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철딱서니 없는 한 마디로 ‘쉬운 수능’에 관한 논쟁에 불이 붙은 모양이다. 나는 도대체 교육에 대해 쥐뿔도 아는 게 없는 사람이 왜 수능 150일을 앞두고 이런 대책 없는 논란을 불러일으키는지 정말 이해가 안 간다.
한국의 교육제도가 엉망진창인 걸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나? 세상 그 어느 나라 학생들이 초등학교를 마치고부터 학원으로 돌진한단 말인가? 스카이 캐슬 부류의 드라마가 큰 인기를 얻는 것만 봐도 이 나라 교육 시스템이 얼마나 멍멍이판인지 누구나 공감을 하는 바다.
문제는 이 교육제도가 유발한 사회적 카르텔이 너무 거대해서 쉽게 말 한마디로 절대 바꿀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데 있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 같은 (교육문제에 대해 쥐뿔도 모르는) 사람이 머릿속에서 생각한 말을 조금의 교정 과정도 거치지 않은 채 입 밖으로 막 뱉어낸다. 그러니 현장의 혼란만 가중된다. 이게 교육부 대입 담당 국장을 경질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지 않은가?
봉사를 점수로 매기는 나라
한국 교육제도가 얼마나 멍멍이판이 됐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를 하나 들어보자. 우리나라의 중학교 고등학교 중 상당수가 봉사점수라는 것을 운영한다. 봉사점수를 채우지 못하면 내신에서 감점을 받기 때문에 진학에 불리하다.
그런데 세상에 봉사를 어떻게 점수로 매긴단 말인가? 사회와 남을 위해 스스로 헌신하는 것이 봉사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으로 그 헌신성을 측정할까? 봉사 시간이 길면 훌륭한 봉사인가? 봉사활동 장소에서 대충 시간만 보내다 오면 그건 또 어떻게 할 건가?
202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하루 앞둔 예비소집일인 16일 서울 중구 정동 제15시험지구 제19시험장 이화여자고등학교에서 수험생들이 교실을 확인하고 있다. 2022.11.16 ⓒ민중의소리
남을 위해 헌신할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이 여러 봉사현장을 돌아다니면 좋은 점수를 받는다. 이건 또 제대로 된 평가인가? 게다가 봉사란 원래 대가를 원치 않는 순수한 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봉사에 점수를 매기는 순간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봉사의 본질은 박살이 난다.
내가 봉사점수에 대해 학을 떼는 이유는 이놈의 나라가 도덕마저도 입시점수로 환산하려 하기 때문이다. 성과평가제에 관해 학계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비판이 무엇인지 아는가? 사람을 특정 기준만으로 평가하고 그 기준에 의거해 당근과 채찍을 구사하면 그 누구이건 당근과 채찍에 해당하지 않는 일은 절대 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봉사를 점수로 환산해 내신에 반영하는 순간 학생들은 내신에 반영되지 않는 봉사는 절대 하려 하지 않는다. 내신 반영에 충분한 점수를 확보한 학생들은 그때부터 봉사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이게 봉사를 가르치는 교육인가, 봉사를 외면하도록 만드는 교육인가?
사람을 등급화 한다는 것
우리나라에는 이른바 교원평가제(정식 명칭은 ‘교원능력개별평가)라는 것이 있다. 쉽게 말해 교사의 교육 능력을 평가해 점수로 환산하는 제도다. 그런데 내가 만난 교사들 중 성향이 진보적이고 보수적이고를 떠나 이 제도에 찬성하는 교사를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이유를 물어보면 교사들이 답은 단호하다. “교육은 지덕체를 총체적으로 가르치는 것이고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그만큼 전면적이고 복합적인 것인데, 이걸 어떻게 수치화해서 점수로 매기느냐?”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교사의 교육능력에 점수를 매겨 등급화 하는 방법을 도저히 알지 못하겠다. 시험문제를 잘 찍으면 훌륭한 교사인가? 만약 그렇다면 공교육이 사교육과 다를 바가 뭔가?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교사가 훌륭한 교사인가? 이걸 제도화하면 교사는 엄해야 할 대목에서 주눅이 든다. 교육이 대번에 인기투표의 장으로 변질될 것이다.
왜 이런 문제가 생기겠나? 대답은 간단하다. 평가할 수 없는 것을 숫자로 평가하려 하기 때문이다. 결국 선생님의 교육능력을 등급화하거나 점수화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이야기라는 뜻이다. 이건 내가 만난 교사 대부분이 동의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당연히 던져야 한다. 가르침을 단순화해서 숫자로 평가할 수 없다면 배움은 어떤 식으로 점수화를 해 학생들의 등급을 나누나? 국영수 성적으로 인간을 등급화한다고? 12년 동안 받은 공교육 가운데 국영수가 인간의 일생을 나눌 중요한 기준이라는 설정은 도대체 누가 한 건가?
국영수만 잘 하면 인격이 개판이어도 지덕체의 총화라는 교육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사람이라는 훈장을 내려줘도 되나? 그래서 봉사점수를 내신에 반영하지 않느냐고? 그러니까 그 봉사점수는 또 어떻게 제대로 측정하냐고!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해야 한다
사실 이 문제의 본질은 사회적 불평등과 맞닿아 있다. 나는 국영수로 인간을 등급화 하는 데 결사반대하는 사람이지만 이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기 쉽지 않다는 점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을 달리 해야 한다.
한국 교육이 봉사마저 점수화할 정도로 서열주의의 총체가 된 이유는 거기서 결정되는 서열이 인생에 너무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일류대와 그렇지 못한 대학을 졸업한 차이가 극심한 사회적 불평등으로 연결된다는 이야기다.
이런 사회에서 세상에 어떤 부모가 자기 자식을 사교육의 지옥으로 몰지 않을 수가 있겠나? 좋은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인생에 얼마든지 기회가 있다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틀려도 괜찮아’라는 제목의 동화가 있다. 내가 어렸을 때 아이들에게 자주 읽어줬던 동화이고 많은 학교들이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필독 도서로 꼽는 훌륭한 책이기도 하다. 그 책에 이런 대목이 있다.
“틀리는 것투성이인 우리들의 교실, 두려워하면 안 돼. 놀리면 안 돼. 마음 놓고 손을 들자. 마음 놓고 틀리자.”
그런데 한국 사회는 어떤가? 틀려도 괜찮다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해 주는 사회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틀리면 엿 되는 게 바로 한국의 교육 문화 아닌가?
사람은 틀리면서 스스로를 바로 잡아가는 동물이다. 초중고 12년 교육, 그 기간 동안 좀 틀리면 어떤가? 그때 정답을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생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는 불평등의 딱지를 붙이는 것은 실로 가혹하다.
수능을 쉽게 낸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 문제는 12년 공교육 과정만으로 누구는 틀렸고 누구는 맞고를 너무 쉽게 규정해버리고 거기서 엄청난 불평등의 씨앗을 잉태시키는 사회 구조에 있다.
진정 교육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면, 진정 이 비정상적인 사교육 시장의 폐해를 바로잡고 싶다면 우리는 한국 사회의 불평등한 문화부터 고쳐야 한다. 한두 번 틀려도, 아니, 세네 번 틀려도 얼마든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기회가 있는 나라, 그게 바로 이 나라의 교육을 정상화하는 첫걸음이라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