고 있다. 하나증권도 “전기차 시장이 하이엔드 위주에서 미들엔드, 로우엔드 시장으로 내려오는 국면에서 가격이 저렴하고 원재료 조달 부담이 적은 LFP 배터리에 대한 수요 증가는 명약관화하다”고 전망했다.
LFP 배터리의 상품성이 개선되면서 점차 확대하는 추세가 이어질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다만, 점유율에서 삼원계를 능가할 것이라는 관측과는 엇갈린 시각도 있다. 한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2024년 LFP 점유율 60%가 중국을 포함한 수치라는 게 중요하다”면서 “미국과 유럽 등 주요 시장 내 전기차 보급률이 어느 정도 올라오는 2020년대 후반에는 일각의 예상과 달리 삼원계가 여전히 시장 우위를 점하는 상황이 펼쳐질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도 LFP 배터리에 유리하게 설계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 재무부가 지난 4월 발표한 IRA 전기차 세액공제 세부지침에 따르면, 전기차에 적용하는 최대 7,500달러의 세액공제를 받으려면 배터리 관련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핵심광물과 부품 관련 조건에 부합하면 각각 3,750달러를 적용한다. 미국이나 미국과 FTA를 맺은 FTA 국가에서 채굴·가공한 핵심광물을 사용해야 한다. 부품은 북미에서 제조·조립돼야 한다.
규제가 적용되는 핵심광물을 보면, 주로 삼원계 배터리에 들어가는 광물이다. 미국 정부가 규정한 핵심광물에는 LFP와 삼원계 모두에 쓰이는 리튬과 알루미늄, 삼원계에만 쓰이는 니켈·코발트·망간이 포함된다. LFP 배터리 주요 광물인 철과 인산은 빠졌다. 상대적으로 LFP 배터리가 요건을 맞추기 수월하다.
박철완 교수는 “미국 정부도 LFP 배터리 없이는 전기차 보급이 어렵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한국 배터리 3사도 LFP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SK온은 지난 3월 인터배터리 행사에서 LFP 시제품을 선보였다. 최윤호 삼성SDI 사장은 지난 4월 정기 주주총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향후 사업의 다양성, 고객의 다양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LFP 배터리에 대해서도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며 LFP 개발을 공식화했다. LG에너지솔루션은 미국 애리조나주에 LFP 배터리 공장을 짓는다. 우선 에너지저장장치(ESS)용 배터리를 중심으로 양산에 들어가고, 기술이 완숙되면 전기차용 배터리도 생산할 계획이다.
한국 배터리 3사는 삼원계 배터리 시장을 주도할 만큼 배터리 전반에 대한 기술력을 갖추고 있으며, LFP 관련 특허도 보유하고 있다. 기존 배터리 공장에서 양극재를 바꾸는 것으로 LFP 배터리를 생산할 수도 있다.
결국 가격 경쟁력이 중요하다. 규모의 경제를 이뤄야 경쟁사와 수주전에서 승산이 있다. LFP 시장 진입 초기에는 고전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
정부가 지원에 나섰다. 산업부는 지난 4월 ‘이차전지 산업경쟁력 강화 국가전략’을 발표해, 2025년 전기차용 LFP 배터리를 양산하고, 2027년 세계 최고 기술력을 확보한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이후 지난달에는 LFP 배터리 개발 사업의 참여 기업으로 삼성SDI를 선정했다. 양극재, 전해질, 장비 등에서도 분야별로 참여 기업을 선정했다. 총사업비는 2026년까지 4년간 233억원(정부 164억원, 민간 69억원)을 투입한다.
산업부는 “LFP 배터리는 핵심광물 가격이 급등하는 상황에서 니켈과 코발트 등을 사용하지 않고, 최근 배터리 자체의 성능도 개선되며 세계 시장에서 급성장하고 있다”며 “그간 중국 기업 전유물로만 인식됐지만, 이같은 시장 변화에 따라 우리 기업과 정부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 정책 내용을 보면 ‘발 빠른 대응’이 무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 교수는 “이미 다른 기업에서 시제품까지 나온 상황에서 후발 기업 연구개발을 지원하는 데 큰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다”며 “정부 정책은 기업이 연구개발 초기 기술 투자 부담을 느낄 때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LFP 개발을 지원했다는 근거를 만들기 위한 수준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올해 1분기 배터리 3사의 R&D 투자 규모가 6,200억원이라는 점에서도 정부 사업에 큰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시각도 있다.
박 교수는 “LFP 양산까지 공백이 불가피하고, 양산 시점에 중국 기업과 비교해 경쟁력 갖출지도 미지수”라면서도 “다만, 지금이라도 LFP 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다행”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