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초 하와이 마우이 섬의 대화재 당시 섬의 반대편에서 휴가를 즐기는 관광객의 모습. ⓒ사진=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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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초 미국 하와이 주 마우이 섬 서쪽 지역에서 대형 산불로 100여년 만에 최대 사망자가 발생했다. 최소 115명이 목숨을 잃었고 2,200여개의 건물이 소실됐다. 직격탄을 맞은 마우이 서쪽 하라이나 지역에서만 수백명이 삶의 터전을 잃고 숙소 부족으로 큰 고생을 했다. 그러나 화재 피해가 발생하지 않은 동편 지역은 계속 관광객을 받았다. 치유와 추모, 그리고 회복이 절실한 때에 휴가를 즐기는 관광객의 모습에 현지인들은 개탄했다고 한다. 이런 일이 왜 발생할까? 해외여행이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포장되는지를 살펴봐야 한다는 가디언의 기사를 소개한다.
그리스 에게해의 대표적인 휴양지인 로도스 섬이 지난 7월 열흘 넘게 불타는 동안 관광객이 계속 섬에 몰려들었다. 집이 잿더미로 변하고 수천 명이 대피해도 관광객은 계속 찾아왔다. 8월 초 최소 115명이 사망한 하와이 산불 이후 마우이 섬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내가 일주일 후 튀르키예로 여름휴가를 떠날 때 이 이미지가 머릿속에 계속 떠올랐다. 이스탄불과 블루 모스크를 보기 위해 성실하게 줄 서고 기다리면서 터키어로 감사 인사를 건네면서도 그 생각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 관광객들은 왜 그랬을까?
이해가 전혀 안 되는 건 아니다. 다른 여행을 예약할 돈이 부족해서, 환불이 가능할 것 같지 않아서, 무더운 여름을 피하고 싶어서 등등의 이유가 있었으리라. 하지만 어떤 이유도 사람들이 왜 불길을 향해 갔는지, 왜 휴가를 위해 자기 생명과 안전을 위험에 빠뜨리는지를 충분히 설명해주지 못한다. 단순히 바다를 즐기려는 것보다 더 깊은 충동이 있음이 분명하다. 로도스 섬과 마우이 섬 관광객은 이런 깊은 충동의 극단을 보여주며 기후재난 지역까지 찾아갔다. 여름휴가로 해외여행을 가는 나도 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렸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왜 해외여행을 하는가? 산불로 폐허가 된 하와이의 마우이 섬 주민은 가족과 이웃이 죽은 바로 그 바다에 관광객들이 찾아와 수영하는 모습에 경악했다고 한다. 특정 경험을 집요하게 추구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고통을 외면할 정도의 구획화가 이뤄진 것을 보면 그 충동이 단순한 여가 추구를 넘어서는 게 분명하다.
인류학자 딘 맥캐넬도 확실히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1976년 저서 <여행자: 여가 계급에 대한 새로운 이론>에서 탈산업화과 탈종교화되는 세계에서 해외여행이 일종의 ‘의식’이 돼버렸다고 주장한다. 서방의 현대사회는 구성원에게 ‘자유’를 주지만, 거기에는 파편화와 소외감이라는 대가가 따른다. 맥캐넬은 머나먼 곳으로 관광을 가는 것은 현대사회의 불연속성을 극복하고 현대사회의 흩어진 파편을 이어 붙여 하나로 통합하려는 (결국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시도라고 했다. 해외관광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 및 역사와 연결됐다는 느낌을 주며, 개인적인 경험을 다양한 문화, 사람, 장소와 연결시켜줌으로써 현대인의 고립감을 줄일 수 있다. 해외여행이 우리에게 목적의식을 주고 자아 정체성을 강화해주는 것이다.
게다가 날이 갈수록 해외여행은 진정성을 찾기 어려운 세상의 ‘진정한 경험’이라는 프레임이 강화되고 있다. 해외여행은 우리에게 특정 장소에서만 가능한 일회성 경험을 준다. 그 속에서 진정성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고 모순적이지만 현대인은 그것에 집착하며 매일의 일상이 아니라 해외여행을 ‘내 자신을 찾는 창구’로 삼는 것이다.
나는 이스탄불에서 무엇을 볼지 고민하며 맥캐넬의 <여행자>를 또 읽었는데, 그는 다양한 명소가 어떻게 순례지가 되는지를 매우 흥미롭게 해부했다. 이 책은 1970년대에 출판됐지만 그 어느 때보다 시의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우리 세대는 여가를 위한 해외여행을 사치로 여기지 않는다. 거의 권리로 받아들인다. 아마도 우리 세대가 성인과 자아실현의 전통적인 지표, 그러니까 주택과 평생 직업을 가지고 2.5명의 자녀를 낳는 것을 더 이상 이룰 수 없거나 덜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거의 반세기 전에 맥캐넬이 간파했듯이, 해외여행을 자주 다니는 사람들이 가지는 도덕적 우월감이 있다. 해외에 나가보지 못한 사람들은 일상적인 경험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제대로’ 인생을 맛보지 못했다는 우월감 말이다. 어디를 가든 상업화되고 안전하게 포장된 관광 경험이 확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외여행이 우리의 지평을 항상 넓혀줄 것이라는 믿음을 면밀히 검토되지 않는다. 신나는 세계 여행을 마치고 귀국해 거리에서 구걸하는 노숙자를 보고 혐오감을 느꼈다는 사람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기후위기가 심화됨에 따라 해외여행의 도덕성도 점점 문제가 되고 있다. 해외여행은 현대사회의 소용돌이 속에서 개개인에게 목적의식과 연결감을 줄 수는 있다. 하지만 대중적인 해외여행이 우리가 숭배하도록 배워온 유적지에 미치는 영향을 정확하게 알게 됐는데 이집트 기자의 피라미드나 튀르키예 카파도키아의 열기구를 경험하기 위한 순례라는 의식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관광은 세계 온실가스의 8~10%를 배출한다. 해외여행은 저렴한 항공편의 등장으로 하기가 쉬워졌지만,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셧다운은 조금의 기회만 주어지면 관광명소 주변의 야생동물이 다시 모여들 수 있음을 보여줬다.
단순히 ‘여가를 즐기기 위해’를 넘어 우리가 해외여행을 가는 진정한 이유를 이해하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공동체적인 연결성과 자아실현을 할 자격이 충분히 있다는 기분이 근거 없음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실질적이고 광범위한 시각의 변화가 필요하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마음이 동할 때마다 세상을 보고 싶다는 야망을 없애고 싶지 않다. 고대 원형 극장에 앉아 석양을 바라보며 깨달음을 얻고 싶고, 코스타리카에서 큰부리새의 울음소리를 듣고 싶으며, 고대 도시 페트라의 경이로움을 직접 눈으로 본 후 요르단 전통요리 만사프를 폭풍 흡입하고 싶다. 마음속으로는 그것이 ‘나’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나도 믿고 있다.
매캐한 검은 연기가 여전히 현지 마을을 질식시키고 있는데도 관광객들이 비행기를 타고 몰려드는 이유도 바로 ‘나’를 위해서다. 그러나 ‘나’를 뒤로 하는 것만이 해결책이다. ‘나’를 뒤로 함으로써 우리가 애초에 해외여행을 가지 않아도 되게 더 공동체주의적인 형태 사회를 다시 구성할 수도 있다.
문제는 그렇게 되려면 해외여행을 줄이고, 느린 육로를 통한 국제여행이나 국내여행을 위해 더 저렴한 항공 패키지 해외여행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치스로운 해외여행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로 재포장된 마당에 누가 이것을 포기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