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선 소설집 ‘구들 밑에 일군 밭’의 표지는 배롱나무를 형상화한 것이다. 작가의 고향집에는 오래된 배롱나무가 있었고, 이 소설집에는 여러 차례 배롱나무가 등장한다. ⓒ도서출판 말
금수는 미쳤다. 뒤란 돌담 너머 과부 아줌마네 외아들 금수가 군대에 가서 직사하게 얻어맞다 그만 정신이 나가서 돌아왔다는 소문이 동네 구석구석까지 퍼졌다. “그음수는 미쳤대요. 군대 가아서 미쳤대요. 읃어마았고 미쳤대요.” 동네 아이들이 금수를 따라다니며 놀려댄다. 나는 담장 너머 금수와 마주칠까 봐 뒤란 두엄더미에서 볼일을 볼 수도 없다. 아무도 그를 아는 체하지 않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금수는 싱글싱글 웃는 희멀건 한 표정으로, 실성한 눔 정 붙이고 농사라도 지으라고 과부 어머니가 빚내서 사준 소를 끌고 다닌다. 금수가 냇물에 미역을 감고 소를 씻기고 풀을 먹이고 돌아오면 해가 기운다. 미친 사람에 걸맞는 색다르고 해괴한 행동은 없다. 아이들의 놀림은 시들해졌고, 몇 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나는 볼일을 보다 그와 눈이 마주친 공포의 기억을 잊고 차츰 뒤란 두엄더미로 향한다. 금수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첫눈이 내린 겨울밤이었다.
한미선의 소설 「구들 밑에 일군 밭」을 읽는 내내 그 여름에 마지막으로 본 사촌을 생각했다.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나는 방학의 시작과 끝을 제물포역 언덕 너머 사촌들이 있는 숭의동 외가에서 보냈다. 우리 가족이 살았던 도시였고, 엄마가 태어난 집이었다. 사촌과 사촌의 누나. 내가 그들을 더 사랑했는지 그들이 나를 더 사랑했는지 생각해본다. 시간의 무게로만 본다면 내가 더 사랑했다. 사촌은 스물네 살에 강물에 뛰어들어 돌아오지 못했고, 사촌의 누나는 어느 봄날에 쓰러져 깨어나지 못했다. 그들이 나를 사랑했던 시간보다 내가 사랑했던 시간이 길다.
사촌 남매는 80년대 초에 나란히 대학에 들어갔다. 사촌이 먼저 대학에 갔고, 여상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며 방송통신대에서 공부하던 사촌의 누나가 동생을 따라 다음해 대학에 입학했다. 고대 82학번, 숙대 83학번은 내가 그들을 기억하는 방식이었다. 밤이면 촛불을 켜고 중학생인 내게 김수영과 김지하의 시를 읽어주던, 정태춘의 노래를 들려주고 김민기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해주던, 추운 겨울, 어느 집 냉방에서 염상섭의 소설 「삼대」를 토론하는 고등학생 친구들 곁에 나를 앉힌, 외삼촌의 검은 코트를 입고 옆구리에 시집을 끼고 제물포역 헌책방 골목을 앞장서 걷던 사촌은 고대 82학번이 되었고, 어린 사촌 여동생에게 자신의 원피스를 입혀 동인천이며 송도며 월미도에 데리고 다니던 이모 같은 언니는 숙대 83학번이 되었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는 만큼이나 숙대와 고대를 사랑했고, 그들을 따라다니던 1982년과 1983년을 좋아했다.
아카시아 하얀 꽃들이 흐드러지게 필 무렵, 금수의 엄마, 과부 아줌마가 집을 나갔다. 금수가 엄마의 머리채를 잡고 살기 어린 행패를 부린 뒤였다. 동네 사람들은 그의 정신병이 점점 심하게 도지고 있다고 수군댔다. 소를 살 때 돈을 빌려준 빚쟁이가 돈 대신 소를 끌고 가려 했다. 금수는 도끼를 들었다. 소가 사라졌다. 금수가 소를 도살해 버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언제나 고요했고, 고요가 지나쳐 괴괴한 느낌마저 드는 음침한 분위기'였던 금수네 집 마당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금수가 망치와 곡괭이로 방의 구들장을 부쉈다. 구들을 부수고 돌덩이, 흙덩이를 들어냈다. 아니, 어디에서 자려고······ 부엌 바닥도 파헤친다. 자기만이 다닐 수 있는 통로만 간신히 남기고 처마 밑부터 마당 구석구석까지 땅을 파헤쳐 흙을 다지고 고랑을 만든다. 구들 밑 땅마저 밭을 만든다. 이제 곧 서리가 내릴 텐데······ 금수가 필사적으로 일군 밭이랑이 생명을 잉태할 씨앗을 하염없이 기다리던 겨울밤, 나는 볼일이 급해 뒤란 두엄더미 앞에 섰다. 굵은 눈송이가 소복이 쌓인 새하얀 밤, 떨어져 나간 창호지가 펄럭이는 문발에 촛불에 비친 그의 모습이 살랑살랑 흔들린다. 그날 밤 꿈속에서 금수는 말간 얼굴로,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언덕을 넘어갔다. 소도 함께 넘어갔다. 파란 풀들이 하늘하늘 춤추는 언덕이었다.
두 차례의 뇌졸중 수술을 받고 투병 중인 한미선 씨가 2002년 가족과 함께 지리산 종주를 할 때의 모습. ⓒ한미선
대학에 들어간 사촌들은 옷에 매운 냄새를 품고 감옥으로 갔다. 동생이 감옥에 있을 땐 누나가 면회를 했고 누나가 감옥에 있을 땐 동생이 찾아갔다. 어머니들은 자식들을 돌려달라고 교도소 앞에 주저앉았다. 사촌은 고대를 버렸고 사촌의 누나는 숙대를 버렸다. 사촌은 허름한 교회, 노동자 야학 교사가 되었고 사촌의 누나는 공단으로 떠났다. 그해 여름, 사촌이 야학 노동자들과 함께 강가에 갔다. 나는 바다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며칠 뒤 제물포역 언덕을 넘어 사촌의 뼛가루가 뿌려진 산을 올랐다. 야학이 있는 교회 앞마당 검은 천막 안에 영정 네 개가 있었다. 길게 맞잡은 그들의 손이 강물이 감춘 소용돌이 속에서 어린 노동자를 구했다고 누군가 나에게 말해준 것 같다.
복숭아가 익어가던 초여름에 한미선을 만났다. 남김없이 복숭아밭으로 일군 산비탈을 올라, 열매를 감싸며 나무에 매달린 노란 봉투를 등불 삼아 한미선을 만나러 갔다. 누구······시더라······ 그가 나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더듬더듬 말했다. '사인, 코사인값에, 유기화합물 명칭 하나하나에 인생의 열쇠가 숨겨져 있을 것만 같아' 수학과에 진학한, 그러나 80년대 초 격변의 한가운데 설 수밖에 없었던, 노동 야학을 하고 택시 운전을 하며 수많은 삶을 엿보던, 새로운 시대를 꿈꾸다 감옥에 간 한미선, 30년간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고 홀로 써낸 단편소설 열여섯 편, 1700매가 넘는 원고 뭉치를 타이핑 할 손과 언어의 기능을 상실한 후에야 마침내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보낸 「구들 밑에 일군 밭」의 작가 한미선과 고대 82학번 그의 친구들을 만나 40여 년 전 제물포역 언덕을 넘어가 돌아오지 못했던 나의 사촌을 아는지 물었다.
첫눈과 함께 금수는 어디론가 가버렸고, 그의 밭은 한 번도 씨앗을 물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생명의 잉태를 기다리던 어느 겨울밤 촛불에 일렁이던 그림자는 서른 번의 봄이 지나 열여섯 그루 나무가 피어 올린 잎들을 보았을 것이고, 나는 그 빛나는 초록 그늘 속에서 오래 전 어린 노동자의 손을 잡았던 사람을 생각했다. 한미선의 친구들도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