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SK·현대차·LG 등 4대 재벌의 전국경제인연합회 재가입이 속도를 내고 있다. 시기가 미묘하다. 한일 관계 개선에 발맞추겠다며 양국 재계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추진하는 ‘한일 미래기금’ 모금 부진과 시점이 맞아떨어진다. ‘전전 정권’, 기금을 매개로 로비 창구 역할을 했던 전경련 재가입이 추진되면서 ‘정경유착 망령이 되살아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10일 재계에 따르면 4대 그룹 전경련 재가입이 본격적으로 검토되고 있다. 움직임이 가장 구체적인 곳은 삼성이다. 삼성은 준법감시위원회를 통해 전경련 가입 조건을 검토하고, 이달 중 재가입을 추진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준감위가 ‘정경 유착 우려가 있으면 전경련을 즉각 탈퇴한다’는 등의 조건을 붙이면 이사회가 가입을 승인하는 수순을 밟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절차가 의아하다. 경영상 필요에 의한 가입이라면 준감위 검토는 필요 없다. 이사회 의결만 있으면 충분하다. 하지만 삼성은 준감위 검토를 우선하고 있다. 절차적 정당성 확보에 무게를 두고 있는 모양새다.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전경련 가입이 자칫 사법리스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전경련은 K스포츠·미르재단을 통해 재벌로부터 700억원 규모의 후원금을 걷었던 전례가 있다. 박근혜 국정농단의 조력자였다. 그런 전경련이 7년 만에 또 다른 기금을 추진하고 있다. 이른바 ‘한일 미래기금’이다. 양국 기업이 후원금을 내면 그 돈으로 한일 청년·학생 교류사업 등을 추진한다. 전경련은 “한일관계 회복의 원년”이라고 의미를 부여하지만, ‘윤석열 정부의 강제징용 배상 졸속 협상 부담을 덜어주는 재계의 들러리’라는 조롱 섞인 비판이 끊이지 않아 왔다. 4대 재벌의 전경련 가입과 한일 미래기금 후원이 지금은 ‘교류 확대 지원’이지만, 언제 청탁과 배임으로 돌아올지 모를 일이다. 불과 몇 달 전, 성남시민구단을 후원한 기업인이 뇌물 공여 혐의로 기소 된 바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일 미래기금은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다. 전경련은 지난 6월 22일 ‘재단법인 한일미래파트너십재단’ 설립 등기를 마치고 일본경제단체연합회와 운영위원회를 열었지만, 이후 진척이 없다. 단 한 차례 회의도 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한일 미래기금에 후원금을 낸 기업도 사실상 전무하다. 전경련 관계자는 “기금 참여 의사 밝힌 기업은 몇 곳 있는데, 아직 실행된 곳은 없다. 기부받는 절차에 대해 내부 법률 자문을 받는 단계”라고 설명했다. ‘후원금이 0원이라는 말이냐’라는 질문에는 “현재 외부에 모금 규모 밝힐 수 있는 단계가 아니”라는 해명을 내놨다.
전경련은 ‘이미지 세탁’에 매진하는 모양새다. 정치권 인사였던 김병준 직무대행 체제를 정리하고 류진 풍산그룹 회장을 새 수장으로 추대했다. 단체명은 한국경제인협회로 바꾼다. 산하 연구기관인 한국경제연구원을 흡수통합해 경제 씽크탱크 기능을 강화한다는 계획이다.
시선은 곱지 않다. 6명의 더불어민주당 정무위원회 위원들은 지난 9일 성명을 내고 “전경련은 군사정권 시절부터 끊임없이 불법자금 모집에 관여해 왔다”며 “간판만 바꿔달고 신 정경유착 시대를 열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정경유착 시대로 회귀가 공정과 상식인가”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