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상 위원께서 기권의사를 표명을 하셨고, 한석훈 위원님께서는 결론적으로 반대 의견을 하셨고 나머지 일곱 분 위원께서는 보고서의 취지에 전적으로 찬성하는 의견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권위원 9명 중 7분의 찬성으로 이 안건은 가결했음을 선포하겠습니다.”
6월 12일 다녀온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 회의장에서는 청소년기후행동이 청구한 기후헌법소원을 포함한 여러 건의 기후소송에 대하여, 헌법재판소에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이하 탄녹법) 위헌 의견’을 제출하는 안건이 가결되었다. 이번에 제출되는 의견서에서 인권위는 정부의 미흡한 기후위기 대응에 대해 기본권 침해를 인정하게 된다.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자료사진) ⓒ민중의소리
“독일 연방헌법재판소가 채택한 탄소예산 할당 방식에 따르면, 한국의 탄소예산은 2030년 이전에 전부 소진되어 미래 세대가 온실가스 배출을 급히 줄여야 하는 상황이다” “ IPCC 제6차 보고서의 기준을 적용하게 되면, 미래 세대가 사용할 수 있는 탄소 예산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인권위에서 준비한 보고서가 내세운 기후과학은 다름 아닌 ‘탄소예산’이었다.
이념 대신 과학에 기반했더니, 온실가스감축목표는 위헌?!!
“괴담이 과학과 진실을 이기는 비정상 상황은 더 이상 용납하면 안 된다. 반드시 퇴출시켜야 한다.”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일본의 방사능 오염수 방류에 대한 국민의 걱정과 비판에 대해 한 말이다. 이런 식으로 이번 정부 들어서 참 많이 들은 말 중 하나는 ‘이념이 아니라 과학에 기반한 기후에너지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온실가스 감축 역시 다르지 않았다. 김상협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장은 4월 21일 조선일보 기고를 통해 ‘이념 아닌 과학에 기반한 기후 정책’을 중시하여, 2030년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연도별, 부문별로 어떻게 실천하겠다는 목표를 확정할 수 있었다고 자평했다.
이념 대신 과학, 좋은 말이다. 그리고 그 좋은 말 그대로, 지금의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과학에 기반해 평가하면 기후위기에 대응하기에 정말 부족한 수준이었기에, 국가가 국민의 기본권을 오히려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 인권위의 판단인 셈이다.
회의장 내에서 수차례에 걸쳐 언급된 근거는 다름 아닌, IPCC와 같은 기후과학, 그중에서도 핵심은 탄소예산에 관한 내용이었다. 즉, ‘이념이나 가능성이 아니라, 과학에 기반한다면’ 지금 한국의 온실가스 감축목표는 터무니없이 낮아 위헌이라는 것이다.
‘탄소예산’에 기반해 이야기하는 국가기관은 처음
IPCC 1.5도 보고서의 경우는 2030년까지 2010년 대비 45%, 최근 6차 보고서에서는 더 강화해 2019년 대비 43% 감축을 달성해야 2050년 탄소중립을 달성하여, 파리협정을 통해 우리가 세운 1.5도 목표를 지킬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의 근거는 IPCC 6차 보고서에서 제시된 결국 1.5도까지 남은 온실가스 배출허용량(탄소예산)이 500기가 톤이었으므로, 이를 달성하기 위해 ‘전세계적으로’ 얼마나 감축하면 되는지를 계산한 것이다. 즉, 2050년 탄소중립의 근거는 곧 ‘1.5도 탄소예산’인 셈이다.
문제는 한국이다. 한국의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구하는데, 전세계적인 탄소예산을 통해 도출된 기준인 45%를 그대로 가져다 쓸 수는 없다. 결국, 한국의 1.5도까지 남은 탄소예산을 구해야 한다. 인권위 보고서에서는 인구 비례에 따라 탄소예산을 할당하는 방식을 사용해 구한 결과를 바탕으로, 지금 이대로라면, 우리에게 남아있는 탄소예산이 사실상 없거나, 얼마 남아있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러한 인권위의 우려는 헌법재판소뿐 아니라, 기후위기의 당사자인 일반 국민에게도 심각하게 받아들여질 만하다. 1.5도가 넘어서게 되면, 많은 기후재난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악화될 것이니 말이다.
인권위 보고서는 2018년 IPCC 1.5도 보고서에서 제시된 탄소예산을 기준으로 하면 한국의 탄소예산이 이미 2022년에 모두 소진되었을 것이라 추정된다고 우려한다. 인권위가 계산한 한국의 남은 탄소예산(2018년 기준)은 277,200만 톤이었는데, 궁금해서 직접 계산해봤다. 실제 공개된 2018~2021년의 배출량을 단순 합산하면, 276,500만 톤이 이미 배출되었고 아직 공개되지 않은 2022년 배출량까지 생각하면 이미 2022년에 탄소예산을 모두 사용했음을 알 수 있었다.
송두환 인권위원장은 미래에 조금씩 나눠서 쓰게 될 탄소 배출량을 미리 다 끌어당겨 써서 우리는 벌써 다 소진한 것 아니겠냐며, 헌법이나 법률, 국제조약에서 요구하는 기준에 비춰볼 때 부족한 점을 지적하고, 적극적인 노력을 촉구하는 것이 인권위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이렇게 인권위 위원들의 입에서, 탄소예산이라는 표현과 이에 근거해 기본권 보호에 위배된다는 것에 대한 지적을 경험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히 언제나 그랬어야 했지만, 지금까지 어떤 국가기관의 회의에 가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IPCC조차 신뢰할 수 없다는 인권위원
물론 그렇지 않은 발언도 역시 존재했다. IPCC를 신뢰할 수 있는지가 확실하지 않다는 한석훈 인권위원의 발언은 비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IPCC의 보고서는 결국은 해당 시점의 기후과학을 총괄적으로 망라한 것인데다 정책결정권자들을 위한 요약본은 각 국가들이 한 문장 한 문장 동의를 거쳐야 나올 수 있는 높은 위상을 가지는 보고서이다. 즉, IPCC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은 기후과학을 부정하겠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한석훈 위원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를 인권위 위원으로 추천한 정당의 원내대표가 했던 ‘괴담이 과학과 진실을 이기는 비정상 상황은 더 이상 용납하면 안 된다’는 발언을 돌려드리고 싶었다.
IPCC의 신뢰성을 운운하고, 산업계의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거나 정부는 충분히 노력하고 있다거나 하는 말들에 지금까지 기후정책 결정과정이 겹쳐보였다. 지금까지의 온실가스 감축목표 결정 과정 역시 기후과학에 기반해 책정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실 지금까지 그 근거조차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 탄녹법에 제시된 ‘감축목표’에 대해, 인권위 측에서 환경부에 과학적 근거를 요청했지만, 환경부는 정부 측 의견서를 보라는 답변만을 남겼고, 인권위 조사관은 정부 측 의견서가 2030년까지 40%라는 지금의 목표가 어떤 근거로 채택된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그린피스와 청년환경단체 등 회원들이 5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 앞에서 환경의 날을 맞아 청년들이 대형 탄소를 짊어지며 국회의 기후위기 대응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2023.06.05 ⓒ민중의소리
한 가지 숙제, 불평등을 반영한 온실가스 감축
인권위 회의에서 ‘탄소예산’과 함께 의미 있었던 것은 기후위기가 단지 미래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이미 나타나고 있는 인권 위협 문제라는 것에 대한 지적이 여러 차례 이어졌다는 점이었다.
단순히 기후위기 문제를 미래로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해야 할 문제로 직면하는 것이 필요함을 탄소예산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다음 세대, 미래 세대를 운운하는 순간 정책 결정 과정에서 기후위기는 지금의 문제이지 못하고 미뤄졌다. 단순히 ‘세대 간 불평등’만을 지적하고, 다음 세대를 위해 기후대응을 해야한다고 말하기 전에, 지금의 불평등 역시 기후위기로 인해 심화되고 악화될 수 있을 것임을 인정하고 이를 반영한 온실가스 감축을 할 수 있을까 역시 남아있는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