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식농성에 들어가는 최선미 이태원참사 운영위원이 20일 국회 앞에서 열린 10.29 이태원 참사 특별법 제정 촉구 단식 농성 시작 기자회견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2023.06.20 ⓒ민중의소리
우리나라는 피해자 권리가 없는 나라입니다. 피해자의 의무가 있는 이상한 나라입니다. 이런 참사가 나면 피해자와 유가족은 거리로 나와 슬프고 억울한 얼굴로 정부를 향해 분노해야 하고. 그 뒤로는 경찰과 대치하며 분향소를 차리고 농성장을 차리고, 노숙농성 행진 삭발 단식 등을 해야 하며….
- 최선미(이태원 참사 희생자 박가영 님의 어머니)
살면서 비껴갈 수 없는 것이 죽음이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한 죽음도 있다. 그 중에서도 부모에게 자녀의 죽음은 마음에서조차 상상하지 않았던 트라우마이며 삶의 모든 과정을 정지시키는 일이다. 특히 안전하다고 느꼈던 곳에서 말도 안 되는 사고로 죽음을 당했다면 비참함을 넘어 미칠 지경에 이르게 된다. 최근 10.29 이태원 참사의 책임자라는 사람들이 줄줄이 보석으로 석방되는 사태를 보면서 느낀 참담함을 어떻게 해야 할까. 정부와 사법당국이 이태원 참사에 대해 최소한의 양심이나 책임감이라도 느끼고 있는지 의구심만 커질 뿐이다.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지 8개월이 지났다. 유족들이 요구하는 진상규명과 대책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재난에 대한 안전망은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답답함과 실망감에 상실감마저 더해진다.
지금의 시대를 ‘재난의 시대’라고 한다.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 4.16 세월호 참사 가족 협의회, 전국 군폭력 희생자 유가족 협회 등 이름만 들어도 먹먹한 단체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지만, 우리 사회가 사회적 재난으로부터 얼마나 안전한지는 여전히 미지수이다. 사회적 재난으로 고통 받고 있는 유가족들과 그 흔적을 기억하는 이들은 참사의 트라우마로 인해 지금도 여전히 그 시간과 공간에 갇힌 채 살아가고 있다. 사회적인 관심이 멀어질수록 집단 트라우마로 기억되는 사건 속의 유가족과 생존자, 관계자들은 참사를 희화하고 정치적인 의도를 갖고 망언과 망동을 일삼는 정치모리배들에 의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으며 연쇄적인 트라우마를 경험하게 된다.
수많은 참사와 집단 트라우마에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해선 개인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차원의 치유가 필요하다. 공동체 전체의 공감과 집단적 애도를 통해 사건의 원인을 성찰하고 재구축할 때 그 사건을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시공간 속에서 다룰 수 있게 된다. 사회적 트라우마의 경우 개인적 차원에서 대응이 가능하지 않다는 연구와 보고는 수없이 많다. 실제로 유대가 강한 집단이 가장 강력한 해독제를 제공하기에 개인의 내적인 문제로 축소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치유의 과정으로 바라보고 다뤄질 필요가 있다. 즉, 개인적인 작업의 방식인 사건-보상-의료적 치료의 방식에서 사건-집단애도-사회문화적 치유로의 방법론적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 또한 지난 역사에서 발생한 수많은 사회적 트라우마에 대해 사회적 문화적 애도를 함으로써 구조적 모순을 극복한 경험이 있지 않던가.
참사 8개월, 최소한의 양심도 책임도 없는 권력 참사를 함께 애도하며 치유하는 사회적 전환이 필요하다
지난 6월 20일 국회 앞 농성장에서 이태원 참사 유가족 협의회가 ‘이태원 참사 특별법 제정촉구’를 외치며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유가족은 거리에서 농성을 하고 경찰은 이들과 대치한다. 그토록 자유를 부르짖는 대통령이지만 유가족과의 만남이나 따뜻한 위로를 건넨 기사조차 보기 어렵다. 대신, 참사를 정쟁화하고 언론을 통해 확대시키고 편을 가르고 유가족을 비난하며 참사의 책임을 개인에게 지우려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것은 공식과 같아서 유가족이 되는 순간 스스로 투쟁하고 단련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은 이런 이중적 고통에 정해져 있는 이상한 나라이다. 자식을 잃은 슬픔을 치유하고 애도해도 시원치 않을 시간에 거리로 나서서 분노에 찬 참담한 심정으로 울부짖는다. 이런 나라에 과연 어떤 미래가 있을까.
베트남 국빈 방문을 마친 윤석열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가 24일(현지시간) 하노이 노이바이 국제공항에서 공군 1호기에 탑승 전 인사하고 있다. 2023.06.24. ⓒ뉴시스
유가족은 긴 시간 온전히 울어야 하며 그 과정을 통해 아이와의 이별을 끝내야 한다. 유가족은 유가족으로 충분히 위로받고 애도해야 한다. 그 죽음이 사회적 참사라면 참사가 지닌 사회적 의미를 간직하고 다시는 그런 희생자들이 나오지 않도록 사회안전망을 만들어야 한다.
오늘도 수많은 언론과 인터넷 매체에서는 시답지 않은 기사 거리를 양산하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정작 159명의 시민의 죽음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 한 사람이 죽어도 가족과 지인들은 일정기간 애도를 하며 마음을 풀어낸다. 그런데 무려 159명이 죽었다. 하나의 죽음이 아니라 159건의 죽음인 것이다. 이미 일어난 일이니 과거의 일로 넘기려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과연 우리에게 피해자의 권리가 있는가? 그들의 희생을 잊지 않고 유족들과 ‘고통의 연대’를 구축하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