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1426년 세종 8년, 조선 수도 한양에 대화재가 발생한다. 이를 계기로 같은 해 2월 오늘날 소방청의 역할을 하는 ‘수성금화도감’이 설치된다. 이후 1431년 ‘금화군’을 창설되고 화재 발생시 행동수칙이 정해진다.
이후 수성금화도감은 수차례 개편을 거듭했고, 금화군은 1467년 사옹원에서 발생한 화재를 계기로 같은 해 12월 20일 ‘멸화군’으로 개편된다. 하지만 1637년 인조 때 쓸데없는 관청이라며 혁파돼 없어지고 만다. 이 때문에 200년도 더 지나 개항 후 서양 소방기구와 소화 장비가 도입될 때까지, 조선엔 화재를 진압하는 소방조직 기구가 부재하게 된다.
조선시대 때 화재 감시 및 진압 등을 종합적으로 담당했던 국가 소방 조직 멸화군(滅火軍)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창작 뮤지컬 ‘멸화군’이 무대에 올랐다. 이 작품은 백성의 삶을 위협하는 연쇄 방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조선 최초 소방관들의 이야기다. ‘멸화군’은 2017년 콘텐츠 창의인재 동반사업을 시작으로, 2020년에는 창작산실-올해의 신작 후보로 선정되었다. 이후에도 지속적인 수정 작업을 거쳐 2021년 정식 초연되었고, 2023년 재연 무대로 돌아왔다.
연쇄방화사건을 둘러싼 멸화군과 백성들의 이야기
2023년 재연으로 돌아온 이 작품은 초연보다 무대의 크기를 키웠다. 중극장 규모의 무대를 가득 채우는 화염 장면은 사건의 긴박함과 긴장을 고조시킨다. 화마의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보여주는 무대 위로 쏟아지는 건물의 잔해더미가 현장감을 더한다. 짜임새 있는 무대 장치와 더불어, 배우들의 안정적인 연기와 귀에 감기는 넘버들이 작품을 더욱 세련되게 만든다. 이번 재연 무대에서는 ’검은 목소리’, ‘꿈 같은 순간’, ‘흉터’, ‘내일’ 등 9곡의 넘버가 추가되었다고 한다. 창작 뮤지컬의 수준이 높아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관객들에게도 즐거운 일이다.
뮤지컬 '멸화군'공연 장면, 배우 박민성(중림 역) ⓒ모티브히어로
뮤지컬 '멸화군'공연 장면, 배우 이기현(강구 역) 배우 고상호(중림 역) ⓒ모티브히어로
이야기는 ‘멸화군’이 만들어지게 된 역사적 배경을 서술하며 시작된다. 세조 13년 한양 도성에 의문의 대화재가 발생한다. 불길은 끝없이 번져가고 백성들은 속수무책으로 화마에 휩쓸리고 만다. 금화 대장 ‘중림’은 처음 겪는 대화재에 손을 쓰지 못하고 그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 대화재는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다.
중림은 동료를 잃고 백성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멸화군이었던 형을 잃은 ‘천수’는 자신이 멸화군이 되어 형의 뜻을 이어가기로 결심한다. 이 화재로 집안이 모두 풍비박산이 되어버린 ‘연화’는 화재로 피해 입은 백성들을 돌보며 살아간다.
이후 다시 연쇄방화사건이 발생하며 도성이 술렁이게 되고, 각자의 자리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던 이들에게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닥친다. 금화군을 멸화군으로 개편한 중림과 신입 멸화군이 된 천수는 방화범을 잡기 위해 비밀 공조를 시작한다. 이들이 뜻대로 방화범을 잡고 도성과 백성을 지켜낼 수 있을지 지켜보는 것이 이 작품의 관람 포인트다.
멸화되지 않고 계속 타오르는 작품으로 남길
한국 역사를 소재로 새로운 작품을 만든 것이 이 뮤지컬의 가장 큰 장점이다. 투철한 사명감과 희생정신이 없이 할 수 없는 소방관, 그 모습을 조선 역사 속에서 확인하는 것은 뿌듯한 일이다. 지금과 비교하면 너무도 부족한 조건에서 진화에 임했을 ‘멸화군’의 이야기를 무대에 올리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는 작업이다. 남은 숙제는 ‘우리 것’이 ‘우리들만의 것’이 되지 않도록 다듬고 성장시키는 일이 아닐까. 이 작품이 계속 성장해 ‘멸화’되지 않고 오랜 시간 타오르기를 바란다.
멸화대장 중림 역에는 배우 박민성, 조성윤, 고상호가 캐스팅됐다. 신입 멸화군 천수 역에는 최재웅, 김민성, 이석준이 패기 넘치는 연기를 선보인다. 비운의 여인 연화 역에 배우 안유진, 김청아가 더블 캐스팅됐다. 천하장사 멸화군 강구 역에 배우 강동우, 구준모, 이기현이 개성있는 연기를 선보인다. 창작 뮤지컬 ‘멸화군’은 9월 10일까지 대학로 유니플렉스 1관에서 만날 수 있다.
뮤지컬 '멸화군'공연 장면, 배우 이석준(천수 역) 배우 조성윤(중림 역)) ⓒ모티브히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