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10월 3일 광주에선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박정희 민주공화당 후보의 첫 지방 유세가 열렸다. 야당 후보인 민정당 윤보선은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문제 삼으며 사상 공세를 펼쳤다. 박정희는 이날 광주 유세에서 자신을 향한 야당의 사상 공세를 “낡은 매카시즘의 수법”이라고 힐난했다.
1961년 5.16 군사반란 당시 박정희가 이끄는 반란 세력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 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 △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공고히 할 것’ 등 6개 항의 혁명공약을 선포했다. 반란의 제일 첫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 ‘반공’이었다. 사실 박정희가 군사반란 당시 ‘반공’을 구호로 내건 것도 어쩌면 자신을 향한 이런 공세를 불식시키려는 의도도 깔려 있었을 것이다.
‘매카시즘’은 냉전 시기 미국에서 유래했다. 1950년 2월 9일 웨스트버지니아 주의 휠링에서 열린 공화당 집회에서 조셉 매카시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은 “내 손에 205명의 공산당원 목록이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 명단을 공개한 일은 없었지만, 많은 이들이 ‘공산당원’으로 몰려 체포되는 고초를 겪었다. 곧이어 한국전쟁이 터지며 광풍은 더욱 거세졌고, 원자폭탄을 개발한 오펜하이머와 영화배우 찰리 채플린 등 다양한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이런 광풍을 사람들은 매카시 상원의원의 이름을 따라 ‘매카시즘’이라 부르게 됐다.
사실, 매카시즘의 광풍은 원조 국가인 미국에선 그 수명이 오래가지 못했다. 1954년엔 미 상원에서 매카시 의원에 대한 비난 결의안이 채택됐고, 정치 생명이 끝난 그는 1957년 48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하지만, 곧바로 한국으로 수입된 매카시즘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 ‘반공’을 기치로 내건 박정희조차 ‘매카시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을 만큼 위력은 컸다. 곧 박정희도 자신을 공격했던 그 무기를 자신의 최고의 무기로 휘둘렀다. 매카시즘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했고, 무고한 사람들을 사형시켰다.
1994년 주사파 공격과 2003년 송두율 교수 간첩 몰이 침묵했던 진보진영
1987년 6월 항쟁을 지나고, 군사독재정권을 거쳐 문민정부가 탄생한 이후에도 매카시즘은 계속됐다. 그리고 1994년과 2003년 우리는 상징적인 사건을 만났다. 1994년 7월 8일 남북정상회담을 보름 앞두고 북의 김일성 주석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김 주석 조문을 둘러싸고, 여러 논쟁이 있었다. 공안 당국은 조문을 불허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공안정국 조성으로 야권과 진보진영을 공격했다. 공안정국에 불을 붙인 건 박홍 서강대 총장이었다. 박 총장은 “북한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은 유학생이 교수로 있다”, “정당·언론에도 주사파 있다”고 발언했다. 다음날 ‘중앙일보’가 ‘병균은 색출해야 한다’는 사설로 박 총장을 거들었다. 그리고 각종 언론과 국가기관이 총동원돼 주사파 색출 소동이 벌어졌다.
공안세력의 칼날이 거세지자 진보진영 내에선 균열이 일어났다. 여러 단체가 기자회견을 열고 “지금까지의 통일운동이 친북성향 일변도 였다”면서 “주사파 배격”을 선언하고 나섰다. 그리고, 이들의 주장은 정권의 공안탄압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그해 7월과 8월 두 달 동안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사람만 120명이 넘었다. 하지만, 대대적인 주사파 척결 소동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구속된 이들의 상당수는 무죄로 풀려났다.
2003년에도 비슷한 소동이 빚어졌다. 그해 9월 송두율 교수가 37년 만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초청으로 가족과 함께 귀국했다. 국가정보원은 당시 그를 노동당 서열 23위 김철수와 동일인이라며 ‘해방 이후 최고 거물급 간첩’으로 몰아세웠다. 그 과정에서 송 교수의 조선노동당 입당 사실이 밝혀졌다. 그의 귀국을 추진했던 참여정부와 진보진영 인사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송 교수는 “학술 활동을 위해 북한을 드나들려면 관례적으로 노동당 가입 절차를 치러야 했고, 이후 노동당원으로서 활동하지도 않았고 스스로 노동당원임을 의식하지도 않았다”라고 해명했지만, 진보진영에서조차 진의를 의심했다. 당시 상황을 다룬 다큐멘터리인 ‘경계도시2’엔 이런 진보진영의 태도가 잘 담겨 있다. 그들은 “현 상황을 원칙이나 진정성으로 생각하지 말고, 축구할 때 골문을 수비하는 것처럼 기술적으로 생각하라”라며 노동당 탈당과 독일 국적 포기를 종용한다.
송두율 교수 ⓒ영화 경계도시2 스틸컷
송 교수는 결국 기자회견을 통해 노동당 탈퇴와 독일 국적 포기를 선언했다. 하지만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1심에서 징역 7년을 받았다. 그리고 2004년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받고 보름 만에 한국을 떠났다. 4년 뒤인 2008년 대법원에선 무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여론재판은 이미 끝난 뒤였다.
매카시즘을 불러온 건 공안세력이지만 이를 키운 건 탄압에 맞서 함께 싸우지 않았던 우리임을 절대 잊어선 안 된다
매카시즘이 태어나던 1950년 당시로 돌아가 보자. 존 매카시 공화당 상원의원의 발언으로 공산주의자 색출 소동이 벌어지자 미국 민주당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자칫 자신들도 공산주의자로 몰릴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지난 1994년과 2003년 매카시즘 공세가 벌어졌을 때 한국에서도 진보진영은 침묵했다. 자신을 향한 칼날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2014년 박근혜 정권이 반헌법 정당이라 낙인을 찍으며 통합진보당을 해산할 때, 얼마 전 윤미향 의원이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추모식에 참석한 것을 두고 친북 단체인 조총련 행사에 참여했다며 말도 되지 않는 공세를 펼칠 때 많은 이들은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
윤석열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전체주의가 대결하는 분단의 현실에서 공산전체주의 세력, 그 맹종 세력과 기회주의적 추종 세력들은 허위 조작, 선전 선동으로 자유사회를 교란시키려는 심리전을 일삼고 있으며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며 매카시즘 공세에 나섰다. 과거처럼 침묵하거나, 매카시즘의 불똥이 자신을 향할까 두려워해선 안 된다. 매카시즘을 불러온 건 공안세력이지만 이를 키운 건 탄압에 맞서 함께 싸우지 않았던 우리임을 절대 잊어선 안 된다.