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와 그 재난들을 마주할 때마다, 매번 참사의 앞에서 단순히 ‘이 비의 이름은 기후위기다’ 혹은, ‘이 산불의 이름은 기후위기다’와 같은 말을 단정지어 입 밖으로 내뱉어도 될지 조심스럽기만 합니다.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기후운동을 한다는 사람이 ‘기후위기’라고 단정짓는 것이 주저된다니 말입니다.
사실 이러한 망설임은 지금껏 주류 정치가 기후참사를 대했던 모습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기후재난으로 인해 참사가 발생할 때마다, 평가와 반성은커녕, ‘백 년만의 집중호우’라느니 하는 말로 매번 그 책임을 회피하기에 급급했습니다. 참사의 책임은 (어쩔 수 없는) 기후위기에게 떠넘겨졌고, 사과하고 시스템을 바꿔야 할 이들의 역할과 책임은 사라졌습니다.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말은 곧, 재난의 책임이 피해를 당한 이들에게 떠넘겨지는 상황과 동의어였습니다. 정책결정권자들이 내뱉는 ‘폭우가 기후위기다’라는 말은 ‘각자도생하라’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기후재난의 책임을 기후위기에 돌리는 주류 정치
이번 여름의 폭우를 두고도, 대통령실은 "기상상황이 우리 예측을 벗어나서 극단화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어쩔 수 없이 경험한 상징적 사고”라며, “천재지변의 측면이 크다고 할 수 있다”며 정부의 책임을 부정한바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윤석열 대통령은 시민 14명이 사망한 오송 궁평지하차도 참사에 대해서, 언급하지도 않고, 방문하지도 않아 의도적으로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는 것 역시 비판이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이 참사는 어느 지역보다도 인재(人災)의 성격이 뚜렷했는데도, 대통령과 정부는 책임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이번 8월, 네이처지에 게재된 논문은 ‘기후위기’뿐만 아니라, ‘기후위기에 대한 사회시스템의 취약성’이 함께 있어서 피해가 발생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기후위기’로 인한 대부분의 피해는 예방할 수 있었던 것이기에, ‘사회시스템’과 ‘기후위기’의 책임, 양쪽을 강조하는 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연구팀은 ‘재난’의 맥락에서 기후위기에만 초점을 맞추게 되면 ‘기후위기에 대한 취약성과 이를 유발하는 사회시스템’의 책임을 회피하는 담론이 형성되고, 거꾸로 기후위기의 맥락을 무시하면 기업과 같은 주요 배출원들의 책임을 회피하게 된다고 지적합니다.
그렇기에 ‘기후적응까지도 고려한 기후대응’은 이제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자리매김해야 합니다. 사회전반에서 약한 부분을 찾고, 이를 메우기 위해 힘쓴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만큼, 이를 위해 ‘정부의 책임’은 참사가 발생했던 아니던 간에 강조되어야만 합니다.
뭐라도 하고 싶은 절박한 마음에, 저희 단체 활동가들은 자원봉사센터를 통해, 수해복구 봉사활동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일반 시민들의 상호부조를 통해 할 수 있는 것들은 물론 중요하고 꼭 필요한 일이었지만, 한계 역시 분명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은 토사 치우기, 물 퍼내기, 물에 젖은 물건 옮기기, 벽지 제거하기와 같은 일들이었습니다. 분명 이런 일들은 긴급하고 중요한 일들이기는 했지만, 일반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였습니다. 벽이 마른 이후 다시 도배를 한다든지, 침수된 물건 새로 구입이나, 무너진 집을 새로 짓는 것과 같이 일상으로의 회복까지 가는 길은 지역주민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일상으로 다시 회복할만한 충분한 돈과 자산이 스스로 혹은 가족친지들에게 마련되어 있지 않다면, 재난으로부터의 회복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수해 복구를 도우면서 재확인해야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정부기관들이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책임을 최소화하는데 급급한 모습을 볼 때마다 섬뜩한 공포를 느끼곤 합니다. ‘우리 동네가 아니어서’와 같은 ‘운이 좋았던 생존’, ‘아직 독립하지 않아서’라는 ‘시간이 제한된 안전’을 마주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영웅담에서 권한과 책임 있는 이들에게 초점을
수해 당시, 매년 비만 오면 침수되던 거리의 하수구를 청소해 차도의 침수를 막은 중학생들의 이야기가 화제가 되어 언론을 타는 것을 봤습니다. 이제 이야기의 초점을 ‘재난 속 평범한 개인들의 영웅담’에서 ‘침수피해를 막을 권한이 있었던 이들’로 돌려봅시다. ‘기초의회 의원’은 청소년의 기특함을 칭찬하고, 평가하는 사람으로 보도에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는 뻔히 해당 지역이 상습침수지역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럼에도 한마디 사과도, 대책마련도 이야기하지 않는 건 꽤나 충격적이었습니다.
그게 기초의회의원 한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님을 모두들 압니다. 오송참사를 두고, 잼버리를 두고 같은 모습을 계속 마주해야 했습니다. 위기가 재난이 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건 절대 권한이 있는 사람들이 재난 속 살아남을 안전망 하나 만들지 못한 채 사과나 대책마련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닐 겁니다. ‘기후적응을 고려한 기후대응’을 준비하는 일, 일상으로 회복할 수 있도록 취약성을 고려한 안전망을 조성하는 일들이 ‘위기가 재난, 참사가 되지 않기 위해서’ 지금 필요한 것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