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가 8일 오전 보직해임심의위원회를 열고 채수근 상병 순직 사건을 수사했던 해병대 수사단장의 보직 해임을 의결했다. 사건 조사결과를 경찰에 이첩하지 말고 대기하라는 지시를 이행하지 않아 항명에 해당한다는 것이 이유다. 사건의 책임을 물어야 할 지휘관들이 아니라 군 내부 진상조사를 진행한 책임자만 자리에서 물러났다. 군이 사건을 의도적으로 축소·은폐하려 한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
채수근 상병이 순직한 지 3주가 지났는데도 사망 경위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진척이 별로 없다. 채 상병은 지난달 19일 경북 예천에서 집중호우 실종자를 수색하던 과정에서 급류에 휩쓸려 순직했다. 당시 수색 지휘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됐고, 사망의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 조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조사도 빨리 진행됐다. 문제는 조사보고서가 군 수뇌부에 멈춰 있는 것이다.
이 사건은 경찰이 수사한다. 지난해 7월 군사법원법이 개정돼 범죄에 의한 군인 사망사건과 관련해서는 민간 경찰이 수사를 맡게 돼 있다. 2021년 공군 여중사 성추행 사망사건과 관련해 군 내부의 축소·은폐가 드러나면서 더 이상 수사권한을 군에 둘 수 없다는 여론이 형성됐기 때문이다. 군은 초동조사를 마치고, 성실히 경찰 수사를 받으면 된다. 그런데 오히려 군 수뇌부가 조사보고서를 경찰에 보내지 말라고 지시하고, 국방부 검찰단은 보고서를 회수 조치했다. 조사보고서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던 것인가.
해병대 수사단은 조사에 착수해 지난달 30일 채 상병이 소속된 해병대 1사단 임성근 사단장을 비롯한 8명에 대해 과실치사 혐의가 있다는 내용이 담긴 초동조사 자료를 국방부에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국방부장관은 검토 후 서류에 결재까지 했다. 그런데 갑자기 다음날인 31일 자료를 경찰에 이첩하지 말고 보류하라는 지시를 남기고 우즈베키스탄으로 출국했다.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국방부는 ‘사실관계 조사 내용만 적고, 혐의에 대한 판단은 하지 말라’는 취지에서 이첩 보류를 지시했다고 설명했다. 사단장 등을 혐의자에서 배제하는 책임자 범위 축소 의도가 과연 없다고 할 수 있는가. 특히나 국방부장관이 결재까지 했다가 보류했다면, 그 의지는 어디에서 나왔는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사단장은 과연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8일 군인권센터가 공개한 군 단체 카톡방 내용에는 안전문제를 고려한 현장 지휘관들을 질책하며 무리한 수중탐색을 지시하는 사단장 지시사항이 구체적으로 나온다. 반면 현장에서 우려 섞인 건의가 올라왔지만 관련 내용은 묵살되기도 했다. 명백한 지휘라인의 책임이 민간단체의 조사와 제보로도 확인되고 있다. 임성근 사단장은 지난달 28일 “모든 책임을 지겠다. 후배 지휘관들의 선처를 바란다”고 밝혔다. 그런데 해병대는 뒤이어 “책임을 다하겠다는 것이지 사퇴는 아니다”라고 했다. 도대체 이 무슨 말인가. 채 상병 가족과 국민을 우롱하려는 것인가. 채 상병의 부모는 “진상규명이 제대로 될는지 의구심이 든다”고 했다.
일련의 상황은 그간 군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대하는 군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다. 수사권한을 경찰에 넘겨주고도 자성은커녕 사건 축소 의혹을 키우고 있다. 병사의 목숨보다 지휘관들의 자리 보존이 더 중요한 것인가. 군이 어디까지 추락하려는 것인지, 이런 군대를 믿어야 하는지 국민들의 걱정이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