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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배 협동의 경제학] 참여하자, 행동하자, 그래서 세상을 바꾸자

인류에게는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과 무리 지어 다니기를 좋아하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민중의소리에 들어와 이곳의 기사를 보시는 민주시민 독자분들 주변에는 대개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가 많을 것이다. SNS만 해도 그렇지 않나? 비슷한 정치적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친구가 된다.

그런데 그러다보니 우리가 종종 망각하는 사실이 있다. 사람들 중에는 의외로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다. SNS에서 싸우고, 일상생활에서 논쟁하다보면 세상에는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 혹은 윤석열 같은 황당한 대통령을 지지하는 또라이 두 부류의 사람만 보인다.

하지만 정치적 무관심층은 언제 어느 곳에서나 존재하고, 그 규모도 꽤 크다. 나는 이 정치적 무관심층(정치에 관심은 있지만 어느 당도 지지하지 않는 무당층과는 다르다)에 관심이 많다. 그들이 왜 정치에 관심을 끊었는지가 경제학에서 주요 연구 주제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결국 이들의 변화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 동력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치적 무관심층에 대한 경제학의 설명

정치적 무관심층이 왜 발생하는지에 대한 대표적 경제학 이론이 ‘합리적 무지(rational ignorance)’라는 것이다. 인간은 이익과 손실을 정교히 계산해 오로지 더 많은 이익만을 위해 행동한다는 주류 경제학의 대표적 이론이기도 하다.

경제학 교과서는 합리적 무지에 대해 “특정 정보를 얻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이 해당 정보를 통해 얻을 것으로 기대되는 수익보다 클 경우 차라리 정보 습득을 하지 않고 무지한 상태를 유지하려는 경향”이라고 설명한다. 말이 좀 어려운데 쉽게 예를 들어보자.

1만 원을 내고 택시를 탈 것이냐, 돈을 아껴 걸어갈 것이냐? 주류 경제학에 따르면 인간은 이런 선택의 기로에 처했을 때 비용과 이익을 계산한다. 비용은 내가 내야 하는 1만 원이고, 이익은 당연히 택시를 탐으로써 얻어지는 편리함과 시간 절약일 것이다.

내가 얻는 편리함과 시간 절약의 가치가 1만 원어치보다 크다고 판단을 하면 사람은 택시를 탄다. 하지만 편리함과 시간절약의 가치가 1만 원 정도는 안 된다고 판단을 하면 걸어가는 것을 선택한다. 이게 주류 경제학이 말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2016년 12월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 모습. 당시 전국 수백 곳에서 열린 촛불집회 중 서울 광화문 촛불집회는 주최측 추산 최대 200만명이 넘는 인파가 모였다. ⓒ공동취재단

사람들이 왜 운동을 열심히 안 할까? 이것도 마찬가지다. 운동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처했을 때 사람들은 운동을 할 때 얻는 이익과 비용을 계산한다. 운동을 할 때 얻는 건강이라는 이익의 가치가 10이고, 운동을 할 때 드는 비용(헬스장에 내야 하는 돈, 운동을 하는데 들이는 시간, 운동을 할 때 느끼는 고통 등등)이 8이라면 운동을 한다. 반면 이익의 가치가 10인데 비용이 12쯤 된다면 운동을 포기한다는 이야기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사람들이 왜 정치 무관심층이 되느냐도 쉽게 설명이 된다. 정치에 관심을 가지려면 지식을 습득해야 한다. 어느 정당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공부를 해야 하고, 정치가 바뀔 때 내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변화할 지도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노력에 드는 비용이 10이라고 가정해보자. 만약 내가 정치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세상이 변해 얻는 이익이 8쯤밖에 안 된다면 사람들은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관심 가져봐야 2 손해인데 왜 그런 일에 힘을 쏟느냐는 거다.

투표를 하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투표를 위해 내가 들여야 하는 수고로움이 10, 반면에 내가 투표를 해서 얻는 세상이 바뀌는 이익이 8, 이러면 투표를 하지 않는다. 이게 바로 주류 경제학에서 말하는 ‘합리적 무지’ 현상이다. 어떤 사람이 정치에 대해 무지한 것은 그 사람이 이익과 손해를 정교하게 계산한 뒤 결정한 합리적 판단이므로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림짐작의 오류와 사슬

그런데 사실 이 이론은 대부분의 주류 경제학이 그렇듯 완전 엉터리다. 이 칼럼에서 누차 이야기했듯이 인간은 주류 경제학이 주장하듯 그렇게 정교한 계산을 할 줄 아는 슈퍼맨이 아니다.

생각해보라. 정치에 관심을 갖는 데 드는 노력이 10, 반대로 그 과정으로 세상이 바뀌었을 때 얻는 이익이 8, 도대체 이따위 숫자는 어떻게 계산이 되나? 이 세상 그 어느 천재도 이 숫자를 정확히 계산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걸 대충 어림짐작해 자신의 행동을 결정한다. 실제 그 계산이 틀렸을 가능성이 매우 농후한데도 말이다. 주류경제학과 달리 인간은 그렇게 과학적이고 계산적이며 이기적인 인간이 아니라는 데에서 출발하는 행동경제학은 이런 인간의 결정을 ‘어림짐작의 오류’라고 부른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코미디언 이주일 씨는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그는 폐암에 걸렸을 때 “담배 맛있습니까? 그거 독약입니다. 저도 하루에 두 갑씩 폈습니다. 1년 전에만 끊었어도.”라고 후회를 했다.

주류 경제학에 따르면 인간은 담배를 피우는 것도 이렇게 계산을 다 끝낸 후 피운다는 것이다. 담배를 피울 때 행복은 10, 담배를 끊을 때 얻는 건강이 8, 그래서 나는 피운다! 뭐 이런 결론이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주일 씨처럼 건강이 갑자기 나빠지면 사람은 반드시 후회를 한다. 이 말이 무엇이냐? 계산이 잘 못 됐다는 거다. 담배를 피울 때 얻는 괘감이 10이라면, 사실 담배를 끊을 때 얻는 건강은 20, 혹은 30쯤 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를 정확히 계산하지 못한다. 대충 어림짐작해 8쯤으로 후려친다. 그러다가 나중에 큰 후회를 한다.

정치 무관심층도 마찬가지다. 그건 그 사람이 손해와 이익을 모두 계산해 내린 합리적 결정이므로 존중받아야 한다? 천만의 말씀, 그건 사실이 아니다. 이런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는 특히 정치적 관심을 통해서 자신이 얻는 이익이 8밖에 안 된다고 너무 쉽게 후려친다는 데 있다. 이건 전형적인 어림짐작이다.

내가 정치적으로 무관심해 대통령을 개떡같이 뽑으면, 나라의 안전이 개판이 되고, 민중들의 삶이 피폐해지며, 길거리에 칼부림을 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잼버리 같은 국제적 행사에서 멍멍이 망신을 당한다. 이게 나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인가? 이 모든 일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내 삶을 옥죈다. 정치에 무관심해 얻는 손실은 상상을 초월하며, 내가 정치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얻는 이익 또한 예상 외로 크다. 이것을 함부로 어림짐작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남긴 유명한 어록이 하나 있다. “움직이지 않는 자는 자기를 옭아맨 사슬을 눈치 채지 못한다(Those who do not move, do not notice their chains)”는 것이다.

정치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며 합리적 무지를 선택하면 우리는 우리를 옭아맨 사슬의 존재를 알 수 없다. 움직여봐야 뭔가 묵직한 사슬이 나를 옭아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이 엉망진창의 정권이 시작된 지 고작 1년여가 지났다. 앞으로 4년이라는 암흑의 세월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 많이 남은 것 같지만 정치적 무관심층을 설득하기에는 결코 길지 않은 세월이다. 정치가 세상을 바꾸고, 그 바뀐 세상이 나의 삶을 바꾸는 일이라는 사실을 하나하나 설득해 나가자. 정치적 무관심층을 참여와 행동으로 바꾸는 일, 그 일에 이 나라의 운명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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