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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민갑의 수요뮤직] 허정혁의 ‘봉오리 시절’로 다시 피어난 한국 포크의 전통

포크 음악은 좀처럼 막 나가지 않는다. 자신을 멸시하지 않을 뿐더러 타자를 조롱하는 경우도 드물다. 욕망을 부추기거나 자랑하고 폭발시키지도 않는다. 날카롭거나 요란한 사운드가 적은 편이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사유하고 성찰하는 장르이기 때문일까.

물론 다른 장르라 해서 사유하거나 성찰하지 않을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록이나 팝, 힙합 같은 장르와 비교하면 포크 음악의 보편성과 차이가 도드라진다. 포크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 중에는 이 특징 때문에 마음이 가는 이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허정혁 정규 1집 '봉오리 시절' 커버이미지. 2023. 06 ⓒ허정혁 SNS

이 같은 면모는 싱어송라이터 허정혁의 첫 솔로 음반 [봉오리 시절]에서도 이어진다. “무거워지고 있을 때”에도 “한참이 지나가도록 앉아만 있었네”라고 이야기 하는 곡 ‘창가에 앉아’나, “오랜 시간동안 비슷한 고민들로만 계속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네”라고 노래하는 ‘풍선’에서 허정혁의 목소리는 차분하다. 슬로우 템포에 어쿠스틱 기타를 주로 활용하는 곡들은 조금도 시끄럽지 않다. “아아아 아직도 같은 자리 굴레를 벗지 못하고”라고 노래할 때마저 허정혁의 목소리는 자신을 잡아먹지 않는다. 이 같은 담담함은 고민이 고통이 되지 않기 때문일까.

음반에서 그만큼 흥미로운 지점은 거의 모든 수록곡이 제각각의 아름다움으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이다. 수록곡들에선 정결한 사운드의 아름다움과 순한 멜로디의 아름다움이 조화롭게 화합한다. 그렇다고 포크 음악의 전통적인 어법만 반복하지는 않는다. ‘놀이터’에는 어린이들이 노는 소리가 들어가고, ‘풍선’의 도입부에서는 몽환적인 사운드를 선보인다. 하지만 어떤 곡도 포크 음악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흔들지 않을 뿐 아니라, 마음의 고요함도 훼손하지 않는다.

이 같은 창작이 가능한 이유는 단순히 허정혁이 포크 뮤지션이어서 포크의 어법으로 노래하기 때문이 아니다. 허정혁이 노래를 통해 창조해 낸 세계의 목소리가 견딜 줄 알고 아낄 줄 알며 멈출 줄 알기 때문이다. 고민하고 흔들리면서도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 마음을 곡과 보컬과 연주로 담아냈기 때문이다.

허정혁 '계절따라' 공식 뮤직비디오

곡의 아름다움과 평온함은 소리의 아름다움을 완성하기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곡의 아름다움과 평온함은 고민하고 흔들리는 시간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 시간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의 의지와 성숙함과 의연함을 표현하기 위해 존재한다. “꼬박 하루 종일 아무 할 일도 못하고 잠만 자다가 / 일어나서 먹기만 / 빈둥빈둥 휴일 같은 나날”을 보내도 괜찮다고 응원하기 위해 연주하고 노래하는 음악이다.

실제로 음반 초반의 고민하는 태도는 차츰 자신의 삶을 수용하고 “나를 닮은 노래”를 찾으며 음반 후반부엔 결국 낙관으로 바뀐다. 그래서인지 전반부 곡들보다 변화의 과정에 있는 후반부의 곡들이 더 울림이 큰 편이다. 물론 그 순간에도 음악은 전혀 시끌벅적하지 않다.

허정혁 '봉오리 시절 Full Album

다르게 생각하면 사적인 발화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않는 음반이다. 다른 존재를 향하지 않는 시선을 지적할 수 있는 음반이라고 할 여지도 있다. 그럼에도 과장하지 않고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이야기만 솔직하게 하는 면모와 “저마다의 다른 걸음걸이 / 자신의 발밑에 누워 / 숨겨 있는 희망을 부르자”(‘누군가의 노래’)라고 이야기 하는 태도는 따스하다. “이대로 가만히 여기에 있어요”라고 노래하는 목소리에는 좌절이나 절망보다 자존을 지키려는 의지가 배어난다. “천천히 조금씩 흘러가는대로 어디로든 가볼까”라는 노랫말은 자신감만큼의 여유와 관용이 없다면 쓸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되든지 분명히 아마도 아름다울거야 / 그렇게 믿으면서 한 발짝 한 발만 가보는 거야”라는 노랫말 역시 마찬가지이다.

삶에 대한 긍정과 낙관, 어떻게든 의미를 찾아내고 건강한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려는 포크 음악의 전통적 태도는 2023년의 젊은 포크 싱어송라이터에게 여전히 살아있다. 포크음악의 성실한 태도는 새로운 음악인의 재능 어린 노래로 영근다. 사실 도처에 봉오리들이 존재한다. 지금 그 봉오리들이 연달아 피어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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