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수신료를 전기요금과 분리해서 징수하는 내용의 방송법 시행령 개정안이 11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되고 윤석열 대통령이 재가했다. 30년간 유지되어 온 통합징수 방식이 대통령실에서 방송통신위원회에 분리징수를 권고한 지 한 달 여 만에 바뀌었다. 절차적으로 심각한 민주주의 훼손이자 돈줄을 죄어 언론을 길들이겠다는 공영방송 파괴행위다.
1994년부터 약 30년간 이어온 수신료·전기요금 통합징수 방식을 분리징수로 바꾸는 과정은 대통령실 지시부터 시행령 개정까지 졸속이 아닌 단계가 없었다. 대통령실은 ‘국민참여 토론’ 홈페이지에서 벌인 찬반 투표를 근거로 지난달 5일 방통위에 수신료 분리징수를 위한 법령 개정을 권고했다. 다른 공론화 절차는 없었다. 방통위는 지난 5일 이 의견을 반영한 방송법 시행령 개정안을 의결했다. 윤 대통령이 한상혁 방통위원장을 면직해 김효재 직무대행 체제인데다 야당 추천 방통위원 임명도 대통령이 거부한 상황에서 여당 추천 상임위원 2명만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의결이었다. 통상 입법예고 기간인 40일을 열흘로 단축시켰고, 그나마 이 기간에 접수된 의견 중 89.2%가 분리징수 반대 의견이었지만 무시됐다. 분리징수를 해야 할 KBS와 한국전력이 준비가 부족하다는 등의 의견을 냈지만 또한 무시됐다. 과연 민주주의 국가의 정책 결정 과정인지 의심케 한다.
분리징수로 발생할 혼란에 대해서는 아무 대책 없이 시행령이 개정됐다. 당장 7월 청구분부터 전기요금과 수신료를 별도 납부 해야 하는데 실무적으로 준비되지 않았다. 아무리 빨라도 2~3개월의 준비기간은 필요하다. 한국전력은 분리징수 비용이 통합징수 때보다 4~5배 많은 2269억원이 될 것으로 전망하기도 했다. 사회적 혼란은 필연이다. 대표적으로 대단지 아파트는 전기사용계약 대상이 관리사무소인데, 수신료를 개별 세대 대상으로 분리할 경우 관리사무소에서 분리징수 방식을 마련해 입주민에게 납부여부를 물어야 한다. 이 과정을 제대로 아는 아파트 관리사무소는 별로 없는 상황이다. 때문에 이행 준비기간이 필요하다는 한전과 KBS의 의견에 방통위는 시행령 개정안 공포한 날부터 시행하되 KBS와 한전이 이행방안을 협의해 준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시행령을 강행할테니 알아서 대책을 마련하라는 것인데, 이렇게 무대책으로 진행되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정부의 시책인지 믿을 수가 없다.
정부는 국민에게 선택권을 주겠다는 취지이며 공정성을 위한 방안이라고 한다. 하지만 수신료가 적게 걷힐 게 뻔하고 징수 비용마저 늘어나면 KBS의 경영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심각할 경우 재정붕괴가 올 수 있다. 공영방송은 재난방송, 해외송출, 사회적 약자를 위한 방송 등 공익적 프로그램과 서비스로 공공성과 공익성을 실현하기 위해 존재한다. 정부는 과연 공영방송의 공익적 목적을 유지, 발전시키기 위한 대안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당장에 공영방송이 살아남기 위해 경영합리화라는 이름으로 상업광고에 의존하고 자극적 방송에 집착하기를 바라는 것인가. 공영방송의 공공성, 공익성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분리징수 하나를 위해 달려온 것 아닌가. 수신료를 볼모로 공영방송을 길들이려는 의도 외에는 이해할 길이 없다. 정부 편을 들지 않으면 편향돼 있고 불공정한 언론이라는 대통령실의 조악한 언론관이 또 어떤 민주주의 파괴, 언론 공공성 파괴 행위를 저지를지 두려울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