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이 곡기를 끊고 나서야 참사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 논의가 겨우 시작됐다. 법안이 발의된 지 2개월여 만에 소관 상임위원회인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 상정돼 소위원회로 회부되면서다. 21대 국회 들어 최다 의원(183명)이 법안 발의에 동참했을 정도로 국회 내에서 공감대가 큰 법안이었지만, 국민의힘의 노골적인 반대에 법안 논의는 시작조차 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사이 구속됐던 참사의 책임자들은 줄줄이 풀려나면서 유가족들의 속을 태웠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는 22일 전체회의를 열고 '10·29이태원참사 피해자 권리보장과 진상규명 및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법안(특별법)'을 상정하고 법안 심의에 착수했다. 특별법은 참사의 발생 원인과 수습 과정, 후속 조치 등 참사 전반에 걸친 사실관계와 책임 소재를 밝히는 독립적인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는 것이 핵심이다. 또한, 희생자 추모사업과 피해자들의 회복을 위한 지원 등의 내용도 담겨 있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은 지난 20일부터 "특별법 제정이 마지막 희망"이라며 국회 앞에서 단식 농성까지 돌입했다.
행안위 민주당 간사인 강병원 의원은 "특별수사본부의 수사가 있었지만, 꼬리 자르기에 불과했다는 지적이 많았다. 대검은 서울경찰청장 등 주요 책임자의 구속영장 청구와 기소를 미루게 해 책임자 처벌로 가는 길은 험난해졌다.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가 있었지만 허위 증언, 증언 번복, 부실 자료제출로 참사에 대한 명확한 조사가 이뤄지지 못했다"며 특별법 제정 필요성을 강조했다.
강 의원은 "특별법은 안전한 대한민국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상식적인 입법이다. (법을 둘러싼) 이견이 있다면 충분히 논의해 합리적인 대안을 찾아나갈 것"이라며 "유가족들이 곡기까지 끊어가면서 원통해하는데 그분들의 한을 풀어 드려야 하지 않나"라고 호소했다.
반면, 국민의힘은 유가족이 바라는 특별법 제정을 유가족에 대한 "희망 고문"이라고 폄훼했다.
국민의힘 행안위 간사인 이만희 의원은 ▲참사 원인이 명확히 규명된 점 ▲책임자에 대한 재판이 진행 중이라는 점 ▲조사위원회에 과도한 권한이 부여된다는 점 ▲피해자 범위가 광범위하다는 점 등을 들어 특별법 제정에 사실상 반대했다.
특히 민주당이 전날 특별법 입법을 당론으로 채택하고, 오는 30일 본회의에서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으로 지정하겠다는 방침을 정한 것을 두고는 "국회 입법 권한을 남용하면서 재난을 정쟁화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에 민주당 의원들은 법안에 이견이 있다면 이후 소위원회 심사 과정에서 충분히 논의하면 된다고 반박했지만, 국민의힘 의원들은 당론 철회만을 거듭 요구했다.
패스트트랙 지정과 특별법의 조속한 행안위 통과 등은 유가족이 단식에 돌입하며 내건 요구였다. 하지만 국민의힘은 법안 심의에 순순히 협조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특히 지난해 여야 간사 간 합의를 뒤집고, 특별법을 심사하게 될 2소위원회 위원장 자리도 내주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이만희 의원은 "1년씩 소위원장을 교대하기로 한 건 맞다"면서도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일방의 약속만 강요하는 건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강변했다.
주무 부처인 행정안전부도 특별법 제정을 반대했다. 특별법에 따른 특별조사위원회 설치가 현재 정부가 하는 일과 중복된다는 취지다.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은 "이해가 안 된다"며 "참사가 발생하면 행안부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걸 못 해서 특별법을 제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행안부가 이를 반대한다니 정말 뻔뻔하다"고 일침을 가했다.
특히 용 의원은 "대부분 진상규명이 됐다고 하는데, 가족이 바라는 것 중 어떤 게 진상규명이 됐는지 딱 3가지만 묻겠다"며 "159명 희생자의 마지막 모습이 확인됐나. 희생자 한 명 한 명에 대한 구조와 이송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적절한 조치가 받았는지 확인됐나. 시간대별로 최선의 조치를 했으면 살릴 수 있는 인원이 몇 명인지 확인됐나"라고 차례로 물었다.
행정안전부 장관 직무대행으로 출석한 한창섭 차관은 이 모든 질문에 "확인되지 않았다"고 답했다.
이에 용 의원이 "정부가 조사를 안 하니까 저희도 모르고, 유족도 모른다. 이건 확인해야 하지 않나"라고 따져 물었지만, 한 차관은 "아마 검경 수사라든지 그런 쪽에서 어느 정도 논의가 됐다.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선) 충분히 소명됐다고 저희는 생각한다"고 말했다.
용 의원은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윤석열 정부가 말하는 진상이 '잘 몰랐다', '보고했다', '지시했다', '최선을 다했다'는 것뿐인가"라며 "정부는 최선을 다했는데 국가는 책임질 수 없다는 게 대한민국 정부의 최종 입장인가"라고 개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