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완배 협동의 경제학] 질투는 어떻게 세상을 바꾸고, 어떻게 세상을 망치는가?

“부러우면 지는 거다.”

한 때 참 우리나라에서 많이 나돌았던 말이다. 나는 비교적 질투심이 많지 않은 편이라고 생각하는 편인데, 그런 나조차도 아주 가끔 질투심이 생길 때가 있다. 실제 여러 연구를 살펴보면 질투가 인간의 본능 중 하나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에 노동부 장관을 지낸 진보적 경제학자 로버트 라이시는 질투가 얼마나 뿌리 깊은 인간의 감정인지를 설명하면서 러시아 민담을 사례로 든다. 부잣집 옆에 가난한 농부가 산다. 부자에게는 암소가 여러 마리 있었는데, 가난한 농부는 평생 뼈 빠지게 일해도 소 한 마리를 못 구한다.

그런데 어느 날 신이 이 농부에게 와서 “소원을 하나 들어줄게”라고 제안을 한다. 러시아 민담에 나오는 농부의 소원이 뭐였을 것 같은가? “옆집 부자네 암소를 죽여주세요”였다는 거다.

상식적으로 “나한테도 암소를 여러 마리 주세요” 이래야 맞는 거 아닌가? 그런데 이 가난한 농부는 배가 아팠던 거다. 나한테 암소가 생기건 말건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꼴 보기 싫은 옆집 암소를 다 죽여주면 내가 행복할 것 같아’라는 질투심이 뇌를 지배한 셈이다.

양성 질투와 악성 질투

그런데 이 질투라는 녀석을 좀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우 흥미로운 특성이 한 가지 발견된다. 틸부르흐 대학교 경제학과 닐스 판 데 펜(Niels van De Ven) 교수의 연구를 인용해보자.

펜 교수는 질투에 두 가지 성격이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나보다 잘 났고 잘 산다면 나는 그 현상에 질투가 난다. 그런데 이런 질투를 느낄 때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내 선택은 둘 중 하나다. 하나는 잘 난 사람을 따라잡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 거다. 펜 교수는 이런 질투를 양성 질투라고 부른다. 질투가 공동체를 위해 건강하게 사용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반면 누군가가 나보다 잘 났고 나는 그게 질투가 나는데, 그것을 해소하는 방식이 남을 저주하는 것으로 표현될 때가 있다. 즉 “이웃집 암소를 죽여주세요” 식으로 나타난다는 거다. 이건 사회적으로 좀 위험한 질투가 된다. 펜 교수는 이런 감정을 악성 질투라고 부른다.

펜 교수의 실험을 따라가 보자. 펜 교수는 아이폰과 블랙베리 스마트폰 두 개를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 나는 블랙베리 스마트폰을 매우 좋아해서 이 폰을 과거에 두 번이나 사용한 적이 있지만 서양에서는 블랙베리가 하급의 스마트폰으로 여겨진단다(좀 불쾌한데?). 반면 아이폰은 비싸지만 쿨한 고급 제품 이미지가 있다는 거다.

비싼 아이폰 신제품이 나왔을 때 어떤 학생이 그걸 빨리 산 다음에 자랑을 하는 동영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두 그룹에게 동영상을 보여줬다. 질투심을 유발하는 거다. 다만 그 동영상의 내용은 두 가지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내가 이 멋진 걸 사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몇 개나 했는 줄 알아? 와, 나 진짜 이거 사느라고 석 달 동안 뼈 빠지게 고생했다” 식으로 자기 노력을 자랑했다. 반면 다른 그룹에게 보여준 동영상에서는 “이거 우리 아빠가 사준 거다. 우리 아빠는 이거 나올 때마다 항상 최고급품으로 제일 먼저 사줘” 이렇게 자기 집안이 부유하다는 사실을 자랑했다.

두 그룹의 반응을 조사한 결과 흥미로운 사실이 도출됐다. 첫 번째 동영상을 본 참가자들의 아이폰 구매 욕구가 높아졌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원래부터 블랙베리를 좋아했던 사람들도 “나 저 아이폰 사고 싶어”라며 마음을 바꿨다. 당연히 질투와 부러움 때문이다.

그런데 두 번째 동영상, 즉 “우리 아빠가 이 비싼 거 사 줬어”라는 거들먹거리는 동영상을 본 참가자들은 오히려 아이폰에 대한 구매 욕구가 확 떨어졌다. 심지어 원래 아이폰을 사고 싶어 했던 사람들조차 블랙베리 선호자로 넘어왔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이 현상도 사실 질투 때문이다. 부모 잘 만난 자식에 대한 질투가 생긴 건데 이 질투가 ‘나도 그걸 갖고 싶어’라는 마음으로 발현되는 게 아니라 ‘에이, 난 그딴 아이폰 필요 없어. 다 집어치워!’라는 분노의 감정으로 폭발을 한 거다. 펜 교수는 첫 번째의 질투를 양성 질투, 두 번째의 질투를 악성 질투로 구분했다.

악성 질투는 인간의 동기부여를 막는다

펜 교수는 이 실험을 좀 더 발전시켰다. 학생들을 두 그룹으로 나눈 뒤 위대한 과학자의 이야기를 들려 줬다. 그런데 그 내용이 좀 달랐다.

첫 번째 그룹에게 들려준 위대한 과학자의 이야기는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장애가 있고 뼈 빠지게 가난했는데 그것을 극복하고 마침내 위대한 과학자가 됐다는 내용이었다. 두 번째 그룹에게 들려준 과학자 스토리는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금수저였고 어렸을 때부터 조기교육을 잘 받았으며 돈으로 처발라서 유학을 갔고 그랬더니 위대한 과학자가 됐다는 이야기였다.

금수저와 흙수저. ⓒ직썰


둘 다 부럽고 질투가 날 만한 이야기다. 펜 교수는 이 두 이야기를 들은 학생들에게 “당신들이 느끼는 감정을 다음 보기 중에 선택하시오”라고 요정했다. 보기 중 1번은 나도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양성 질투), 보기 중 2번은 “나는 저 과학자가 왕창 망해서 실패했으면 좋겠다”(악성 질투)였다. 그리고 이 두 그룹에게 “학생들은 다음 학기에 몇 시간 동안 공부를 할 건가요?”를 추가로 물어봤다.

첫 번째 인생 역전 노력파 과학자 이야기를 들은 학생 대부분은 1번(나도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을 선택했다. 반면에 금수저 과학자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대부분 2번(저 자식이 망했으면 좋겠다)을 선택했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예상이 가능한 답변이다. 그런데 추가 질문, 즉 “학생들은 다음 학기에 몇 시간 동안 공부를 할 건가요?”라는 질문에 양성 질투를 느낀 학생들은 “훨씬 더 많이 공부하겠다”는 계획을 적어냈다. 반면에 악성 질투를 느낀 학생들의 공부하겠다고 결심한 시간은 확 줄어들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사람들은 내 노력에 따라서 나도 그 위치에 올라갈 수 있다고 판단할 때 양성 질투를 느낀다는 것이다. 그리고 양성 질투는 매우 건강한 에너지를 사회에 불어넣는다. 사람들이 공부를 더 열심히 할 테니 말이다.

반면에 악성 질투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그 위치에 올라갈 수 없다고 절망할 때 느낀다. 그리고 악성 질투는 사회에 매우 큰 해약을 끼친다. 왜냐, 공부를 해도 소용이 없다는 절망감 때문에 사회적 노력이 확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자. 지금 우리나라가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양성 질투를 유발하나, 아니면 절망과 포기를 안겨주는 악성 질투를 유발하나? 고착화된 계급,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바뀌지 않는 삶, 금수저들이 “부모 잘 만난 것도 실력이야” 이런 멍멍이소리를 대놓고 하는 시대.

이런 자들이 세상을 지배하면 질투가 나는데, 그 질투는 양성이 아니라 악성이다. 사회는 “더 열심히 살아야지”라는 의욕보다 “저 새끼들 다 죽었으면 좋겠다”는 분노로 가득 찬다.

질투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이라면 그게 사회에 건강한 에너지로 작용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양성 질투가 바로 그런 것이다. 반면 이 사회를 수십 년째 지배하고 있는 기득권 체제를 무너뜨리지 못한다면 사회는 악성질투로 가득 차게 된다. 비생산적이고 소모적인 사회가 돼버린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어떤 사회를 지향해야 하나? 그리고 어떤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미래를 더 밝게 만들 것인가? 악성 질투가 아니라 양성 질투가 에너지가 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나? 그러기 위해 가장 먼저 선결돼야 할 과제는 대를 잇는 부의 세습을 막고 구조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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