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복지부 주도로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영유아 전수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이로 인해 매일같이 수많은 ‘비정한 엄마’가 발견되고 구속되는 보도가 이어진다. 철없고 책임감 없는 여성, 생각 없고 미성숙한 엄마라는 식의 표현들이 곳곳에 보인다. 그렇게 엄마로 호명되는 이들의 면면에는 어떤 맥락이 있을까?
미혼, 사실혼, 법적 혼인관계, 혼외관계 등 다양한 관계 속에 놓여있는 이들은 많은 경우 원치 않는 임신, 계획하지 않은 임신을 하게 되었다는 점, 그리고 안전한 임신중지에 실패했다는 점, 미성년자의 경우 임신사실을 양육자에 알릴 수 없었다는 점이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면, 안전한 임신중지가 가능했다면, 미성년자가 신뢰할 수 있는 어른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다면, 혹은 낳아서 키워도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어야 하는 상황이 되지 않는 세상이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들에게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했으며, 안전한 임신중지는 왜 불가능 했으며, 임신 사실을 숨길 수 밖에 없는 사회를 누가 만들었는가?
한국은 공교육을 통해 제대로 된 성교육을 제공하지 않는 나라다. 몇 해 전 울산교육청에서 국내 최초로 포괄적 성교육 집중학년제를 선언하고 추진했지만, 울산시의회는 예산 전액 삭감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인권의 중요한 한 영역인 성적 자기결정권을 ‘섹스할 자유’ 쯤으로 의도적으로 오인하며 최소한의 피임교육조차 저지하는 세력에 국가권력이 찬동하고 있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또한 한국은 2019년 4월 ‘낙태죄’ 위헌 결정 이후에도 4년이 넘도록 임신중지 관련 대체법안을 전혀 마련하지 않고 있는 나라다. 한국은 미프진 등 세계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검증된 임신 초기 임신중지약조차 ‘안전성’이라는 표면적인 이유로 도입을 금지하는 나라다. ‘낙태죄’는 위헌인데도 먹는 임신중지약은 여전히 불법인 것이 현실이다. 동시에 여성에게만 여전히 가혹한 성엄숙주의 문화는 ‘순결’하지 않은 여성을 낙인하며, 임신을 ‘몸을 함부로 굴린 까닭’이라며 여성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긴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면, 안전한 임신중지가 가능했다면, 미성년자가 신뢰할 수 있는 어른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다면, 혹은 낳아서 키워도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상황이 되지 않는 세상이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만드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성교육의 부재, 제도적 미흡, 낙인 때문이지만 그런 것들은 손쉽게 외면된다. 아빠는 양육의 책임있는 주체로 소환되지 않는 까닭에, 아빠에 대한 면죄부는 쉽게 발부된다. 아빠도, 국가도 모두 숨은 채 여성만이 비난의 대상이 된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이, 새로운 생명을 책임지고자 할때 감수해야할 고난은 오롯이 여성에게 맡겨진다. 소설 <엑시트>에서는 미혼모 장미에게 어느 누구도 다정한 조언과 위로를 하는 어른이 등장하지 않는다. 한심해 하거나, 그럴 줄 알았다는 냉정한 판단만이 존재한다. 제대로 된 사회구조를 만들기는 어려운 반면, 탓하기 쉬운 ‘비정한 엄마’는 바로 눈 앞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아 살해라는 결말로 이르게 만드는 수많은 구조적 요인들이 있다. 열 달의 고단한 임신기간과 힘겨운 출산과정을 통해 낳은 자신의 아이를 유기하고 살해하도록 내몰고 있는 현실이 있다.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이 하나의 동일한 정체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동일한 경험을 한다면, 그것은 해당 정체성에 대한 구조적 억압이 작동하고 있음을 인지해야한다. 문제의 원인에 무능한 국가와 무책임한 남성, 공고한 가부장제 문화가 그 배경에 있지만 그 모든 구조적 조건과 맥락을 지우고 개인에 모든 화살이 향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그 의도는 무엇일까? 이러한 사회를 유지시키는 것이 누구에게 이득이 되는가? 여성에게 원치않는 임신은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기 때문에 애초 원치 않는 임신을 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국가는 이를 계속해 외면한다. 행정안전부가 주도해 만들었던 ‘가임기 여성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듯 여성을 그저 ‘자궁을 가진 몸뚱아리’로 인구증가의 도구로 보는 국가로서는 임신과 출산이 여성의 삶에 얼마나 큰 차별과 억압을 마주하게 만드는지 관심이 없다. 그렇다고 태어나기만 하면 국가가 책임지고 키워주는 세상도 아니다. 태어나면 각자 알아서 생존해 내야 한다. 또한 자신을 낳은 양육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생존 확률과 생존을 해내야하는 환경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러나 국가는 이에 관심이 없다. 자신의 책임을 숨기고 탓하기 손쉬운 누군가를 소환하는 것, 이것이 이 국가의 운영방식이다. 이번 전수조사는 그 구조적 원인과 책임을 전혀 살피지 않고, 개인의 단죄를 통해 현재의 시스템을 공고히 하는데 기여하는 까닭에 악질적이다.
이렇게 진짜 문제가 숨어버리는 것이 위험한 점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상황을 반복시킨다는 점이다. 제대로된 성교육과, 안전한 임신중지에 대한 제도적 마련이 부재한 상태에서, 이렇게 ‘엄마’들을 구속시키는 전수조사만 이뤄진다면 어떻게 될까?
원치 않는, 계획하지 않은 임신을 한 여성들이 충분히 예상되는 힘든 삶을 감수하고 ‘모성애’를 가지고 홀로 아이를 책임져야 하는 걸까? 안전하지 않은 곳에서 목숨을 걸고 출산하는 일이 일어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또는, 목숨을 걸고 유산을 시도하는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은? 결코 낮지 않다. 국가나 제도나 교육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 여성만 문제로 여기는 것은, 너무나 무책임한 일이다. 국가는 전수조사 이전에 반드시 어느 누구도 원치않는 임신을 하지 않을 수 있고 계획하지 않은 임신이 되면 임신을 중단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모든 사람의 자신의 몸과 삶의 주인으로 살 수 있도록 근본적인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국가의 책임만 잊은 채 개인만을 단죄하는 것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국가는 제대로된 성교육을 충분한 예산을 투입해 실시하고, 안전한 낙태죄 위헌 이후의 입법공백을 메워 안전한 임신중지를 보장하며, 누구나 태어나면 국가가 책임지고 돌보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영아살해의 근본적인 구조의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하고자 할 때 양상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