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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배 협동의 경제학] 인간은 생존과 번성을 위해 사회적 연대와 협동을 선택한다

사회신경과학이라는 학문이 있다. 말 그대로 사회학과 신경학을 접목시킨 학문이다. 사회학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사회 속에서 어떤 특정 행동을 하는지 그 이유를 연구한다. 당연히 문과에 속한다. 반면에 신경학은 우리 몸속의 신경세포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연구한다. 이건 당연히 이과에 속한다.

그런데 이 둘을 붙여놓으면 사람이 사회 속에서 특정 행동을 하는 이유를 신경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게 된다. 전형적인 이과와 문과의 콜라버레이션이라고 부를 만하다. 실제 사회신경과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존 테런스 카치오포(John T. Cacioppo) 시카고대학교 교수는 애초 경제학도였으나 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이후 신경과학에 진출을 해 사회신경과학이라는 학문을 만들어냈다.

재미도 없는 학문 소개를 길게 한 이유가 있다. 내가 이 칼럼에서 자주 언급했듯이 경제학은 인간을 이기적 존재, 즉 호모 에코노미쿠스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이는 경제학이 제 멋대로 만들어낸 직관일 뿐 과학적 근거가 전무하다.

반면 문이과의 컬라버레이션 학문인 사회신경과학은 인간이야말로 생존과 번성을 위해 협동과 연대를 선택하는 동물이라고 확신한다. 숱한 과학적 증거와 논거를 가지고 말이다.

유전자의 가장 큰 목적

진화의 과정을 살펴본 대부분 과학자들이 동의하는 대목이 있다. 동물 유전자의 가장 큰 두 가지 목적은 바로 생존과 번성이라는 사실이다. 인간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 몸의 유전자는 더 나은 생존과 더 나은 번성을 위해 끊임없이 진화해 왔다.

예를 들어 보자. 사람은 왜 겁을 먹을까? 사실 이 공포라는 감정조차도 절대적으로 생존을 위해서 생긴 것이다. 신경과학적으로 볼 때 인간이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위험한 상황에서 몸에 코르티솔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되기 때문이다.

오싹한 장면을 보거나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 바로 그런 상황이다. 코르티솔의 역할은 심장을 빨리 뛰게 하는 것이다. 겁을 먹을 때 심장이 콩딱콩딱 뛰는 이유가 이것이다.

그렇다면 왜 왜 이렇게 진화가 됐을까? 위험을 직감했을 때 심장이 빨리 뛰어야 온 몸에 피가 더 빨리 공급되기 때문이다. 이래야 떠 빨리 도망가거나 더 잘 싸울 수 있다. 즉 공포는 더 나은 도망, 혹은 더 나은 투쟁을 위해 발생한 생존을 위한 도구라는 이야기다.

카치오포에 따르면 포유류의 경우 암컷과 수컷의 성행위를 대하는 방식이 매우 다르다고 한다. 수컷은 성에 개방적이고 암컷은 보수적이다. 대부분 수컷은 암컷을 만나면 빨리 관계를 맺고 싶어한다. 반면 암컷은 아무나와 관계를 맺는 것을 거부하고 상대를 세심히 고른다.

이것도 신경과학적으로 이유가 있다. 당연히 생존과 번성을 위한 것이다. 수컷은 어떻게 해야 자신의 유전자를 최대한 많이 퍼뜨려 종족을 키울 수 있을까? 많은 암컷과 관계를 가져 자신의 유전자를 여기저기 퍼뜨려야 한다. 유전자를 퍼뜨리는데 수컷은 별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 관계를 갖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반면 암컷은 아기를 임신한 뒤 출생하는 데까지 벌써 몇 개월에서 몇 십 개월이 걸린다. 그리고 아기가 태어나면 무사히 자라나도록 돌보는 데까지도 몇 년이 걸린다. 이런 이유로 암컷은 당연히 잠자리를 갖는데 매우 신중해진다.

한 번 임신과 출생 과정이 워낙 길고 힘들기 때문에 더 나은 생존과 번성을 위해 그 한 번 관계에서 최대한 뛰어난 유전자를 받아들이고 싶은 것이다. 이에 관한 카치오포의 설명을 들어보자.

“포유류의 경우 암컷은 수태를 하고 새끼를 돌보는 데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해야 한다. 진화 사다리의 맨 꼭대기 가까이에 있는 침팬지의 경우 암컷은 새끼가 다섯 살이 될 때까지 그 새끼를 업고 먹이를 찾아다닌다. 대부분의 포유류 종에서 수컷은 생식 에너지를 단 몇 초만 투자한다. 그래서 언제든 어떤 암컷과도 교미를 하고는 나머지는 운에 맡겨두는 전략을 사용한다.

그러나 암컷의 경우 생식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기 때문에 닥치는 대로 아무 수컷과 교미하는 행위가 용납되지 않는다. 암컷 침팬지는 교미할 시기가 되면 투자 가치가 가장 높은 수컷을 찾는다. 다른 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새끼들이 오래 살아남아 그들이 번식할 확률이 높아지도록 여건을 만들어주려고 하는 선택이다.”

외로움과 사회적 연대

인간의 수많은 행위와 감정이 생존과 번성을 위한 진화된 행동이라면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과연 왜 생겼을까? 카치오포는 외로움 역시 공포와 마찬가지로 생존과 번성을 위한 유전자의 결과물이라고 해석한다.

외로움은 고통이다. 그런데 우리는 고통을 왜 느낄까? 고통스럽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피가 나는데 아프지 않으면 치료를 할 생각을 안 한다. 그러다가 결국 죽는다. 하지만 다행히도(!) 상처가 나면 고통스럽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치료하려고 한다.

외로움으로 인한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게 고통스러운 이유는 인간이 반드시 그것을 치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애초에 외로우면 살아갈 수 없기 동물로 태어났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인류는 외로우면 도저히 생존과 번성을 누릴 능력이 없는 나약한 존재였다. 사바나 초원에서 인류는 다른 육식 동물처럼 빠르지도 않았고 날카로운 이빨이나 발톱도 없었다. 이런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은 연대와 협동이었다.

연대와 협동을 통해 그 어떤 육식동물보다도 강인한 존재가 된 인류는 유전자적으로 ‘아, 우리는 협동을 해야만 살아남는구나’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 방향으로 진화를 해 온 것이다. 이에 대한 카치오포의 이야기를 다시 들어보자.

“외로움에 내포된 교훈은 바로 이것이다. 친절하고 너그러운 행동은 사회적으로 건전한 유대감으로 이어지지만, 이기적이고 반사회적인 행동은 건강을 해치고 사회적 고립이라는 고통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사회적 인식과 인지, 유대감, 협력의 수준은 하나의 종으로서 인간 정체성의 핵심을 이룬다. 다른 종과 그 수준에서 확연한 차이가 난다는 뜻이다. 아울러 우리가 서로에게 서로 기대는 행위는, 단지 보살핌과 위안만을 위한 행동이 아니라, 생존 그 자체를 위한 일이라는 뜻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사람의 말과 행동, 그리고 생각을 읽고, 다른 사람의 권리와 기본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다. 우리는 외로움의 고통을 줄이고 싶어하고, 집단 소속감을 가지려고 애쓴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보람 있고, 더 넓은 장기적 결과를 위해 즉각적인 만족이나 자기 이익을 포기한다.

그런데도 서구 사회는 지난 5세기 이상 ‘반드시 서로 어울려 지내야 하는 인간’의 최우선 필수 조건을 부차적인 요소로 격하시켰다. 특히 지난 50년 동안 이러한 추세가 아주 빠른 속도로 가속화됐다.”

카치오포의 이야기대로 우리는 사실 협력하고 살도록 진화돼 왔다. 그런데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와 주류 경제학은 인간을 이기적 동물이라고 규정하고 남을 짓밟을 것을 강요한다. 이런 강요가 거세질수록 인간은 협력이라는 유전자의 본성을 억눌러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우리는 외롭고 고통스러워 질 것이다.

우리는 고양이를 키울 때 산책을 시키지 않는다. 영역동물인 고양이에게 산책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강아지를 키울 때 가둬서 키우지 않는다. 강아지는 반드시 하루에 몇 번 넓은 야외에서 뛰도록 해야 한다. 북극곰을 모래바닥에서 키우지 않는다. 바다사자를 열대 사막에서 키우지도 않는다. 이건 그들에게 그냥 죽으라는 이야기와 마찬가지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키울 때에는 단언컨대 함께 뛰어놀고 함께 공유하며 함께 공감하는 환경에서 키워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애초부터 협동과 연대를 통해 생존과 번성을 누려온 동물이기 때문이다.

외롭다는 것은 인간이 모여서 협동하고 살아야하는 종족이라는 중요한 증거다. 우리 민중들이 외롭지 않기 위해서는 더 많이 연대하고 더 많이 협동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인류의 본성임을 깨닫는 사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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