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주의 첫 번째 정규 음반 '우리는 서로를 간직하려고' 쇼케이스 포스터와 음반 표지 ⓒ기획사 talented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노래가 있다. 부끄럽게 하는 뮤지션이 있다. 싱어송라이터 이형주는 그 중 하나다.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몇 해 전 서울 서촌의 한 식당에서 그를 처음 만났던 것 같다. 족발을 맛있게 만들어 파는 가게였는데, 당시 가게 영업을 중단한 상태였다. 건물주가 임대료를 턱없이 올려 버렸고, 식당 주인 부부는 그에 반발해 싸우고 있었던 탓이다. 비슷한 처지의 자영업자들과 관련 단체 활동가들, 일군의 예술인들과 뜻있는 시민들이 연대 중이었다.
이형주는 그 곳에서 노래를 불렀다. 가게 문을 걸어 잠그고 용역의 침탈에 맞서는 어두운 식당 안에 노래가 울려 퍼졌다. 결의에 차 있기 보다는 윽박지르기만 해도 울어버릴 것 같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그 노래를 들었다. 그들은 그 곳에 계속 머물렀다. 언제 강제집행이 들어올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잠을 자고 철거용역의 욕설과 폭력을 견뎠다.
230823 이형주 - 내 몸이 들린 날 「전국철거민연합 문화제」
하지만 나는 그들이 싸우던 수개월 동안 많아야 서너 번 그 곳에 가서 노래를 듣고 돌아왔을 뿐이었다. 그 곳에 연대하는 음악인들이 함께 만든 음반에 대해 이야기 하는 정도가 나의 최선이었다. 그런데 이형주는 그 곳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 곳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노래를 부르는 이들이 함께 식당을 지키고 있었다. 연대 공연을 하는 이들은 대부분 노래를 부르고 떠나는데 반해, 이형주를 비롯한 몇몇 뮤지션들은 활동가처럼 머물며 함께 싸웠다. 그들을 볼 때마다 부끄러웠다. 현장에서 필요한 것은 잠시의 박수만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사람인데 나는 함께 비를 맞지 않았다. 나의 잠은 편안했고, 나의 밥은 안전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필요한지 알면서도 나는 현장으로부터 많이 떨어져 있었고, 그럼에도 떨어져 있지 않은 척 했다.
그 곳의 싸움은 끝내 승리하지 못했고 수많은 연대인들이 지금까지 고통을 받고 있지만, 이형주의 노래는 계속 이어졌다. 그의 노래는 싸우고 있는 사람들, 일터에서 내몰리고 쫓겨난 사람들 곁에 머물렀다. 그는 노래로 연대했고 연대하면서 노래를 만들었다. 그의 노래는 오래전 연대했던 사람들이 입주한 아파트에는 닿지 않았다. 그들이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나 안치환의 노래를 들으며 운동을 추억하는 동안, 예람, 이형주, 황경하, 황푸하 같은 뮤지션들은 지금 내몰린 사람들 곁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노래를 불렀다. 제대로 받기 힘든 출연료와 충분하지 않은 음향 시스템, 언제 끝날지 모르는 막막한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노래였다. 이형주는 싸우는 이들을 위해 마음을 내고, 그들의 목소리를 담은 노래를 만들었다. 지켜보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함께 싸우는 사람으로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당사자의 노래였다. 당사자가 되려는 음악인의 노래였다.
익히 들어왔던 민중가요 스타일의 노래는 아니었다. 그의 노래는 비장하지 않았고 힘차지 않았다. 팔을 흔들며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아니었다. 포크와 블루스 사이에서 블루스 쪽으로 좀 더 기운 노래는 리드미컬 하면서도 낮고 소박했다. 선동하지 않는 노래, 정답을 말하려 하지 않는 노래, 자신에게 정직한 노래였다. 지난 9월 9일 발표한 이형주의 첫 번째 정규 음반 [우리는 서로를 간직하려고]에 담은 노래 대부분이 그러한데, 그 중 ‘내 몸이 들린 날’과 ‘반란의 아이들’, ‘말해주세요’에는 투쟁 현장에서 경험한 감각과 사유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빌어먹을 21세기에도 계속 싸우는 이들의 노래를 찾는다면 반드시 들어야 할 노래.
‘내 몸이 들린 날’의 “내 몸이 들린 날 땅바닥에 내팽개쳐저 / 종이 인형처럼 여기저기 흔들리네”라는 노랫말을 들으면 그 순간의 상황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긴장하며 어깨를 걸고 침탈에 대비했으나, 덩치 큰 용역들에게 뜯겨지고 들려서 차가운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순간의 당혹감과 막막함이 맛깔스러운 블루스 연주를 빌어 매끈하게 다가온다. 이형주가 정치적 올바름이나 직설적인 태도만으로 노래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음반의 멋진 타이틀 곡이다.
예술작품이 어떤 경험을 다루고 있는지가 가장 중요한 가치는 아니라 해도, 이러한 경험을 좀처럼 노래하거나 쓰지 않는 현실을 대비(對比)하지 않을 수 없다. 수많은 이들의 안락과 노래 속 상황은 동시에 벌어진다. 누군가의 외면과 방관이 노래 속의 막막함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누구의 즐거움도 훼손할 수 없다는 시대정신의 무책임함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노래다.
그렇다고 이형주의 세계가 절망과 분노만으로 점철되어 있지는 않다. ‘반란의 아이들’의 리드미컬하고 록킹한 연주와 노랫말 “자! 반란의 아이들 서로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오는”에는 그들이 창조하는 신명과 낙관이 오롯이 담겨있다. ‘말해주세요’도 마찬가지다. “공백을 두려워하지 말고 / 자그만 할 일을 찾아내자 / 우리는 느린 게 아니라 / 천천히 걷는 거다”는 노랫말 속에 싸우는 이들의 해맑은 정신과 태도가 살아 이어진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현장에서 여전히 웃으며 싸울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누군가는 노래를 통해 사람답게 살아가고 있다. 적어도 내게는 차트 1위하는 노래보다 귀한 노래다. 어떤 팝스타보다 소중한 뮤지션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