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마음의 저울] ‘보이는데 보이지 않는다’고 강요하는 사회

헌법재판소가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에 대한 국회의 탄핵심판 청구를 기각한 25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 시민대책회의 입장 발표 기자회견을 열며 유가족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2023.07.25 ⓒ민중의소리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관통하는 주요 개념은 ‘더블 싱크(Double think)’이다. 소설 속의 빅 브라더(Big Brother)라고 불리는 무소불위 정부는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통제하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사용하는데 그 중 하나가 ‘더블 싱크’이다. 더블 싱크는 말 그대로 모순된 생각과 믿음을 동시에 유지하는 능력을 말한다.

더블 싱크가 소설 속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는 이유는 최근 우리 사회에도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핵방사능 오염수가 인류와 생태계에 얼마나 끔찍하고 치명적인 위기를 가져올지 뻔한 데도 몇몇 조작을 통한 실험결과를 통해 이런 사실을 지적하는 것을 괴담이라 치부하며 사람들을 혼란에 빠트리고 있다. 대중의 상식과 국제적 흐름과는 동떨어진 대통령의 주장이 무오류의 극치인 것처럼, 대다수의 언론과 여당의 몇몇 나팔수들이 주구장창 떠들어대기 시작하면 이것을 여론인 양 확산시키고 재생하는 일들이 무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에서 159명이 희생당했는데도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헌법재판소는 법과 현실의 괴리를 비집고 당시에 희생당한 사람만 억울한 일로 만들어버렸다. 법도 민심을 거스를 수는 없다. 선거로 선출된 권력도 공무원의 지위를 가지고 행사하는 권력도 그 지위와 역할에 맞는 책임감이 있다. 책임(responsibility)은 특정 결과나 그 결과를 얻는 데 필요한 당위적 요구나 요청에 맞게 대응해야 한다. 의무에 대한 사회적 의식을 바탕으로 하기에 몇 가지 법조항으로 국민 56퍼센트가 찬성하는 여론(뉴시스 의뢰, 2022. 12. 4~6 이상민 장관에 해임에 관한 여론조사)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2023년 7월 28일 정부는 이동관 씨를 방통위원장으로 내정하였다. MB정부 시절 홍보수석으로 언론을 탄압하고 수많은 기자와 PD들을 해직한 사건의 주요 책임자로 의심되는 그가 “공정한 미디어 생태계 복원에 총력을 다하겠다”라며 방통위원장 후보자로서 포부를 밝혔다. 내정되기 전부터 아들 문제 등 수많은 의혹에 휩싸였는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밀어붙일 태세이다. 관련 종사자들은 앞으로 다가올 현실들에 대해 격분하며 두려워하고 있다.

수해나 사회적 재난에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보이지 않고, 희생당한 사람들 스스로 자신의 안위를 지켜야 하는 사회로 변모하고 있다. 정이 없는 사회, 무정사회를 보는 듯하다. 게다가 자신에게 불리한 이슈가 터지면 대통령을 위시한 기득권층은 여성, 노조, 장애인으로 상징되는 사회적 약자들을 향해 00페미, 00노조, 00장애인이라 신조어로 낙인찍으며 이들을 사회의 악으로 내몰고 있다.

‘더블 싱크’는 모순된 생각과 믿음을 동시에 유지하는 능력을 말한다
현실에서 속박 당하면서도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사람처럼 행세하진 않는가


이러한 더블 싱크는 빅 브라더가 통치하는 우리 사회를 더욱더 혼탁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이미 사회 전반에 만연되어 있는 ‘갑의 사유’와 ‘을의 사유’ 사이에서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우리 또한 폭력적인 뉴스를 보면서 가해자의 횡포에 분노하지만, 실생활에서는 약자에게 무정하고 강자에겐 숨도 제대로 못 쉬지 않던가. 현실에서 속박 당하며 살면서도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사람처럼 행세하진 않는가. 현실의 고통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어디에도 고통 따위는 없다고 착각하고 있진 않은가. 모두가 최면술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누구에게나 보이는데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같다.

방송통신위원장으로 지명된 이동관 대통령실 대외협력특별보좌관이 28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소감을 밝히고 있다. 2023.07.28. ⓒ뉴시스

가혹한 정글에서 힘센 자가 질서를 만들어내고 사람을 차별하고 정당화하는 것이 권력인 양 떠들어 대는 사회, 성취 지향만이 최고의 가치이며 강화된 사찰과 감시가 가속화되는 사회, 조지 오웰이 그린 것처럼 극도의 단속과 감시가 이루어지는 사회로 만들기 위한 공작이 펼쳐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설령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무정사회라 해도 우리는 무정함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인격으로서, 다시 말해 도덕적-실천적 이성의 주체로 여겨지는 인간은 모든 가치를 뛰어넘는다.” 인간은 존엄한 존재이며, 칸트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절대적 가치를 가치이다. 상황에 따라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네가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 대하지 않도록, 그렇게 행위하라”는 정언명령의 내용은 지금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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