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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민갑의 수요뮤직] 2023년 여우락 페스티벌을 보고

lull~유영 ⓒ국립극장 제공

올해의 여우락 페스티벌은 막다른 골목에 놓여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0년에 시작한 여우락 페스티벌은 그동안 수많은 국내외 뮤지션들이 참여하면서 한국 전통음악 관련 음악 축제 가운데 가장 주목받는 축제로 자리잡았다. 여우락 페스티벌이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동안 한국의 전통음악계에서 대중음악을 비롯한 다른 장르와 접합하거나 새로운 시도를 펼친 뮤지션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또 그들 가운데 완성도 높은 음악을 내놓은 뮤지션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들을 주목한 음악팬들이 많아진 덕분이다.

하지만 여우락 페스티벌의 성공은 단지 뮤지션과 팬들의 존재 때문만은 아니다. 국립극장이라는 무대와 수많은 스태프들, 그리고 축제를 지원하는 예산이 없었다면 해마다 수십 명의 뮤지션을 불러 모으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번듯한 무대를 만들어주지 못했을 것이다. 실력과 권위를 갖춘 뮤지션을 예술감독으로 초빙하고 극장의 인력과 예산과 공간을 제공해 계속 축제를 만들어온 국립극장의 노력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이처럼 여우락 페스티벌은 한국 전통 음악인들과 대중음악 안팎의 음악/예술을 연결하며 축제를 이어왔다. 이 같은 방식이 계속 유효하기 위해서는 그 가운데 의미 있고 완성도 있는 음악을 내놓는 음악인이 계속 존재해야 한다. 단지 존재하기만 해서는 곤란하다. 그 숫자가 늘어나야 한다. 그래야 매년 새로운 무대를 기획하고 선보일 수 있다.

아쉽게도 현실은 달랐다. 크로스오버 하는 뮤지션은 항상 존재했지만 그 가운데 여우락 페스티벌 무대를 책임질 수 있는 뮤지션은 많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아직 충분히 준비가 되지 않은 뮤지션의 공연을 여우락 페스티벌 무대에 올리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새로운 뮤지션, 함께 공연을 펼치지 않았던 뮤지션이 여우락 페스티벌 무대에서 공연을 펼친다는 소식은 늘 반가웠지만, 기대를 감동으로 바꿔주는 경우는 적었다. 설익고 성급한 시도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잦아지면서, 여우락 페스티벌에 대한 호응도 줄었다. 더 이상 쓸 수 있는 카드가 없는데 축제를 이어가기 위해 설익은 밥을 지어 내놓은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많아진 탓이다.

불문율 (c)김시훈 ⓒ국립극장 제공


그래서 올해 여우락 페스티벌에서 이아람이 예술감독을 맡고 황민왕이 음악감독을 맡은 것은 당연한 결과처럼 보였다. 이들은 거의 10년 동안 축제에 함께 했을 만큼 여우락 페스티벌과 오랜 인연을 맺어왔고, 개인과 팀 작업을 병행하면서 전통음악과 대중음악 안팎을 오가는 경계 없는 활동을 펼쳐왔기 때문이다. 여우락 페스티벌을 가장 잘 아는 이들에게 축제를 맡긴 셈이다.

이들이 준비한 올해 열 두 개의 공연들에서 도드라지는 특장은 전통음악의 전진이다. 올해의 여우락 페스티벌에서는 킹 아이소바, 사토시 다케이시, 스쿼시 바인스, 모듈라 서울, 더튠, 세움, 손열음을 비롯한 전통음악 바깥의 국내외 뮤지션들이 협업에 나섰다. 그렇지만 개막공연 ‘불문율’, ‘가장무도:탈춤의 연장’, ‘추갱지르당’ 등의 공연은 전통예인, 특히 민속예술 중심의 공연으로 채워졌다.

이 공연들은 한국의 전통예술이 얼마나 오랜 역사와 깊이를 품은 심해인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소리꾼 윤진철과 무녀 김동언이 한 무대에 오른 ‘불문율’ 공연은 심청전이라는 이야기를 서로 다른 어법으로 펼쳐 보이면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윤진철과 김동언이 농익은 절정의 예인인 덕분이었다. 150분 동안 쉼 없이 진행한 공연에서 윤진철은 강산제 심청가를 보여주고, 김동언은 심청굿을 들려주었는데 두 명인은 해학과 설움, 애통과 카타르시스를 자신만의 소리로 내뿜으면서 상대와 함께 무대를 만들었다. 관객들은 웃다 울고 울다 울었다. 무대 위와 아래가 따로 없는 공연이었고, 관객들의 혼을 쏙 빼놓는 공연이었다. 막판에 조금 서둘러 끝낸 것처럼 보인 마무리가 유일한 옥의 티였다.

추갱지르당 ⓒ국립극장 제공


‘가장무도:탈춤의 연장’ 공연에선 전국 13개 지역에서 모인 15명의 탈꾼과 10명의 악사들이 150분간 쉬지 않고 서로 다른 탈춤과 재담을 선보였다. 그동안 여우락 페스티벌에서 이렇게 많은 전통예술인들이 모여 연희 공연을 벌인 적이 없었는데, 규모만으로도 돋보이는 공연이었다. 탁월한 재담을 들려주는 탈꾼이 존재했고, 평소 보기 힘들었던 탈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공연이었다. 중간 휴식 없이 150분 공연을 진행하다보니, 후반부 공연은 축약하듯 보여주게 되어 아쉬운 공연이었다. 인터미션을 두고 더 여유롭고 진득하게 공연하는 방식이었다면 어땠을까.

한편 호남여성농악단의 유순자와 김천금릉빗내농악단의 손영만이 함께 한 공연은 전통예인들의 연주와 노래, 춤뿐만 아니라 그들의 재담과 표정, 동작 아니 그 모든 기운으로 관객들을 휘어잡았다. 그들이 무대에서 말하고 연주하고 노래하고 춤추고 진을 짜고 풀며 움직일 때마다 수천 년의 세월이 함께 들썩였다. 이 땅의 사계절이 넘실거렸고, 온 강과 바다가 몰려들었으며, 온 들판의 꽃들이 만발하는 한 판이었다.

두 명인을 비롯한 명인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으니 150분이 훌쩍 지나갔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었다. 서구화되고 현대화된 세상에서 전통은 꼬부라지고 주름지면서도 여전히 살아있었다. 간장처럼 된장처럼 맛을 더했고, 빛을 바래가면서도 더욱 깊어진 채 웃고 있었다. 마을마다 동네마다 얼마나 많은 명인들이 존재했을지 생각하니 탄식이 절로 나오는 한 판이었다. 새롭지 않고 기획이 덜 개입한 공연이지만 그러지 않아도 되는 공연이기도 했다.

종이 꽃밭 두할망본풀이 ⓒ국립극장 제공


박인혜와 정연락과 최인환이 함께 만든 ‘종이 꽃밭 : 두할망본풀이’의 감동에 대해 말해야 할 순서다. 이 작품은 제주무속신화인 ‘생불할망본풀이’를 토대로 한 소리극으로 그동안 창작 판소리극을 꾸준히 만들어온 박인혜와 음악감독 최인환, 지화작가 정연락이 만든 신작이었다.

불안한 시대, 험난한 시대, 옳고 그름이 뒤바뀌는 시대에 던지는 정직하고 뚝심 있는 메시지가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착한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당연한 이야기가 여성연대와 더불어 박인혜의 소리와 최인환의 음악, 그리고 정연락의 지화를 통해 펼쳐질 때, 예술은 타협하지 않는 정신임을, 인간에 대한 끈질긴 옹호임을 가슴 뭉클한 울림으로 잊지 않을 수 있었다. 기존의 작품을 재현하거나 리메이크하지 않은 훌륭한 신작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올해 여우락 페스티벌의 가치를 더욱 빛내주었다.

감동은 모듈라서울의 ‘lull~유영’으로 이어졌다. 범패음악을 일렉트로닉으로 재현한 공연은 전통음악의 어법과 정신을 다른 장르의 어법으로 계승하면서 재창조했다. 전통을 대중화한다며 속화시키지 않은 품격과 범패음악의 본질을 깊이 이해한 안목이 빛을 발한 공연은 한국 일렉트로닉 음악의 정점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반면 다른 콜라보레이션 공연에서는 성취와 아쉬움이 공존했다. 밴드 스쿼시바인스와 해금 연주자 김보미가 함께 한 ‘신:지핌’ 공연은 김보미가 보이지 않는 스쿼시바인스 중심의 공연이었던데다 곡과 곡의 변별력을 찾기 어려웠다. 사토시 다케이시와 황민왕이 협연한 ‘장:단(長短)’ 공연은 정상급 연주자인 두 사람의 진면목을 확인시켰지만 두 예술가의 역량을 다 보여주었다고 하기에는 짧았다.

더 튠과 세움이 함께 한 ‘자유항(Free Port)’ 공연은 여우락 페스티벌에서 서로 다른 두 팀이 함께 공연을 펼칠 때 팀을 잘 선정하고 연결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 공연으로 끝났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팀이거나, 어울리지 않는 연결이었기 때문이다. 킹 아이소바와 느닷이 협연한 ‘리듬 카타르시스’는 느닷의 공연에 킹 아이소바가 들러리를 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만큼 느닷이 중심이 된 공연이었고, 킹 아이소바를 충분히 배려했다고 보기 어려웠으며, 두 팀이 서로 녹아들지 않은, 두 팀의 워크샵처럼 느껴지는 공연이었다.

다섯 명의 솔리스트가 함께 한 ‘프로젝트 여우락 시너지’ 공연에서는 이 연주자들이 자신의 내공을 다 쏟아 부었는지 묻게 했다. 공연이 불만족스러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실력 있는 젊은 연주자들답게 좋은 곡과 안정된 연주를 보여주었지만 넘치거나 끓어오르지 않은, 누구도 튀어나오지 않고 다 뒤섞이지 않은 공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백야 ⓒ국립극장 제공


한국의 대표적인 연주자 두 사람이 만난 손열음과 이아람의 ‘백야(Polarnacht)’ 공연은 달오름 극장이라는 작은 무대에서 보기 아까운 공연이었다. 단기간에 준비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두 연주자는 자신들이 평상시에 해오던 장르와 연주 스타일을 버리고 다른 장르의 어법을 수용했다. 그 결과가 완벽하게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즉흥연주를 해봤을 리 없는 클래식 연주자 손열음의 즉흥연주가 재즈 피아니스트의 연주보다 획기적이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클래식 곡을 연주하는 이아람의 대금 연주가 클래식 관악기 연주를 능가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연주에는 각자가 쌓아온 연주력의 깊이가 드러나는 순간들이 이어졌고, 클래식과 한국 전통음악이 만들어낼 수 있는 앙상블의 가능성이 반짝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 즐거운 공연이었다.

한 공연을 빼고 11개의 공연을 본 2023년의 여우락 페스티벌은 그동안의 여우락 페스티벌 중에서도 손꼽을 만 했다. 뛰어난 명인들을 호출한 덕분이고, 전통예술의 역사가 아직 살아있는 덕분이며, 여우락 페스티벌의 무게를 아는 예술가들 덕분이다. 내년에도 전통예인들의 무대와 젊은 예술가들의 무대가 고르게 이어지기를. 콜라보레이션 공연에서는 더 많은 준비와 고민과 발칙한 충돌이 튀어나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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